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입력2007-09-06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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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전의 뉘 집 바람벽에 걸린 족자에서 ‘호질전’의 저본을 베끼고, 그 이튿날 아침(1780년 7월29일) 연암은 청나라의 황성인 북경을 향해 말고삐를 죄었다. 옥전에서 송가장을 지나 연교, 노하, 통주를 거쳐 북경까지는 300리 길.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통일하고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한 현장이 연암의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 2월과 5월에 이곳을 답사한 필자는 연암이 본 것과 다른 차원의 상전벽해를 확인했다.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옥전(玉田)에서 송가장(宋家莊)을 지나고 어양(漁陽·지금의 계주(·#53626;州))을 거쳐 방균(邦均)을 지났으며 연교(燕郊)로부터 노하(潞河), 통주(通州)를 거쳐 북경까지 만 엿새 동안 122km를 달렸다. 여기 300리는 북경의 근교였다. 말하자면 황성으로 들어가는 말죽거리다. 그 번영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어양에 들자 벌써 거마 소리가 우레 같았고, 노하의 부둣가에는 만 척의 상선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통주로부터 북경까지 50리 길은 석판의 탄탄대로에 부딪는 쇠바퀴 소리가 귀를 찢었고, 영통교(永通橋)부터 조양문(朝陽門)에 이르는 그 직선의 운하로 작은 배들이 연락부절이라 했다.

    연암의 눈이 마침내 휘둥그레졌다. 청나라 문명의 충격은 물론 처음이 아니다. 청국으로 들어오는 책문에서 그 번창하고 화려한 거리 풍경에 놀랐고, 성경에 산적한 상품과 오랜 역사의 골동에 감탄했으며, 다시 백기보로 이동할 때 수렁 길 200리에 먹줄을 친 듯 반듯하게 놓인 다리, 그리고 무령(撫寧) 거리에서 눈부신 금옥의 편액들을 보았을 때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명적인 것들이었다.

    8월1일 북경의 정양문 앞에 발을 디딘 연암은 높이 솟은 패루와 누런 기와가 파도치는 구중궁궐과 맞닥뜨렸다. 단순 건축물이 아니었다. 이 땅에 붉은 모자와 말굽 모양 소매를 걸친 청인들이 정권을 창출한 지 어언 4대, 건륭(乾隆)이란 배를 띄운 지 45년, 그들은 18세기를 뒤흔들어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아니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실재 정권이요, 세계에 그 영향을 촉발하는 실세다. 비록 만주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지만 중국의 21대 왕조 3000년의 역사에 당당히 몸을 꽂고, 그 유구한 역사공간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시 어떤 법술과 심법(心法)이 있을 것이라고 연암은 믿었다. 연암은 북경의 먼지 속을 다만 스치고 지나가는 한낱 과객이 아니었다.

    惟精惟一의 선례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북경의 한 유리창 골목.

    연암은 조국의 조야하고 교조적인 성리학파들이 여태 고집하고 있는 복명(復明)의 실체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청나라의 실재와 실세에 대해 역사에 묻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연암은 그 심법으로 ‘유정유일(惟精惟一)’을 들었다. 사전적으로는 ‘하나로(專一) 정진(精進)하다’의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풀이하면 일관성·통일성·불변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서경’의 ‘대우모(大禹謨)’편에서는 ‘오직 하나로 정진함에는 성실하게 중용을 잡을지어다’라고 했다.



    일관과 통일, 불변의 원칙 운용에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그 전제로 삼은 것도 주의할 만하다. 연암은 ‘유정유일’의 심법을 성인의 역사에서 찾았다. 곧 요·순으로부터 홍수를 다스린 하우, 정전(井田)제도를 세운 주공, 학문을 편찬 정리한 공자, 이재(理財)를 밝힌 관중의 업적이 유정유일의 선례라 했다. 연암의 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 이전의 전설, 즉 무명의 성인이나 역사에서 왜곡되거나 역사의 비판을 받은 그 모든 실재의 역사와 심지어 모방된 역사까지 일관된 역사, 통일된 역사로 간주했다. 매우 섬뜩한 실학자의 사안(史眼)이다.

    연암은 문자가 창조되기 전에 중국 역사의 기초를 다지고 수정한 무명의 성인들의 심력과 총기를 기억하길 바랐다. 그뿐만 아니다. 심술(心術)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우인(愚人)으로 지목된 이가 있다. 연암은 그들이 음탕한 마음과 영리한 기교로 재앙의 두목이 되고 우부(愚夫)의 탈을 썼지만 천지를 뒤흔들 만한 업적으로 천하를 통일했음을 환기시켰다. 바로 옥과 구슬로 궁궐을 지은 걸, 주를 비롯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 천하에 곧은 길을 닦은 진시황, 천하의 법과 제도를 통일시킨 상앙 등을 그 예로 들었다.

    또 한 가지 있다. 역사의 모사력(模寫力)이다. 춘추 때 육국(六國)은 걸과 주를 욕하면서도 그들의 경궁요대(瓊宮瑤臺)를 모방하다 장화대(章華臺)와 황금대를 지었고, 진시황의 아방궁은 장화대와 황금대의 윤곽을 모사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미앙궁(未央宮)은 아방궁의 재판이다. 그것들이 어느 날 잿더미가 되건만 계속 되풀이했고, 공사할 때는 짐짓 모르는 척하다가 뒷날에야 고래고래 꾸짖는 버릇마저 되풀이했다.

    ‘나를 알아줄 사람 하나 있다면…’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계현 독락사 정전 뒤에 있는 관음각 전모. 연암의 ‘열하일기’ 기록과 일치한다. 특히 연암이 보았던 이태백의 편액이 지금도 걸려 있다.

    결국 정양문에서 구중궁궐과 그에 비해 개미처럼 미세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다볼 때, 황성은 비록 우부나 화수(禍首)의 불명예를 둘러썼지만 그 역량과 재주, 지혜가 진천동지할 만한 철권의 정치와 역사의 모사력의 결합체라고 연암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역사는 굳이 성인의 가르침대로 선행의 집단에 의해서만 계승되는 것이 아니었다. 화하(華夏)의 민족이 아닌 이적(夷狄)이라도 요·순의 도를 이어받고, 후세 제왕의 학문이 성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역량과 재지를 다한다면 3000여 년 중국 역사의 연장선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말하자면 걸, 주, 몽염, 진시황, 상앙 등의 제도 통일력도 유정유일의 방법에 지나지 않다고 긍정했다.

    거기다가 성인은 일찍이 도(度), 양(量), 형(衡)을 규제해 역사를 통일했다. 둥근 것은 그림쇠에, 모난 것은 곡척에, 곧은 것은 먹줄에 맞도록 각각 규제했다. 꼼짝 못하게. 이런 법칙이면 천하를 한 수레바퀴처럼 몰고 갈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연암은 힘주어 말했다. “(그 법칙을) 천하에 적용하면 천하가 이를 지키고, 심지어 걸·주에 적용해도 걸·주가 지킬 수밖에.”

    이는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일지라도 중국의 ‘유정유일’을 준수해서 오늘의 실체를 이뤘다는 긍정이며 동시에 청나라가 중국의 국통(國統)을 이었다는 연암의 선언인 셈이다.

    북경에서 연암의 일정은 극과 극, 격정의 연속이었다. 8월1일 정양문에서 ‘유정유일’을, 8월4일 27만 칸의 유리창(琉璃廠)에선 천하의 고독을 만난 것이다. 정양문 그 존엄의 실체 앞에서 중국 역사의 통일성을 보았고, 유리창 그 번영의 현장에서 갑자기 ‘천하지기(天下知己)’를 반문한 것이다. 그는 유리창 어느 다락에 올라 이렇게 중얼거렸다.

    “천하에 나를 알아줄 사람 하나 있다면 한이 없을진저!”

    연암은 산해관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열사흘째 줄곧 청나라 문명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카타르시스에 달해 이같이 고독을 울부짖었다. 지난달 청석령을 넘고 삼류하를 건넜을 때, 저 멀리 몸을 드러낸 요양의 백탑을 보고 ‘아! 여기 한바탕 울 만하구나!’라고 감탄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연암은 유리창에 홀로 서서 사무친 이방감에 몸서리쳤다. 자신의 행장, 생김새, 내력을 알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조선 땅에서 떵떵거리던 반남 박씨 자신을 알 턱이 없었다. 동시에 무한한 자유를 만끽했다. 여기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풍요의 거리에서 미치광이가 되고 싶고, 또 성인이나 부처를 비롯한 철인이나 현인으로 둔갑해 이 고독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위안했다. 공자의 말을 빌려 ‘사람이 나를 몰라준다 하여도 화내지 않을 것(人不知而不·#53784;)’이라고 했고, 노자의 말을 빌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나란 존재가 귀하기 때문(知我者希, 我其貴矣)’이라고도 했다.

    연암은 고독의 절정에서 익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여유만만했다. 선사에 있었던 전설과 역사에 씌어진 사실로 미루어 인간은 이 망망한 천지 속에 절대적으로 버려진 미물의 존재가 아니라고. 연암은 애써 은 임금이 제위를 버리고 거리에 숨었다가 격양가를 부르는 농부를 만났다는 이야기로부터 공자가 송나라서 쫓겨 다닐 때 저 뒤쪽에서 안자가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먼저 죽겠습니까?’하며 나타났던 사적을 예로 들었다.

    번영의 저자소리와 부의 패덕

    북경이라는 청나라 황성의 근교에 들면서 연암의 스트레스는 이렇게 돋우어졌다. 옥전에서 100리 길을 달려 계주성에 다다른 연암은 구경거리를 만나 부산했다. 독락사(獨樂寺)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당(唐)나라 때 건축했으나 요(遼)대에 중건해서 현재 요나라 3대 사원의 하나로 꼽는 절이다. 연암은 독락사 아홉 길의 금불과 와불을 참관했다. 이불을 덮고 누운 와불은 부처가 아니라 이태백이 술에 취해 누운 모양을 새긴 조각이라 했다.

    어양교가 계주성의 중심이었던 모양이다. 왼쪽에는 양귀비의 사당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안녹산의 사당이 마주보고 있었다. 여기는 안녹산이 반군을 일으켜 천하의 강국 당나라를 공격하고 황제를 꿈꾸던 반란의 거점이다. 전설에 따르면 독락사의 이름도 안녹산이 ‘저 혼자 즐길 뿐 백성과 어울려 즐기지 않는다(思獨樂而不與民同樂)’를 빗대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들의 사당을 두고 속이 뒤틀린 연암이 독락사의 이태백 취와상을 보고 속이 후련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거침없이 한마디했다. ‘천하에 돈 있는 놈들 못할 짓이 무엇인가. 하필이면 음탕하고 더러운 사람들 기리려 사당 짓고 무슨 명복을 빌자는 것이람?’

    연암은 계주성을 지나 연교에 가까울수록 거마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요란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그러한 번영의 저잣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있었다. 돈 있는 사람들의 저택들은 그렇다 치고, 길가의 무덤들이 눈에 거슬렸던 것.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인가처럼 담장을 두르고 담장 밖에는 못이며, 홍예의 돌다리를 세웠을 뿐 아니라 패루에 통나무배까지 매어둔, 말하자면 양택인지 음택인지 분간 못할 호화 분묘가 줄을 섰더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부(富)의 패덕이다. 예의 염치를 주장하는 당시 조선의 성리학풍과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남(男)은 남, 여(女)는 여, 생(生)은 생, 사(死)는 사 그것이 분별되어야 하는 유가의 원칙에도 거슬렸다.

    선박 건조와 해운 관리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북경에 있는 동악묘 대문. 조선 사절이 여기서 옷을 갈아입었다.

    연교보를 지나 노하에 당도했을 때, 연암처럼 조선의 산간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개벽의 경희를 느낄 수밖에. 당시 노하는 경항(京杭) 운하의 기점인 데다 천진(天津)으로 흘러가는 조백하(潮白河)의 합수점이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는 북경의 외항인 천진으로 가는 길초요, 남으로는 항주까지 경항 운하, 그리고 북경의 조양문까지 작은 운하가 열리는 삼거리였다. 노하에 이르자 갑자기 우렛소리가 하늘이 무너질 듯했다. 배에서 울리는 대포 소리라 했다. 그 길로 강역에 올랐다. 포구에 가득한 돛대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다고. 포구 가에 있는 집 그 편액에 적힌 대로 ‘만수운집(萬雲集)’이나 ‘성문구천(聲聞九天)’처럼 만 척이나 되는 선박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선적 소리가 구천까지 사무치는 광경이었다.

    연암이 놀란 것은 만리장성에 견줄 만한 선박의 운집이 아니라 그처럼 많은 선박의 건조와 해운의 관리였다. 우선 배의 구조가 밑창, 갑판, 선실, 지붕의 4층인 데다 밑창은 창고로, 갑판과 선실은 조각과 그림으로, 지붕 누각 또한 현판, 주련, 휘장, 서화 등으로 꾸민 호화 선박이었다. 그때 한 떼의 선단이 도착했다. 호북(湖北)서 조세로 수납한 좁쌀 300만 을 실은 배들이었다.

    포구에 운집한 선박마다 깃발이 펄럭였다. 그때 벌써 ‘절강(浙江)’ 이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선적(船籍)을 깃발에 표시했던 모양이다. 이래서 연암은 노하의 배 구경을 못한다면 황성의 장관을 알 수 없노라고 총평했다.

    그런데 연암은 여기서 희한한 걸 구경했다. 글쎄 배에 관을 싣고 상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객을 맞고 있었다. 7월9일에 사망한 부친의 유체를 모시고 먼 호북땅 고향으로 운구 중이었다. 그날이 8월1일이었으니 벌써 22일장인 셈이다. 상복을 입은 상주가 머리도 깎지 않은 채 코앞에 의례(儀禮) 몇 권 놓고 거상 중임은 조선과 별반 다름없었지만 거상기간이 턱없이 긴 데다 상가(喪家)에 풍악도 잡히고 투전판도 벌어지는 등 이색적인 상례였다. 연암은 거기 선상의 상가, 갈매기 구름 누각 모래사장 그리고 돛들이 오락가락 옹기종기 영롱하게 비치는 파란 창가에서 문득 물위에 뜬 집임을 잊은 채 ‘월파정상인(月波亭喪人)’, 곧 달빛 물결의 정자집 상주라고 시적으로 묘사했다.

    연교와 노하를 떠나 통주와 영통교를 지날 때도 경이로움은 계속됐다. 영통교에서 조양문 밖까지는 운하 양쪽으로 짐승 모양을 한 수백, 수천 개의 난간 기둥과 무지개다리 수십 길에 펄펄 안개가 날렸으며, 통주에서 황성까지 긴긴 석판로에 쇠수레바퀴들이 마주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거기도 담장으로 에워싸인 분묘는 계주성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북경성 동악묘. 삼사(三使)는 관복을 고쳐 입고 높고 낮은 반열을 정비했다. 눈앞에 우뚝 선 정양문, 그러나 먼지가 부옇게 하늘을 덮은지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수레들이 물통을 싣고 여기저기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 차례다. 더 이상 경이로운 풍경이 있다 한들 정양문, 선무문, 유리창에 견주랴! 이제 압록강에서 북경성까지 서른세 군데의 역참을 지나온, 장장 1015km의 연행에 일단 쉼표를 찍어야 한다.

    한·중 선비의 우의

    ‘관내정사’ 후반부 122km는 경이와 격정 일색이었지만 훈훈한 이야기 한 쪽이 없는 건 아니다. 연암이 7월30일, 호타하(??河)를 건너 삼하(三河)에 들렀을 때 갈 길이 바빴음에도 민가 한 곳을 찾았다. 삼하읍 동쪽 관우묘 옆 작은 초가집 모퉁이에서 중국 선비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을 찾고 있었다. 손씨는 연암의 친구이자 조선의 실학자 담현 홍대용(洪大容)의 친구였다. 담헌이 연암보다 15년 앞서 그의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출사할 때 군관으로 수행했던지라 그때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담헌이 연암 편에 편지와 선물을 부탁했기로 연암이 이를 전교하려 친히 방문한 것이다. 우편이 불편했던 시대, 한·중 선비의 우의를 상징하는 미담이다.

    손씨는 산서(山西) 지방에 훈장으로 출타 중이라 만나질 못했고, 집에는 딸 하나를 데리고 부인만 사는지라 주렴을 사이에 두고 선물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던 풍속 또한 애틋하다. 그때 무너진 담장에 처녀 하나 하얀 얼굴을 달고 있더라고.

    북경에서 연암 일행은 곧장 서관(西館)으로 머리를 돌렸다. 청나라가 안배한 사절의 객사(客舍)였다. 연암은 조선 사관의 내력을 밝혔다. 맨 처음 배정된 곳은 옥하관(玉河館)으로 청나라 개국 초에 자금성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인 옥하에 지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체통을 세웠지만 머지않아 까닭 없이 러시아 사람들에게 넘어갔고, 두 번째 배정받은 회동관(會同館)은 건어호동(乾魚胡同)에 있는 옛날 만비(滿丕)라는 도통의 집이었다. 회동관은 흉가라는 소문으로 음산했다. 만비가 피살되고 그 가족들이 자살하면서부터다. 하지만 회동관을 계속 객사로 썼다. 다만 별사들과 동지사들이 한꺼번에 붐빌 때면 부근의 서관(西館)을 얻어 분관으로 썼다. 그러다 연암이 연행을 시작하기 한 해 전에 회동관이 소실되자 서관을 본관으로 임시 사용 중이었다.

    필자는 지난 2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관내정사’ 후반부를 답사했다. 그러니까 연암이 다녀간 지 227년 만이다. ‘열하일기’ 어느 길인들 옛날 같을까만 이 구간, 계주성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 만큼 벽해상전이 현실화한 곳은 없을 성싶다.

    안녹산사와 양귀비사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중국인민최고법원 옆에 있는 어느 변호사 사무소. 러시아식 건물이다. 옛 옥하관 자리.

    그토록 많던 옛 사적은 역사에만 남았고, 삼대처럼 빽빽하던 돛대들은 간 데 없고 포구 옛 자락마다 깃대처럼 철근 콘크리트가 하늘로 솟구쳤다. 어디서고 나는 역사의 미아가 되었다. 현대화의 물결이 20년이나 휩쓸고 지난 뒤, 나는 ‘개혁개방’이란 새로운 트랙터가 쟁기질한 고랑에 서 있다.

    옥전에서 버스를 타고 서북방향으로 1시간가량 계주성을 향해 달렸다. 중간에 채정교(彩亭橋) 고수진(孤樹鎭) 별산진(別山鎭)을 거쳐 계현(·#53626;縣)에 도착했다. 지금의 경유지명은 ‘열하일기’에 나온 彩亭橋 枯樹店 鱉山店과 달랐다.

    연암이 ‘열하일기’에 기술한 청나라 지명이 차라리 시적이고 사실적이다. 고수진이라는 지명만 해도, 수백년 된 고목이 있었는데 가지나 밑동이 썩지 않은 데서 유래했다. 지금의 중국 지명은 옛날의 자음을 쉽게 고쳐 쓴 별자(別字)가 많다. 예를 들어 ‘일신수필’에 나오는 십삼산(十三山)은 지금 석산(石山)으로 개명됐는데 중국어로 발음할 때 十三과 石山이 비슷해서다.

    필자가 계주성을 부리나케 달린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유는, 그곳이 성당(盛唐)의 현종(玄宗)에게 충성을 바치다 끝내 현종을 촉나라로 추방하고 황제의 감투를 썼으며, 현종이 총애한 양귀비와 눈이 맞아 놀아난 안녹산(安祿山)이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곳이어서다. 둘째 이유는, 그렇게 야심에 찬 오랑캐 무장 안녹산과 그토록 부도덕한 절세미인 양귀비, 두 사람을 기린 사당이 그곳에 있다고, 연암이 일기에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독락사에 있는 이태백의 취와상(醉臥像)이 아직 있다면 이태백의 표일하면서도 천의무봉한 그 천년의 용태를 감상하고파서다.

    계현은 현재 천진(天津)시에 속해 있다. 서북쪽 2km 지점에 ‘경동제일산(京東第一山)이요, 중국 15대 명승의 하나로 꼽는’, 그래서 명나라 명문장가 원중랑(袁中郞)이 ‘반산기’로 그를 찬미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