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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교수 인터뷰

“몽양은 공산당 독재, 폭력혁명, 유물론 배격한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정식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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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교수 인터뷰
몽양 추모 학술심포지엄이 끝난 뒤 이정식 교수를 만났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개척자인 이 교수는 ‘한국공산주의 기원’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정치 및 국제문제 최고 저작에 수여하는 미국 정치학회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상을 수상했다.

공산주의자, 기회주의자

▼ 한국 공산주의운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57년에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일본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제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분이 1년 동안 이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구해온 자료 중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부분을 제가 정리한 게 계기가 됐죠. 그 후 그분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운동을 연구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분파로서 연구를 계속했고요.”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인 스칼라피노 교수는 아시아 공산주의운동 연구의 대가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조직을 이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당시 한국 학계의 통념을 뒤엎고 동일인물임을 밝혀냈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독립운동이 과장됐다는 것도 입증했다.



▼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당시 한국에서 공산주의 연구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한국 공산주의 기원에 대한 제 논문 두 편이 미국의 아시아학회지에 실렸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 공산주의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였죠. 그게 1960년 4·19혁명 직후에 국내에서 출판됐는데, 형사들이 동국대 이정식 교수라는 분을 찾아가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저와 동명이인인데다 나이도 같고, 더구나 같은 비교정치학 전공이라 오해를 했던 모양이에요.”

▼ 정부가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진 않았나요.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1966년 한국에 왔을 때 대접이 너무 좋았어요. 북한 연구를 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어요. 강의하느라 정작 학자로서 연구를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자칫 어용학자 소리를 들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곧장 미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 몽양 여운형은 어떤 계기로 연구하게 됐습니까.

“스칼라피노 교수가 보내온 자료 중에 일본 경찰이 안창호와 여운형을 신문 조사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걸 인상 깊게 봤어요. 그게 1957년이니 여운형을 알게 된 지 꼭 50년 된 셈이네요. 그 후 한국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 연구를 하다 보니 여운형이란 인물이 계속 튀어나왔어요. 좌우를 넘나들며 감초처럼 속하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등이 비교적 단순한 인물인 반면, 여운형은 매우 복잡한 인물입니다. 심지어 일제는 미국, 중국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게 힘에 부치니까 1942년부터 중국과 종전(終戰)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던 날, 총독부가 그에게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데 피해가 없도록 치안을 맡아달라고 했을 정도예요.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기회주의자였다고 비난받기도 했어요. 왜 그가 일직선을 걷지 않고 복잡한 길을 택했는지, 과연 몽양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등은 학자에게 재미있는 과제죠.”

시대를 앞선 진보적 민족주의자

▼ 여운형 전기를 집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확실한 건 1981년에 몽양의 딸 여연구씨를 만났을 때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그전부터 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부터였고요. 올 9월까지 탈고할 계획입니다.”

▼ 몽양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활달하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국제화한 인물이고, 트인 사람이었어요. 사물을 교조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또한 자기주장만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어요. 자기와 의견이 달라도 대화를 해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사람이었고, 남에게서 배우기를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죠.

저는 그가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을 통한 혁명을 배척했고, 기독교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어요.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삼은 그로선 공산당 독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거죠.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룩한 첫째는 반제국주의 사상이고 둘째는 독립에 대한 집념이었어요. 물론 조국이 분단된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집념은 통일독립으로 변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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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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