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8월 방북일정을 마친 현대 정몽헌 회장(가운데) 일행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정 회장 오른쪽 옆이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그런데 금강산을 뭘로 가요? (휴전선이 막고 있으니) 육로는 안 되잖아요. 그때 정몽헌 회장이 배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항구는 우리가 건설하면 된다면서. 그 아이디어를 김정일한테 그대로 전했죠. 그렇게 해서 성사된 겁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사업이잖아요. 정주영 회장님은 ‘북한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 사회적 생산기반)를 우리가 해야겠다’고 욕심을 냈죠. 그런 일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정주영 회장님이 정몽헌 회장에게 ‘야, 우리 대통령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만나서 그 일에 합의하게 하면 어떨까’ 하고 말씀했지요. 그게 출발점이었습니다. 요시다라는 사람이 중간에 나서서 북한의 문을 열었죠.”
재일동포인 요시다 다케시는 일본에서 대북 로비스트로 통하는 인물.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신일본산업 사장이던 그는 현대가 북한과 비밀접촉을 할 때 창구 노릇을 했다. 정몽헌 회장의 검찰 진술에 따르면 이익치씨는 현대와 요시다 사이에서 메신저 노릇을 했다.
▼ 이 회장께서 요시다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습니까.
“그게 아니고요. 정주영 회장님이 금강산을 열라고 하는데, 제가 뭘 알아야죠. 정몽헌 회장도 그렇고. 그래서 일본 쪽을 알아봤지요. 김영삼 대통령과 오랫동안 민주화투쟁을 같이 했던 박정두 고문(당시 현대증권 고문)이라고 있는데, 그 분이 고바야시 게이지라는 일본인 교수와 친했습니다.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지낸 고바야시는 북한 김용순(노동당 대남담당비서, 아태평화위원장 역임)과 통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김영삼 정부의 대북 비선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박 고문에게 부탁해 고바야시에게 편지를 썼죠. 그런데 고바야시도 하다가 막혔어요. 요시다 외에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바야시의 소개로 정몽헌 회장이 요시다와 연결된 겁니다. 내가 나중에 확인해보니 요시다 라인 아니면 북측이 인정을 안 해요. 만나보니 사람이 아주 반듯하더라고요.”
정몽헌의 카지노 청탁
▼ 정몽헌 회장의 검찰 진술서에는 “이익치를 통해 요시다에게 정부측 협상대표가 박지원 장관이라는 것을 알려줬다”는 등 뭐든지 이 회장을 통해 추진한 걸로 돼 있던데요.
“그건 아니고요. 정상회담을 준비하려면 누군가 정부대표단을 이끌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정몽헌 회장이 요시다를 통해 북측과 접촉했는데, 그쪽에서 국정원 쪽은 싫다고 한 모양이에요. 정몽헌 회장이 정부 쪽에는 나름대로 라인을 갖고 있었잖아요. 여러 여건상, 박지원 장관이 적임자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정몽헌 회장이 박 장관을 많이 쫓아다녔대요. 선상 카지노 문제로. 그래서 잘 아는 사이인데다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박 장관이) 비선 책임자로 확정됐다고 정몽헌 회장한테 들었습니다.”
정몽헌 회장은 죽기 이틀 전인 2003년 8월2일 검찰에서 카지노와 관련된 진술을 남겼다. 진술서에 따르면, 정 회장은 1999년에 무기중개상 김영완씨의 주선으로 박지원 장관을 두 차례 만나 금강산 유람선에 카지노 허가가 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탁했다. 처음엔 1999년 5월경 프라자호텔 객실에서, 두 번째는 그해 11월 하순 또는 12월 초순 롯데호텔 객실에서 만났다. 정 회장에 따르면 두 번 모두 김영완씨가 동석했다.
특검 조사가 시작되기 직전 출국한 김씨가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제출한 자술서 내용도 정 회장의 진술을 뒷받침한다. 김씨는 정 회장이 자신의 소개로 박 장관을 만나 카지노 허가 청탁을 했으며 자신도 박 장관에게 “현대에서 카지노 허가를 받으면 내가 카지노 사업을 하기로 했으니 도와달라”며 정 회장의 청탁을 거들었다고 진술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현대는 북한에 5억달러를 건넸다. 대북송금 특검에 따르면 그중 4억달러(이중 5000만달러는 현물)는 경협자금이고 1억달러는 정상회담 대가였다.
▼ 일종의 권리금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죠. 정주영·정몽헌 회장에게 공짜라는 건 없죠.”
▼ 다른 기업이 현대가 선점한 대북사업에 참여하려면 돈을 내야겠군요.
“그럼요. 로열티를 내야겠지요.”
이씨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일본의 청구권자금을 거론하며 남쪽 기업의 북한 진출을 권유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