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 홍용표 한양대 교수·정치학 yphong@hanyang.ac.kr

    입력2006-08-14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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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을 서둘렀다. 하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숨은 의도는 휴전 후 남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수립하는데….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1953년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 문제가 거론될 무렵 경북 영천 소재 반공포로수용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0년 6월25일 북한의 침공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이 주도한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이 이처럼 신속히 개입한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도발을 방치할 경우 소련이 자유세계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감행할 수 있으며, 냉전구도에서 미국의 위신과 지위가 저하되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반공주의 세력이 약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 발발 즉시 유엔에 긴급 안전보장이사회 개최를 요청했으며, 군사원조를 위한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북한의 무력침공을 자력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한국은 자국의 생존을 미국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을 내걸고 한국전에 참전하자 곧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은 여타 참전국과 함께 단일한 지휘체계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게 됐다. 한마디로 한국과 미국은 ‘반공’이라는 공동이익을 위해 동맹관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반공 인식에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미국의 반공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한다는 현상유지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의 반공은 궁극적으로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현상타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바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북의 남침으로 38선이 무의미해졌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 ‘암적 존재인’ 공산주의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유지와 북진통일의 대립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반격을 개시함에 따라 이 대통령이 바라던 대로 북진통일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중국의 참전으로 유엔군과 공산군이 38선을 중심으로 대치하게 되자 미국은 분단이라는 현상을 유지하는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런 현상유지 정책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정책과 갈등을 빚었다.



    1951년 7월 마침내 유엔군과 공산군측 사이에 휴전회담이 시작됐고 이후 10개월간 협상을 통해 양측은 전쟁포로 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같은 휴전회담의 진전에도 아랑곳없이 북진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확고한 반(反)휴전 태도를 견지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좌익 세력과 중도 세력이 남한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고 대다수의 남한 주민이 이미 북한군의 만행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휴전반대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반(反)휴전 데모를 장려했다.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는 단독 북진을 감행할 수도 있음을 천명했다. 예컨대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상유지에 만족하며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미국으로서는 이승만 정부의 호전적인 태도를 방치할 수 없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2년 3월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정부가 계속 유엔군사령부와 협력할 것이라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력을 약속하는 대가로 한미간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 병력의 증강을 요구했다.

    당시 트루먼 정부는 미국과 유엔이 휴전 이후 한국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재침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한국 국민에게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은 꺼렸다.

    그뿐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유엔군사령부 주도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후원할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거가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한국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그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때마다 제거를 고려했다.

    대미 안보협상에서 유리한 고지 노려

    한편 남한의 휴전반대 운동에도 미국과 중국의 휴전회담은 계속됐으며, 1953년 4월 중국이 휴전회담의 큰 걸림돌 중 하나이던 전쟁포로 문제에 대해 양보 의사를 나타냄으로써 회담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다. 정전(停戰)이 기정사실화 하면서, 북한을 포함한 관련국들은 모두 휴전체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반휴전 방침은 바뀌지 않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오히려 북진통일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이 남아 있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왔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은 김일성 정권이 일으킨 전쟁을 경험하며 더욱 굳어졌다. 따라서 이승만은 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쓰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53년 5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고문을 지낸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이 대통령은 단독 북진을 강행하겠다고 한 것은 단순히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한편,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 없이 한국의 병력만으로는 공산군을 물리칠 수 없으며, 또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휴전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고수한 데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하루빨리 종결하려는 미국을 협박함으로써 대미(對美) 안보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 휴전협정 이후 남한의 안전을 보장할 장치들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특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다.

    휴전협정 체결이 현실화하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은 가속화됐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단독 북진의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미국 관리들과 접촉해 만일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면 휴전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넌지시 드러냈다.

    채찍보다 당근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과 방위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아시아 본토에 발이 묶이는 것을 꺼렸다. 워싱턴 관리들은 안보조약 대신 병력 증강을 포함한 지속적인 군사원조를 통해 휴전 후 남한의 안보를 보장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이승만을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휴전에 협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 관리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이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 정부는 이승만이 실제로 단독 군사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비록 이 대통령이 미국을 위협하기 위해 무력통일의 필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의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을 만난 여러 미국인은 그가 ‘매우 진지하며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고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시위행렬(1953년 6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하다 갑자기 비협조적으로 돌아서는 등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를 반복하고, 때로는 돌발적인 언행을 함으로써 미국 관리들이 그를 예측 불가능하고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북진통일 카드는 대미협상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신속히 한국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계속해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세 가지 정책 대안을 수립했다. 첫째, 에버레디 작전을 통해 이승만을 축출하고 유엔군사령부하의 군사정부를 세우는 방안. 둘째, 유엔군사령부를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 셋째,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을 걸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안.

    결국 미국 정부는 채찍보다는 당근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유엔이 합법 정부로 인정한 이승만 정권을 전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3년간 공산화를 막기 위해 크나큰 피해를 감수하며 지켜온 나라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는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아이젠하워의 항의 서한

    그러나 미국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제안에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미국의 당면 목표인 전쟁 종결이 일단 성사되면 자신의 대미 협상력이 현저히 약화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가 아닌 체결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 대통령은 단독 북진 위협을 지속하는 한편, 미국 정부에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문서 형식으로 ‘한국이 공격당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점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이 완강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에 직면해 미국 정부는 결국 한국의 단독 행동 가능성을 줄이고 신속히 휴전회담을 매듭짓기 위해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53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받은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즈음 판문점 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이 휴전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전쟁포로 문제를 포함한 모든 사항에 대해 합의함으로써 휴전협정은 이제 서명 절차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에 따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6월18일께면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될 수 있을 것이며, 이승만의 허세도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클라크의 기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 조인이 예상되던 바로 그날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953년 6월18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사령부와 협의 없이 북한 송환을 원치 않던 반공포로 2만5000여 명을 석방했다. 당시 판문점에서 합의된 휴전협정안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의 경우 ‘중립국 송환 위원회’가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으며, 휴전 문제에 대해 한국의 협조를 원했던 미국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으며, 이를 통해 만일 한국 정부가 계속 유엔군사령부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와 같은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그는 도발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이 휴전을 방해하기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것으로 단독 북진 위협에 더 큰 무게를 실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일단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발효되면 협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돌발사태를 일으켜 휴전협정 체결을 될 수 있는 한 늦추고 그동안 더욱 유리한 위치에서 미국과 협상을 벌이려 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일련의 회의를 통해 이승만 제거, 미군철수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전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원하지만 한국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정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적(敵)은 엄연히 공산주의자들이며 이승만은 반공의 선봉에 서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이승만을 저버릴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의 현실적 대안은 예정대로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가 원하던 안보공약을 제공하는 대신 휴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휴전 방해하지 않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의도했던 대로 로버트슨 특사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휴전회담은 중단됐다. 공산군측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준수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어야만 회담을 재개할 것이라고 유엔측에 통보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남한의 협조가 더욱 절실히 필요했으며, 그만큼 이승만의 대미 협상력은 높아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트슨 차관보와의 협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즉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협상 기간 중 조약의 초안을 교환했으며, 미국은 미 상원이 그 조약을 인준할 것이라는 확약까지 받아주었다.

    이와 같은 미국측의 양보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관할하에 계속 남겨둘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으며, 휴전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휴전협정 준수를 약속하는 대신 다만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미국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현 상황에서는 이승만에게 더 이상 양보를 얻기 힘들 것이라 판단하고 한국과의 협상을 일단 마무리했다.

    1953년 7월23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한국전쟁이 공식 종결됐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줄다리기는 지속됐다. 1953년 8월 덜레스(John F. Dulles) 국무장관이 직접 한미안보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덜레스와의 회담에서 가능한 한 양측간 동맹관계의 구속력을 강화하려 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자동적, 즉각적’으로 참전할 것이라는 표현과 조약의 효력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조항을 상호방위조약에 삽입하려 했다.

    그러나 덜레스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한국에 2억달러 상당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했으며 한국군 20개 사단 병력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을 승인했다. 한국과 미국은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통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단독 북진 위협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종결됐으며 미국이 이승만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함에 따라 이승만의 북진 위협은 점차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 결국 1954년 11월 ‘경제·정치·군사적 원조를 위한 한미 양해각서’가 체결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공식 발효됨으로써 미국의 대한(對韓) 안보공약이 완결됐고, 이에 따라 북진통일 및 휴전체제 인정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도 불완전하나마 해소됐다.

    세 차례나 제거 고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의 일기에서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며칠 전 한국 정부가 공산주의자들만큼 미국을 힘들게 했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 봉쇄라는 세계 전략하에서 남한의 공산화를 방치할 경우 전체적인 국제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과 세계 지도자로서 미국의 체면이 손상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남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한국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로서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미국의 이러한 정책적 제한을 이용해 북진통일의 기치를 높이 내건 것이다.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홍용표

    1964년 서울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정치학)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現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 동아일보 21세기평화연구소 연구위원

    저서 및 논문 : ‘State Security and Regime Security: Syngman Rhee and the Insecurity Dilemma in South Korea’ ‘한국전쟁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 ‘현실주의 시각에서 본 이승만의 반공노선’ ‘North Korea in the 1950s’ 등


    이승만의 북진통일 위협은 매우 유용한 협상카드였다. 이를 통해 한국은 대미 안보 협상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후 한미안보관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적인 북진통일 강조로 한미관계가 필요 이상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미국 정부가 1년 남짓한 기간에 세 번이나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한미관계가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한미관계가 첨예한 갈등에도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반공이라는 접착제 덕분이었다. 반공을 위해 자국민의 목숨까지 희생한 미국은 반공을 강력하게 외치는 이승만을 저버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승만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무모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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