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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고영구 원장 정실인사 문제삼다 ‘지휘체계 문란’으로 내몰렸다”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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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가 ‘친북좌파’라고? 내 논문이나 읽어보고 말하라
  • ● 고 원장과는 두 번의 악연…긴급조치 위반사건 징역 2년 때린 재판장
  • ●‘힘’에서 고 원장보다 우위였던 내가 그만둘 수밖에…
  • ● 과거사 진상규명, 국정원 직원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 ● 남북관계에 완전한 투명성은 난망…DJ 역할 살려나가는 게 바람직
  • ● 북핵문제, 미국의 의지 있으면 풀 수 있을 것
  • ● 아내의 자살은 남몰래 앓던 우울증이 원인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차관급)에서 상지대로 돌아온 서동만(徐東晩·49) 교수가 일본 도쿄(東京)대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해 1000쪽이 넘는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도서출판 선인)을 펴냈다. 서 교수는 8개월 동안 451개 각주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북한의 공식 문건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논문 발표 이후 새로 발굴된 북한 자료도 추가했다. 학계에서는 197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출간한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의 공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이후 이 방면 최초의 ‘대저(大著)’라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친북좌파’라는 공격을 받으며 국정원 기조실장에 취임했을 때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해명할 기회를 충분히 주겠다고 제의했는데도 “국정원 간부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사절했다. 서 교수가 국정원을 나온 뒤 ‘신동아’ 기자가 원주의 상지대 연구실까지 찾아갔으나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 고영구 국정원장과 인사 갈등을 빚고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박사학위 논문 보완해 저서 출간

필자가 그의 책 출간 직후 인터뷰를 요청하자 타이밍이 좋았는지 선선히 응낙했다.

“두꺼운 책이라 제작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대중성이 떨어지는 연구자용 책이라서 출판사가 손해를 볼까봐 걱정입니다. 인터뷰를 해서 책 홍보를 도와줘야죠.”



그는 2주 전 서울 개포동으로 이사했다. 인하대 사학과 교수였던 부인 강옥초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등학생 딸을 돌보기가 어렵게 되자 누나 집 길 건너에 월세 아파트를 얻었다.

이사를 했는데도 부인의 책장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서 교수가 인터뷰 사진을 찍는 동안 불행한 일을 겪은 데 대해 위로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사랑하는 아내 고 강옥초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저자가 유학생활 동안, 그리고 이후에 겪었던 어려움을 아내는 삶의 반려로서 모두 받아주며 묵묵히 감내해냈다.…(중략)…그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이고 성실한 아내, 엄마이자 연구자, 교육자였다. 하지만 얼마 전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다. 이 책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명복을 빌고자 한다.’(책 서문)

서 교수는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위를 감추지 않고 자세히 들려줬다.

“그 사람이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실을 제게 숨겼어요. 병은 나눠야 고칠 수 있는데…. 처제에게만 말했더군요. 가족에게 개별적으로 유서를 남겨놓았죠. 나중에 보니 우울증에 관한 책을 구해 읽고 자살 관련 대목에 밑줄을 쳐놓았더라고요.”

우울증은 자살한 영화배우 이은주가 앓았던 바로 그 병이다. ‘마음의 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뇌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으로 생긴다고 한다.

-책 서문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일부 보완했다는 표현이 있던데, 주로 어떤 부분을 손질했습니까.

“논문 쓸 때 아직 발굴 안 된 자료들이 있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정로(正路)’입니다. 1945년 10월13일 결성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 분국에서 발행한 기관지가 ‘정로’입니다. 북조선노동당의 전신이죠. 북한연구자들 사이에서 맴돌던 몇 가지 수수께끼가 ‘정로’의 발굴로 풀린 거죠. 1990년대 말 모스크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현수씨가 찾아냈어요. 전씨는 지금 경북대 사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죠.

1946년 8월 창립된 북조선노동당의 기관지가 ‘노동신문’입니다. 지금도 발행되고 있죠. 멸실됐던 초기의 ‘노동신문’도 옌볜과 베이징에서 발굴됐습니다. 전현수 교수, 충북대 김성보 교수, 조선대 기광서 교수 같은 분들이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면서 소련군 정보보고서를 정리하고 발굴했습니다. 중국 쪽에서도 6·25전쟁과 관련한 자료들이 공개됐죠. 이렇게 새롭게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보완했습니다. 논문의 기본틀, 주제, 취지는 원 논문 그대로입니다.”

‘친북좌파’와 ‘DJ식 햇볕론자’

-일본 유학을 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버지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께서 식민지 시대에 히토쓰바시(一橋)대에 유학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 미국 유학을 가니까 남들 안 가는 일본 유학을 하고 싶었던 거죠. 일본에 친척도 있었고요.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더라면 유학 안 가고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을지도 모르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해 무사히 졸업했어요. 그런데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외부의 지시가 있었죠. ‘빵잡이(교도소 다녀온 학생)’들은 다 떨어뜨리라는. 학교로서는 불가항력이었어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도 ‘빵잡이’라서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고 연세대 대학원으로 갔죠.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여권이 안 나왔어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근무하던 1986년에 규제가 풀렸죠. 전두환 정부가 유학 문호를 대폭 열 때입니다. 그때 유학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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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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