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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 소믈리에’ 일명 스님

“소리 속에 존재가 있고, 자신이 있고, 내면의 진심이 있나니…”

‘스피커 소믈리에’ 일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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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계에서 ‘스피커 도사’로 알려진 일명 스님. 스승의 설법을 녹음해 좋은 음질로 들려줘야겠다는 작은 일념이 지난 27년간 성능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데 몰두하게 내몰았다. 그는 “명품 스피커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고 했다. 소리 안에서 진심을 보고 소리가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소리 연구 역시 수행이라는 그는 “소리라는 줄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 나 자신으로
  • 돌아온다”고 했다.
‘스피커 소믈리에’ 일명 스님

27년간 스피커를 연구해온 일명 스님은 “내가 만든 스피커가 일상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찰의 대웅전에 가보면 보통 삼존불(三尊佛)이 모셔져 있다. 왜 세 명의 부처님이 한 조를 이루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자비와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룬 성자의 인격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는 자비고 하나는 지혜다. 대체로 자비스런 얼굴은 미소를 머금는 경우가 많고, 지혜로운 모습은 냉철한 표정을 띄게 마련이다. 이들 상반된 두 가지 표정과 역할을 충돌 없이 나타내기 위해 양쪽에 두 명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보는 설이다. 오른쪽 불상이 자비라면 왼쪽 불상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식이다.

둘째는 오랫동안 수행에 정진한 노스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도를 닦고 있는 본존불을 양 옆의 두 불상이 시봉(侍奉)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 불상이 빨래를 하거나 밥을 짓고 불때는 일을 담당한다면, 왼쪽 불상은 돈을 벌어오는 역할이다. 도를 닦더라도 먹어야 하고, 집세나 전기요금을 내야 하는 게 사바세계의 실상 아니던가. 그러니 자금 공급책도 필요하게 마련이다. 좌우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본존불이 도를 통하면, 이번엔 본존불이 두 사람의 도통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 서로 품앗이를 하는 셈이다.

셋째는 깨달음과 예술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설이다. 가운데가 깨달은 도인이 앉는 자리라면 좌우는 예술가가 앉는 자리다. 도인과 예술가, 깨달음과 예술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상호보완적이면서도 한 걸음만 움직이면 서로 자리를 바꿔 앉을 수 있는 관계다. 즉 예술을 통해서 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수도나 예술 모두 집중을 요구한다. 그만큼 예술가는 깨달음에 접근해 있는 셈이다. 일명(一明·47) 스님을 만난 이유도 이 세 번째의 관계, 즉 예술을 통해서 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노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다.

소리를 통해 도의 세계로



예술도 여러 가지다. 일명 스님은 어떤 장르의 예술을 해온 것일까. 바로 소리(音)다. 그는 지난 27년 동안 소리에 깊이 천착해왔다. 한국 불교계에서 ‘일명’은 ‘스피커 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도의 차원에서 음의 세계에 접근한 인물이다. 별명은 ‘소구산(小九山)’이다. 구산(九山·1909∼83)은 전남 송광사(松廣寺)의 큰스님이었다. 27세 때 폐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어느 거사로부터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면 낫는다는 소리를 듣고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100일 동안 천수주를 독송(讀訟)하고는 기적적으로 완치됐다. 그리고 출가했다. 이렇듯 구산 스님은 천수주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일명 스님도 그 문하였으니 자연스럽게 관음보살과 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 ‘천수주’란 천수천안(千手千眼)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다라니(呪文)를 가리킨다.

일명 스님이 머무는 관음포교원은 서울 구로동에 있다. 구로동 하면 ‘노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치열한 세속도시의 현장이기도 하다. ‘비풍류처풍류족(非風流處風流足)’이라는 한시 대목처럼, 그는 노동의 한복판이라는 비풍류처에서 풍류가 넘치는 관음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나. 불교에서는 소리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성경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나온다. 불교에서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불교에서는 태초의 부처님을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에 의하면 위음왕불은 공겁(空劫) 때에 맨 처음 성불한 부처라고 한다. 공겁이란 태초를 의미한다. 그러니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가 된다. 말씀도 결국 소리로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기독교나 불교 모두 소리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리라고 하는 것이 그만큼 인간의 각성과 정신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물론 사상적으로 그렇지만,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계기도 있었다. 구산 스님의 법문을 녹음해서 신도들에게 들려줬는데, 음질이 좋지 않았다. 음질이 좋아야 더 생생하게 구산 스님의 설법을 들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지만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음질의 육성을 들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향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성능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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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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