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조직관리의 새 이정표 제시한 ‘아름다운 축구’의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5-22 09: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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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주변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나라가 어디 있으랴만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앙숙이다. 각각 섬(영국)과 대륙(프랑스)을 대표하는 두 나라는 환경, 기후, 역사, 국민성, 행동 양식, 생활 습관이 확연하게 다르다. 영국인은 프랑스인이 옷과 음식만 중시한다고 비판하고, 프랑스인은 영국 음식과 날씨는 세계 최악이라며 조롱한다. 이런 상황에서 1996년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명문 구단 아스날에 과묵한 프랑스인 아르센 벵거(63)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1886년 창단한 아스날이 외국인 감독을 영입한 건 110년 만으로 최초였지만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영국 축구계는 그를 대놓고 무시했다. 벵거가 무명 선수 출신인데다 세계 3대 프로 축구 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리가 등에서 유명 구단의 감독을 지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EPL 내에 외국인 감독 자체가 거의 없었던 터라 아스날 선수들도 팬들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국 언론은 거의 매일 “아르센이 누구?(Arsene Who?)”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냈다. 아스날의 감독이 되기 직전 벵거는 일본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을 지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1990년대 중반 당시 영국 축구계가 아시아 축구계를 보는 시선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유명 야구팀 감독이 마이너리그의 싱글A 팀 감독을 보는 시선과 비슷했다. “당신은 우리가 노는 물에 낄 자격조차 안 된다”는 싸늘한 시선 말이다. 그때도 지금도 EPL의 최고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있는 독설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벵거를 대놓고 비웃었다. “일본에서 온 사람이 영국 축구에 대해 무엇을 안단 말인가?” 팀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벵거가 오기 전 아스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조지 그레이엄 전 감독은 9년간 7개의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지만 뇌물수수 혐의로 불명예 사퇴했다. 이후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일부 선수의 술과 코카인 중독, 체계적인 선수관리 실종, 구단의 엄격하지 못한 대처 등으로 인해 선수단 전체의 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져 있었다. 당연히 성적도 나빴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풋내기 감독의 행보는 다소 야릇했다. 영국인이 보기에 프랑스리그는 프리미어리그보다 몇 단계 낮은 리그였지만 그는 AS 모나코 감독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영국 축구는 훈련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진화 속도가 더딘 것 같다.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은 선수들이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쉬게 내버려둔다”라며 영국 축구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벵거는 선수단을 파악하고 전략 및 전술 훈련을 하기도 바쁜 시간에 선수단의 식단까지 직접 짰다. 영국인들이 보기에 이는 영양사가 할 일이지 감독이 할 일이 아니었다. 벵거는 개의치 않았다. “영국 사람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채소는 지나치게 조금 먹는다”라는 말과 함께. 영국 축구계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벵거는 우수한 성적으로 이 모든 비판과 우려를 잠재웠다. 부임 첫해인 1996∼97년 시즌에 그는 아스날을 리그 3위 팀으로 올려놨다. 1997∼98년 시즌에는 강력한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3~04년에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인 ‘49경기 무패’도 이뤄냈다. 벵거가 누구냐며 무시하던 영국 언론들은 그가 ‘프랑스발(發) 혁명(French Revolution)’을 이뤄냈다며 그를 영국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앉혀야 한다고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정부까지 동참했다. 2003년 영국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 대상 명예 훈장인 OBE 훈장을 수여했다. 아스날이 2004~05년 시즌 FA컵 우승 이후 6시즌 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하면서 “벵거의 리더십이 한물간 것 아니냐”는 평가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특히 프랑스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던 박주영을 영입한 후 벤치에만 앉혀두는 바람에 한국 축구팬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차갑다. 하지만 최근의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벵거가 위대한 축구 지도자이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명문 구단을 만들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르센 벵거는 누구인가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아르센 벵거는 1949년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자동차 부품업과 요식업을 겸업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대에 있다. 교과서에 등장해 한국인이 너무나 잘 아는 소설 ‘마지막 수업’에도 나오듯 이곳은 한때 독일 영토였다. 이 때문에 알자스 사람들은 프랑스 프로축구는 물론 독일 프로축구(분데스리가)에도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 소년 벵거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벵거는 프랑스 프로축구 클럽보다 바이에른 뮌헨, 보르시아 도르트문트 등 분데스리가 클럽을 더 좋아했다. 그가 분데스리가의 매력에 빠져든 이유는 속도감 있는 경기 전개와 선수들의 왕성한 운동량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흠모한 축구 영웅도 독일의 축구황제 프란츠 베켄바우어였다. 벵거의 부모는 그가 가업을 이어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의 레스토랑 및 바에서 술꾼들을 자주 접한 벵거는 술이라면 질색하는 성격이었다. 이는 그가 아스날에 부임하자마자 당시 EPL의 관행을 깨고 선수들에게 맥주 금지령을 내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벵거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AZ 뮈치크의 감독 맥스 힐트다. 당시 더틀렌하임에서 뛰고 있던 10대 소년 벵거는 더틀렌하임과 AZ 뮈치크의 경기에서 맥스 힐트의 눈에 들었다. 영민한 플레이를 하는 벵거를 눈여겨본 힐트 감독은 그에게 자신의 밑으로 오라고 제의했고 다음해 벵거는 AZ 뮈치크의 선수가 됐다.

    힐트 감독 밑에서 벵거의 축구 실력은 꾸준한 향상을 보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벵거는 다른 축구 선수들과 여러 면에서 다른 행보를 보였다. 벵거는 축구장 안에 자신의 인생을 올인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 유소년 축구 선수들은 축구와 학업을 병행하지 않았다. 반면 벵거는 유달리 학구열이 높았고 외국어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독일어와 영어는 모국어인 프랑스어 수준으로 유창하게 구사했고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도 상당한 실력을 뽐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도 땄다. 벵거의 별명이 ‘교수’인 이유다. 그러나 축구 선수 벵거의 재능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경기의 흐름을 읽는 눈은 탁월했지만 스피드와 파워가 부족했다. 주 포지션인 스위퍼를 지키지 못하고 여러 포지션을 전전하거나 벤치를 지키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고민하던 시점에 힐트 감독이 그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가난한 구단에서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중요성 터득



    1970년대 중반 알자스의 인기 구단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으로 부임한 힐트는 벵거를 스트라스부르의 2군팀 플레잉코치(선수와 코치 생활을 병행하는 사람)로 초빙했다. 1981년 스트라스부르 구단은 힐트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지도자 수업을 받은 벵거를 유소년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전략, 전술, 선수관리, 언어 등 다방면에서 지식을 지닌 벵거는 구단의 미래 재산인 유소년팀 선수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3년 AS 칸 구단은 그를 수석 코치로 영입했다. 불과 1년 후인 1984년 AS 낭시는 벵거를 1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AS 낭시는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니티 현 유럽축구연맹 회장이 몸담았던 구단으로 유명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리그에서 우승컵도 차지했지만 벵거가 부임할 당시 성적은 당장 2부 리그로 강등될지도 모를 정도로 나빴다. 게다가 초짜 감독의 능력을 반신반의한 구단은 돈이 없다며 벵거의 선수 영입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선수도 없고, 돈도 없는 구단의 감독인 벵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적 시장에 나온 저가의 유망주들을 발굴하는 일뿐이었다. 새벽까지 유망주들의 플레이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틀어보고 전술 및 선수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에도 쉬지 않았다. 여전히 AS 낭시의 성적은 별로였지만 구단주가 돈 한 푼 내놓지 않은 하위권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벵거의 능력은 프랑스 축구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프랑스 최고의 인기구단 AS 모나코는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AS 낭시 구단주는 1부리그 잔류 정도의 성적을 원했지만 AS 모나코는 프랑스리그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었다. 저평가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키우는 벵거의 능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프랑스에 넘쳐나던 아프리카 출신 유망주에 불과하던 라이베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 조지 웨아는 벵거의 휘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며 1990년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 1995년에는 세계축구협회(FIFA)가 수여한 올해의 선수상까지 탔을 정도다. 팀 성적도 좋았다. AS 모나코는 1987~88년 프랑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국제전에서도 벵거는 진가를 발휘했다. 그간 프랑스 구단들은 유럽 최고의 클럽들이 겨루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클럽에 비해 우수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벵거가 이끄는 AS 모나코는 1993~94년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 다소 치중한 나머지 그 다음해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94~95년 시즌 초반 극심한 성적 부진에 시달린 AS 모나코는 벵거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일본에서 새로운 지도자상 정립

    그간 쌓아올린 좋은 평판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은 벵거가 AS 모나코와 비슷한 명문 구단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벵거는 세계 축구계의 변방인 아시아, 게다가 당시 일본 내에서도 무명 클럽인 나고야 그램퍼스의 감독 직을 택했다. 학구열이 높고 호기심이 많은 벵거는 이제껏 살아온 환경과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해보고 싶었고, 축구에 관한 견문도 넓히고 싶었다. 비록 유럽 축구보다 떨어지는 리그지만 일본 축구에서도 분명히 뭔가 배울 게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벵거는 절제된 사생활과 음식 습관, 엄격한 선수관리,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리더에게 복종하는 일본 스타일에 매료됐다. 나고야 그램퍼스의 오너인 도요타 그룹은 그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결과물은 곧 나타났다. 벵거 이전 리그 하위권이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1995년 시즌 일왕컵에서 우승했다. 1921년 시작된 이 경기에서 나고야가 우승한 건 사상 처음이었다. 다음해인 1996년 시즌에는 정규리그 2위 및 슈퍼컵 우승을 이뤘다. “사람들은 내가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축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아줬다.” 벵거의 말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벵거의 행보를 비웃는 사람이 많았지만 벵거의 일본행은 축구 감독으로서 그의 이력을 상당히 독특하게 만들었다. 20개월간 벵거가 일본에서 이뤄낸 성과는 곧 일본 밖으로 퍼졌다. 세계 각국의 명문 구단이 그를 주시했다. 아스날, 토튼햄, 스트라스부르 등이 물밑 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자 벵거는 아스날을 택했다. 그의 성과에 흡족했던 나고야 그램퍼스는 계약기간이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벵거를 풀어줬다. 1996년 10월 벵거는 아스날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됐다.

    괴짜 감독, 영국 축구계에 새바람을 불어넣다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이 영국 런던에 있는 전지훈련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변방에서 세계적인 구단의 감독으로 금의환향했지만 벵거 앞에 놓인 현실은 참담했다. 아스날의 미드필더 폴 머슨은 술과 코카인에 중독됐고 부인과도 이혼해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다른 주전 선수인 토니 애덤스, 레이 팔러 등도 음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아스날뿐 아니라 프리미어리그 구단은 대부분 선수들의 음주 문제를 눈감고 모르는 척했다. 벵거는 “술과 축구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당장 맥주 금지령을 내렸다. 과자, 햄버거, 적색 육류 등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는 선수들에게 찐 생선, 닭고기, 삶은 채소 등을 먹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선수들은 기름이 줄줄 흐르는 베이컨과 소시지, 튀긴 생선, 짠 맥주, 설탕이 가득 든 커피 등을 즐겼기에 벵거의 지시를 못마땅해하는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주장 애덤스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내가 왜 브로콜리를 먹어야 하느냐”며 징징대는 선수도 나왔다. 점핑 훈련인 플라이오메트릭스에 대한 반발은 더 심했다. 힘과 기동성 향상을 위해 고안된 플라이오메트릭스는 벵거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파리의 대중스포츠교육센터(CREPS)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을 때부터 시도했던 훈련법이다. 벵거는 자신이 몸담는 구단마다 근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이 훈련법을 시도했지만 영국 축구계에서 이를 도입한 지도자는 드물었다. 고참들은 “축구 선수인 우리가 왜 에어로빅을 해야 하느냐”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감독의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고참 이언 라이트는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거리람”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고참들이 반발하건 말건 벵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영양사, 정신과 의사 등과 선수들의 체력, 정신력을 향상하는 프로그램 개발에도 매진했다. 선수들에게 과음을 피하고 휴식과 수면을 충분히 취하도록 하면서 규칙적인 식사와 체계적 훈련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팀을 만들겠다는 벵거의 전략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영국 축구계에서 이는 대대적 혁신이었다. 요즘이야 선수들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술과 흡연 등을 자제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선수단 관리가 주먹구구였다는 뜻도 된다.

    아스날의 전성기를 열다

    이방인 감독의 요상한 방식에 반신반의하던 선수들도 성적이 좋아지자 벵거의 말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벵거는 부임한 지 두 번째 해인 1997∼98년 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3~04년 시즌에는 26승1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이라는 신화도 만들었다. 100년 전인 1888~89년 시즌 프레스턴 노스엔드가 18승4무로 무패 우승을 달성하긴 했지만 당시 축구계의 경쟁이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다는 점, 아스날이 프레스턴 노스엔드보다 16경기나 더 치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스날의 무패 우승은 사실상 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저가의 유망주를 발굴해 슈퍼스타로 만든 후 부자 구단에 최고로 비싼 값에 파는 벵거의 능력도 최고조에 달했다. 벵거는 1997년 당시 17세에 불과하던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넬카를 파리 생제르맹에서 아스날로 데려왔다. 비용은 단돈 50만 파운드(약 10억 원). 하지만 불과 2년 후인 1999년 아넬카는 무려 2230만 파운드(446억 원)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선수 영입에 지불한 돈 중 최고 금액이었다. 2년 만에 45배의 투자 차익을 올린 셈이다. 마크 오베르마스와 에마뉘엘 프티를 800만 파운드(160억 원)에 영입해 FC 바르셀로나에 3200만 파운드(640억 원)에 이적시킨 사례도 있다.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앙리는 1999년 아스날에 왔다. 하지만 이전 소속팀인 이탈리아 유벤투스 FC에서는 벤치 선수로 지낼 때도 있었기에 “앙리가 과연 아스날에 얼마나 기여할까”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존재했다. 하지만 앙리는 역대 아스날 선수 중 가장 많은 226골을 넣은 후 두둑한 이적료를 팀에 안겨주고 2007년 FC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2011년 8월 4000만 유로(약 616억 원)에 FC 바르셀로나로 떠난 미드필더 세스크 파브레가스도 마찬가지다. 벵거는 파브레가스가 불과 17세이던 2003년 그를 영입해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냈다.

    벵거는 자국 리그에서는 강하지만 국제전에서는 다소 약했던 아스날의 팀 컬러도 확 바꿔놓았다. 아스날은 2007~08년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 올랐고 2008~09년 시즌에는 4강에 올랐다. 한 해 뒤에도 8강에 올랐다. 그 사이에 수많은 선수가 빠져나가고 새로 들어오기를 반복했지만 아스날은 여전히 강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벵거 부임 후 아스날은 프리미어리그 4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벵거 감독의 성공이 주는 경영 교훈

    1)조직원의 건강관리는 리더의 최우선 과제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짝패’에서 배우 이범수가 남긴 명대사다. 무한 경쟁 시대를 이보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한 말이 있을까. 오래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건강이다. 직원 건강관리는 조직의 형태와 업종을 불문하고 모든 리더의 첫 번째 책임이자 의무다. 핵심 인재를 뽑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껏 뽑아놓은 핵심 인재가 질병이나 스트레스에 시달려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기업에 이보다 더 큰 손해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 개개인의 몸이 조직의 핵심 자산인데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EPL에서 이 명제는 통하지 않았다. 벵거 이전에는 선수단 건강관리에 대해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지도자가 전무했다는 뜻이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전통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영국 축구계가 낯선 프랑스인의 변혁을 받아들인 것도 벵거가 이 점을 포착하고 개혁에 착수한 첫 번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아스날의 주전 선수였던 토니 애덤스, 리 딕슨, 나이젤 윈터번 등 노장들은 벵거의 부임 이후 자신의 몸에 큰 변화가 나타났으며, 덕분에 선수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프랑스 출신 이방인에게 적대적이었던 영국 감독들도 결국 그의 방식을 인정하기 시작해 이제 EPL 구단의 대부분은 지방 및 염분을 엄격히 제한한 식단을 내놓고 있다. 히딩크 감독도 한국 대표팀을 지도하던 시절 염분이 많다는 이유로 김치찌개와 고추장 등을 금지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런 추세는 비단 축구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세계적 기업들은 직원의 건강관리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구글은 사내 음식점에서 건강에 유익한 정도에 따라 음식을 녹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분류해 판다. 유기농 식품 업체 홀푸드마켓은 비흡연자나 적정 수치의 혈압을 가진 직원이 매장에서 물건을 사면 할인 혜택을 준다. 인텔, 파파존스 피자 등도 직원이 살을 빼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면 인센티브를 주고, 다양한 운동관리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조직원의 건강이 곧 조직 경쟁력인 시대에 벵거의 성공 사례는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2)역(逆)혁신의 중요성을 깨달아라

    중국의 의료 인프라는 매우 열악하다. 국토가 워낙 넓고 서부 내륙과 동남부 중공업 지대의 생활 격차도 어마어마하다. 이 때문에 시골 주민의 대부분은 현대식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은 2009년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등에 가볍게 메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심전도 기계를 개발했다. 심전도 측정을 위한 필수 기능만 탑재한 이 제품의 대당 가격은 단돈 500달러(약 55만 원)이다. 가벼워서 휴대하기도 좋다. 선진국 병원의 심전도 기계가 대당 1만 달러(1100만 원)가 넘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싼 편이다. GE가 개발도상국 소비자를 타깃으로 개발한 이 상품은 선진국에서도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유용성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병원과 달리 신속한 대응이 중요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병원 내 심전도 기계처럼 복잡한 기능을 갖추고 무거운 기계는 소용이 없다. 이처럼 신흥시장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선진국 시장에서도 판매하는 경영 전략을 ‘역(逆)혁신(reverse innovation)’이라고 한다. ‘역’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과거 세계적인 기업들이 채택했던 성장 방식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선진국 시장의 부유한 소비자를 대상으로 값도 비싸고 질도 우수한 상품을 개발한 다음, 이를 개발도상국 현지 상황에 맞게 변형한 상품을 내놓았다면 이제는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뒤 여기서 얻은 경험, 지식, 노하우를 토대로 선진국 시장에 진출하는 방법이 먹히고 있다는 뜻이다. 벵거는 세계 스포츠계에 역(逆)혁신의 중요성을 입증한 거의 유일무이한 지도자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월드컵 4강과 16강에 진출하고,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 선수로 활약하고, 유럽 축구계가 막대한 경제력과 인구를 지닌 아시아 시장의 가치를 주목하고 있지만 유럽 축구계가 보기에 여전히 아시아 축구는 변방에 불과하다. 21세기인 지금도 상황이 이러할진대 1990년대 중반에는 어땠을까. 당시 유럽 축구계 인사들이 보기에 유럽 구단의 축구 감독직을 포기하고 아시아 구단의 감독이 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언어와 문화가 모두 다른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벵거는 이 모든 우려를 뒤로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그 어떤 축구 감독도 해내지 못한 일, 즉 절제된 일본식 생활습관과 자신의 축구 철학을 접목시키는 전략을 만들어냈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선진국 시장인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고 일본식 성공 방식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통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아르센 벵거 아스날 감독
    3)스타를 사지 말고 스타를 만들어라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자본의 위력은 갈수록 그 위세를 더해가고 있다. 종목과 국가를 막론하고 구단 재정이 넉넉하고 스타 선수가 많은 팀일수록 해당 업계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다. 야구의 뉴욕 양키스, 축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레알 마드리드, 농구의 LA 레이커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벵거는 아스날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도록 하는 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가 아스날에 부임한 후 실제 사용한 이적료는 연간 약 200만 파운드(약 40억 원)에 불과하다. 전 세계에서 유망주를 수집해 그들을 유럽 정상급 선수로 키운 후 비싼 이적료를 받고 다른 구단에 팔았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 내에 있는 아스날의 경쟁팀들이 지출한 선수 영입 비용을 보면 벵거의 위력을 잘 알 수 있다. 주제 무리뉴가 첼시 감독을 맡았을 때 그는 연 평균 4400만 파운드(약 880억 원)의 이적료를 썼다. 아스날의 22배다. 더한 감독도 있다. 마크 휴즈 감독은 맨체스터시티를 지휘한 1년 6개월 동안 무려 2억1200만 파운드(약 4240억 원)를 썼다. 단지 몸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유망주를 선호하는 건 아니다. 벵거는 왜 젊은 선수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베테랑 선수들은 이미 자신만의 축구를 완성했기에 비교적 고집이 셉니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은 자신들의 단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면 이를 보완하려고 애씁니다. 동료, 코치진과의 팀워크가 살아난다는 뜻이죠.” 이는 이방인인 그가 텃세 심한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자 원동력이기도 하다. 스타 선수 출신 감독도 아니고, 내로라하는 유명 클럽의 감독 경력도 없는 그가 몸값 수천만 달러짜리 스타 선수들을 단번에 휘어잡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4)리더는 조직의 경제적 효용을 극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극도로 분업화된 현대 프로 스포츠팀에서는 구단주, 단장, 감독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요리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구단주는 돈을 내고, 단장은 그 예산에 따라 음식 재료를 구입하고, 감독은 단장이 사온 재료로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다. 당연히 모든 감독은 구단에서 값비싼 선수를 사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른 감독들과 차이를 보인 벵거는 심지어 구단의 재정 강화에도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보통의 감독들이 이런 일에 절대 발을 담그지 않는 것과 달리 벵거는 취임 직후부터 아스날의 새 홈구장인 에미리트 스타디움 건설에 깊이 관여했다. 아스날은 2006년 93년간 써오던 하이버리 구장을 포기하고 무려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미리트 구장을 새 홈구장으로 지었다. 공사비로만 약 3억5700만 파운드(약 7140억 원)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지만 벵거가 하이버리를 훨씬 능가하는 큰 경기장이 필요하다고 구단 측에 강력히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장은 구장 신축에 막대한 비용이 들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관중에게 더 비싼 입장료를 받을 수 있으므로 구단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프로 구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팬 때문인데 더 많은 팬이 아스날의 경기를 관람하게 만들려면 성적 못지않게 쾌적한 관람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이쯤 되면 그가 감독인지 구단주인지 헷갈릴 정도다. 경제적 효용 극대화에 관심이 높은 감독을 둔 탓인지 아스날 구단 역시 상당히 영리한 행보를 보였다. 구장 신축 비용의 30%에 가까운 1억 파운드(약 2000억 원)를 이름값을 팔아 조달한 것. 아스날은 2006년부터 향후 15년간 새 구장의 이름을 ‘에미리트 스타디움’으로 하는 조건으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에미리트 항공사로부터 1억 파운드를 받아냈다. 이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네이밍 스폰서십이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듯 아스날은 무형의 이름을 판 셈이다. 아스날의 이 계약은 젊고 싱싱한 10대 유망주를 싼값에 영입해 그 선수의 기량이 최고조에 달한 20대 중반에 비싼 몸값을 받고 딴 팀으로 보내는 벵거의 전략과 함께 프로 구단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우승을 못했다고 해도 벵거의 아스날을 함부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르센 벵거’톰 올드필드 지음, 고수정 서준형 옮김, 여우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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