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찍으면서 작가랑 스태프들한테 수도 없이 물어봤어. ‘이 얘기 진짜지?’ ‘맞지?’하면서 말이야. 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직접 접하게 되니까. 이거 완전히 돌아버리겠더라고.”
가만히 보니 감독 이름이 눈에 익었다. 김태균 감독? 대학 과(科) 동기 중에 김태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때부터 수업을 거의 빼먹고 연극·영화판을 쫓아 다니던 친구였다. 우리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 말~80년대 초반은 잦은 시위와 휴학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다. 많은 친구가 공부엔 별 관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군 입대 전까지는 만날 수업을 제치고 전국의 산을 쏘다녔다. 당연히 우리는 같은 과 동기였음에도 캠퍼스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뒤 간간이 그의 소식을 들었다. ‘박봉곤 가출사건’ ‘화산고’라는 영화를 그가 찍었다는 말이 동창들 사이에 돌았다. ‘역시 괴짜야.’ 동창들 모임에서 그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내렸던 결론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친구가 영화를, 그것도 우리 세대가 보기엔 좀 희한한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졸업 후 내내 동창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그 김태균이 ‘크로싱’을 만든 김태균 감독 그 사람일까? 궁금해진 나는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하는 목소리를 접하자,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대학 때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졸업 후에도 거의 접촉이 없었던 동창을 첫마디로 서로 알아본다는 것, 역시 인연이란 게 무섭다.
“네가 ‘크로싱’이란 영화를 찍었다고? 그것 참, 의외인데?”
“그러게 말이다. 나도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얼치기 진보’의 변화
그렇게 우리는 대학 졸업 후 이십몇 년 만에 마주 앉았다.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5월 초 어느 날, 그는 나를 방 안으로 인도하자마자 컴퓨터 모니터에 10분짜리로 축약한 ‘크로싱’ CD를 올렸다. 일단 보고난 뒤에 얘기하자면서.
영화는 진지했다. 한 북한 가족의 비극을 최대한 담담하게 비춰줌으로써 오히려 더 짙은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로 북한·안보 분야를 담당해온 기자로서 나도 탈북자들의 가슴 아픈 얘기들을 수없이 접하고 글로도 썼지만,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구나, 새삼 느꼈다.
“야,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놈인지. 젊은 애들 정서에 맞는 스타일리시한 영화만 만들던 내가 이런 영화를 찍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근데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건 기적이야, 기적.”
▼ 글쎄, 난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는걸? 너는 탈북자 문제 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 별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혹은 좀 진보적인 성향이었던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예컨대 김정일이 핵무기를 갖고 미국에 맞서면서 설칠 때 ‘야, 역시 대단해’하고 생각하거나 ‘잘한다’ 하면서 속으로 박수를 쳤었지. 탈북자들 얘기? 수용소 얘기? ‘에이, 설마….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하면서 무심하게 넘기곤 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이 영화 찍으면서 작가랑 스태프들한테 수도 없이 물어봤어. ‘이 얘기 진짜지?’ ‘맞지?’ 하면서 말이야.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일들, 인간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직접 접하게 되니까, 이거 완전히 돌아버리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얼치기 진보였던 거야.”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영화를 찍는 내내 무서웠어. 두 번인가 김정일에게 잡혀가는 악몽도 꿨다니까? 북한에 끌려가서 죽도록 고문을 당하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면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영화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비난을 받지 않을까, 혹시 서울의 어느 뒷골목에서 테러를 당하는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 그때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지. ‘하나님, 제가 그렇게 싫다고 도망 다녔는데, 왜 제게 이런 어려운 일을 맡기십니까.’
언제부턴가 오기가 생기더군. ‘그래, 끝까지 가보자. 모두들 성공할 수 없다며 말리는 이 작품을 내가 한번 완성해 보이겠다. 그래서 외면당하는 진실의 한 면을 보여주리라.’ 그렇게 된 거야.”
그날, ‘대학동기 김태균’의 사무실에서 시작된 대화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각각 자기 일에 파묻혀 살다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난 우리는, 그날 꽤 취했다.
‘탈북’은 상업영화판에선 불가능한 소재
다음 날, 김태균과의 만남을 정리해봤다. 흥미로웠다. ‘크로싱’을 찍은 김태균 감독은 내가 알던 과거의 김태균이 아니다. 그가 자인한 것처럼, 그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변했다. 과거의 김태균은 ‘영화에 미친 친구’, 겉으로는 ‘자유분방하다 못해 좀 껄렁해 보이기까지 하던 친구’였다. 그런 김태균이 심각한 얼굴로 탈북자 얘기를 몇 시간이나 계속하다니. 하나님 얘기는 또 뭔가. 그는 몇 해 전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 갔을 때(그는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라고 했다) 마지못해 끌려간 교회에서 ‘하나님의 터치(touch)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건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한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워.” 술자리에서 그는 조금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세상에. 그 김태균이? 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았을까.
다시 전화를 걸어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내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6월 초로 돼 있던 ‘크로싱’ 개봉 일정이 투자배급사 사정으로 연기됐다는 것이었다. 올 여름 할리우드 영화가 워낙 강세인데다 주된 관객층인 20대 이하의 ‘크로싱’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는 게 이유라고 했다. 더욱이 ‘크로싱’ 같은 탈북자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공연히 화가 났다. ‘영화판 사람들이 그렇게 안목이 없어서야. 그거 내가 보기엔 대박인데…’ 덩달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다시 만난 11일 일요일 오후, ‘김태균 감독’이 먼저 입을 뗐다. 조금은 맥 빠진 듯한 모습이 안돼 보였다.
“송 기자와 만난 다음 날부터 며칠간 굉장히 힘들었어.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예정대로 가기로 했었는데…. 사실 상업영화가 주류인 현실에서 ‘크로싱’ 같은 영화는 애당초 나오기가 불가능해요. 지금까지 북한이나 탈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성공한 사례가 없는데다가 이번 작품에 강력한 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또, 북한을 소재로 한 스토리는 우리 관객에겐 ‘그들의 얘기’일 뿐인데다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만 아파지잖아? 그런 점에서 젊고 의욕 있는 투자자가 40억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 감독에 따르면, 그동안 북한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몇 편 나왔지만 거개가 코믹을 가미한 것이었고, 그나마 성공한 작품은 없었다. 심지어 2년 전 영화계에서 ‘필승카드’로 꼽히는 차승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국경의 남쪽’이란 작품도 관객 30만명을 채우지 못한 채 간판을 내렸다고 한다.
▼ 그래도 ‘크로싱’에선 차인표라는 스타를 내세웠잖아요?
“인표 씨는 드라마 쪽에선 성공을 했지만, 사실 영화 쪽에선 이렇다 할 대박 작품이 없어요. 그래서 영화계 일각에선 ‘기피인물’로 꼽히기까지 하지. 그러니까 ‘크로싱’은 영화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두 가지나 안고 출발한 셈이지요.”
“내가 만난 탈북자만 100명 넘는다”
애당초 ‘크로싱’의 아이디어는 미국의 한국계 영화 프로듀서에게서 나왔다. 미국에서 10여 편의 영화를 만들어 꽤 성공했다는 패트릭 채(Patric Cheh)라는 그 프로듀서는 김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 제가 영화 만드는 일을 하지만, 요즘은 내 아이들 보기가 좀 민망해요. 만날 치고받는 영화나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모르던 세상 얘기잖아요. 의미 있고, 좋은 영화잖아요. 제가 최대한 도울 테니 형이 이 영화 만들어보세요.” 패트릭의 부친도 김 감독에게 영화를 만들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부친은 미국에서 북한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인사였다. 그때가 2005년이었다.
“참으로 난감했어요. 물론 좋은 작품이라는 건 알겠지만, 기획에서 투자를 끌어내고 촬영까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직감했거든. 선뜻 하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다’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지.”
서울로 돌아온 김 감독은 그때부터 북한 공부를 시작했다. 리서치 팀을 만들어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탈북자를 면담하고, 중국 현지에도 다녀왔다. 그렇게 꼬박 6개월 동안 북한 공부에만 매달렸다. 국내 자료는 물론 유엔에서 발간한 북한 인권자료, 미국이 제정한 북한인권법에서부터 영국 BBC 방송이 낸 북한 다큐멘터리, 일본 방송이 제작한 몰래 카메라 등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섭렵했다.
“우리 팀이 접촉한 탈북자가 200~300명쯤 될 걸? 그중 내가 직접 만난 사람만도 100명 정도였어요. 그런데도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확신이 안 서더라고. 탈북자들의 생생한 얘기를 들으면서도 ‘설마 그럴 리야…’ ‘이거 보수꼴통들이 지껄이는 얘기랑 똑같잖아’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차인표, 北 참상 사진 보고 출연 결심
김 감독은 그렇게 한참 마음고생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영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 변화의 과정을 ‘내 양심이 움직였다’는 말로 정리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터치’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북한에 대해 관심도 없을뿐더러 실상을 전해 들어도 잘 안 믿거든. 하지만 분명한 건 북한 땅에 그렇게 사는 우리 동포가 있다는 것, 그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도록 우리는 저들을 외면하고 있었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거지요.”
마침 투자배급사를 새로 차린 젊은 친구가 돈을 대겠다고 나섰다. 40억원. 첫 번째 기적이었다. 다음은 탈북자 영화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던 스태프 설득하기. ‘이번엔 예전만큼 돈을 주지 못한다. 고생도 훨씬 심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다. 함께 해보자.’ 스태프들은 군말 없이 그를 따라줬다. 고마웠다.
“준비과정에서부터 정치적인 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소지는 최대한 피했어요. 촬영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으니까.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은, 우리가 외면해온 세계를 고발한다기보다는 그 실상을 최대한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이 그냥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 쪽으로 가야 한다고 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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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생각해보세요. 고생은 죽어라고 할 게 뻔하고, 해봤자 정치적으로 욕먹을 소지가 다분하고, 흥행도 잘 안 될 것 같은 작품에 누가 나오려고 하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인표 씨가 결국 승낙해줄 거라고 믿었어요. 그 친구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착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그 부부가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인표씨조차 ‘왜 하필이면 접니까?’ 하면서 한참 동안 나를 피해 다녔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승낙을 했지. ‘만약 감독님이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 주연을 바꿔도 괜찮다’고 하면서 말이야.
인표 씨가 이 배역을 수락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자기도 고민이 되니까 인터넷으로 북한 관련 자료들을 찾아봤다고 해요. 그러다가 청진 장바닥에 죽어 있는 아이의 사진을 봤다는 거야. 그걸 보는 순간 인표 씨 머릿속에 천둥이 치면서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마음먹게 됐다고 해요.”
차인표는 영화 촬영 중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함께 기록을 남겨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그의 글들을 읽어보니 김 감독이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 게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상자기사 참조. ‘크로싱’ 홈페이지 http://www.crossing2008.co.kr/에서 연결).
▼ 차인표와 함께 스토리 전개에서 주축이 되는 게 아들 준이 역인데, 이 배우는 어떻게 구했지요?
“원래 아역 배우는 후보가 많아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600여 명을 면접했는데도 눈에 딱 들어오는 아이가 없는 거야. 그러던 중 누가 명철이 얘기를 해줬어요. 충북 영동의 산골마을에 사는 아이인데, 자기 영화를 찍을 때 써봤더니 괜찮았다면서 한번 만나보라는 거예요. 서울로 올라오라고 해서 오디션을 했는데, 아이가 느낌은 참 좋은데 연기가 얼어 있더라고. 그렇게 세 차례나 서울로 오르락내리락 한 끝에 마지막 순간에 다른 아이들을 다 내보내고 따로 연기를 시키니까 그때서야 얼어 있던 표정과 연기가 풀리더라고. 그렇게 합류하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인터넷에 올라 있는 ‘크로싱’ 예고편에 신명철 군의 모습이 나온다. 죽은 어머니를 보내는 장면, 수용소에서 이웃집 친구인 미선이(주다영 분)와 고생하는 장면, 몽골 사막에서 혼자 헤매는 장면 등이다. 특히 어머니의 시신을 태우고 떠나는 트럭을 쫓아가면서 울부짖는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촬영은 2007년 7월부터 9월 말까지 석 달 동안 했다. 국내에서 실내 촬영분을 찍고, 중국에서 열흘, 몽골에서 한달 남짓 보내며 다 찍었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예산이 빡빡하니까 최대한 서두를 수밖에 없었지만, 거의 미친 듯이 찍었어요. 원래 예산은 70억원이었는데, 투자받은 돈은 40억원이었거든. 그래서 돈을 아끼면서 제작기간을 줄이는 게 관건이었어요.
강원도 영월에 폐탄광 사택이 있는데, 이걸 조금만 손보면 북한 마을을 재연해낼 수 있겠더라고. 그 곳에서 엑스트라를 수백명 동원하는 신(scene)을 찍는데 촬영 전날에도 비가 오더니 다음 날 아침까지 그치지 않는 거야. 엑스트라를 서울에서 영월까지 동원하려면 하루 비용만 수천만원이 들어요. 그런데 전날 밤 12시까지 캔슬을 통보해주면 그중 절반은 건질 수 있고, 당일 새벽 5시 전까지 캔슬하면 25% 정도는 건질 수가 있거든. 고민 많이 했지요. 기도도 드렸고.
강행하기로 했어요. 영월에 거의 다 가서 탄광마을로 차가 올라가는데, 그때 갑자기 비가 그치더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거예요. 한마디로 기적이었어.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시는구나.’ 비가 그친 사이에 그날 계획된 촬영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
그는 중국에서 촬영할 때 겪은 일들에 대해선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현지에서 자신을 도운 이들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해서였다. 대신 몽골에서는 한결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중국에서 열흘간 일할 때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어요.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최대한 빨리 찍고 중국을 떠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 몽골도 북한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중국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몽골에서 국민배우로 존경받는 분이 있는데, 중요한 고비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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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독일영사관에 들어가는 장면을 몽골에서 제1야당의 당사 건물을 빌려 촬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을 때 중국 공안 복장을 한 엑스트라가 대거 동원되자 건물을 빌려준 쪽에서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의 반중(反中) 감정이 강한데, 백주대낮에 중국 공안이 설쳐대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의였다. 촬영은 중단됐고, 우여곡절 끝에 왕래하는 사람이 적은 일요일 오전 시간에 다시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이 우리 민족, 특히 북한 사람들과 겉모습이 아주 비슷해요. 입고 온 옷 그대로 내놓아도 엑스트라로 당장 쓸 수 있을 정도였지. 또, 몽골에서 북한 마을과 거의 흡사한 건물단지를 찾아내 영월보다 더 큰 오픈세트를 만들어 활용했어요.”
‘우리는 北을 어떻게 보고 있나’
김 감독은 몽골의 야산이 자료로 확인한 북한의 민둥산과 거의 똑같아 보인다는 점도 촬영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북녘의 헐벗은 산야(山野)와 그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몽골의 황량한 초원. 하나는 인재(人災)로 비롯된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땅이다. 그 둘을 비교하는 김 감독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영화 개봉이 연기되는 바람에 약간 맥 빠진 분위기가 됐지만, ‘신동아’ 인터뷰는 이번에 나가자고 합의했던 터였다. 그래도 그는 힘든 기색을 다 감추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서 회개했어요. 개봉이 연기된 것을 놓고 내가 왜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가, 아무도 안 된다고 말리던 영화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 해도 기적이 아닌가. 혹시 내 마음속에 이 일을 빨리 끝내놓고 다른 데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좀 더 기다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했어….”
김 감독에겐 다음 영화를 찍을 계획이 이미 잡혀 있다. 일본 영화기획사의 초청을 받아 흡혈귀 액션영화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 그건 다시 본래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얘기?
“난 ‘크로싱’으로 인해 내 이미지가 그쪽으로 딱 고정돼버리지 않을까 두려워. ‘크로싱’ 찍으러 중국에 갈 땐 ‘잡히면 감옥이라도 가지’ 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나 원래 무척 자유분방하게 사는 스타일이거든(웃음).”
삶의 어느 순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보이는 반응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진실을 끝까지 외면하는 사람, 진실을 자기 편한 대로 왜곡하는 사람, 진실 앞에 무릎 꿇고 겸허해지는 사람…. 김 감독은 처음엔 그 불편한 진실에서 도망 가려고 했지만, 종국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남북이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민족끼리 똘똘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세력도 아니고, 저 몹쓸 북한체제가 당장 망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보수파도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영화감독일 뿐이다. 자기가 만든 영화를 관객이 봐주고 공감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우리 사회는 지금 북한이라는 실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생각했다. 진실 앞에 겸허한 자세로 해법을 고민하는 사람들보다는 그 진실에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거나, 혹은 애써 왜곡하려는 사람이 더 많은 건 아닐까?
“‘크로싱’을 만드는 과정에서 두 가지 충격을 받은던 일이 있어. 하나는 평소 존경하던 분이 공석에서 북한 인권에 관한 질문을 받고서 ‘그건 역사의 문제이고 그들 내부의 문제다’라고 답변하는 것을 봤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지. 또 하나는 영화계의 한 후배 기자가 ‘형, SF영화 찍는다면요? 탈북자 걔네들 말을 어떻게 믿고?’라며 비아냥거렸을 때,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생각했어.
‘크로싱’을 정치영화가 아니라 그냥 휴먼스토리로 봐줬으면 해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그걸 그냥 다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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