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형폐지운동의 대부 문장식 목사. 옆 사진은 사형수 원언식씨가 저지른 방화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다.
불 질러 14명 죽게 한 죄인
“2005년 9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제가 지은 죄는 생각지도 않고, 제 신분도 생각지 않고 ‘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생명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13년이 넘도록 덤으로 생명을 연장 받았으니, 이 병도 감사히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곤 곧 죽게 되니까 제일 먼저 이 세상에서 감사드리고 싶은 분인 문장식 목사님께 편지를 올렸습니다.”
원씨와 문장식(文仗植·70) 목사의 첫 만남은 1993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씨는 1993년 11월, 현주건물방화치사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전인 1992년 10월4일, 그는 원주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14명(치료 중 수혈을 거부해 사망한 사람을 포함하면 총 15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뒤 자수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92년 10월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4일 오후 2시반경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 74 상가건물 2층에 세든 왕국회관에 원언식(35·대한지적공사 원주출장소 직원)씨가 신도인 아내 신○○(33)씨를 찾으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게 되자, 미리 준비한 휘발유 10ℓ를 교회 출입문에 뿌리고 불을 질러 예배를 보고 있던 신도 90여 명 중 정○○ (58) 장로 등 14명이 유독가스에 질식되거나 불에 타 숨지고, 권○○ (22)씨 등 2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신도 한○○(67·여)씨에 따르면 이날 원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 “집사람을 내놓으라”며 2, 3차례 소리친 뒤 아내가 나오지 않자 휘발유를 출입문 바닥에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는 것.
30평 크기의 왕국회관은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고 바닥에 15평짜리 카펫이 깔려 있으며 벽과 천장이 목재여서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신도들은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로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나, 문과 계단이 좁고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져 대피가 어려웠다. 신도들은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쪽문을 통해 슬레이트 지붕으로 올라갔으나, 슬레이트가 깨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다시 굴러떨어져 희생자가 늘어났다.
단란한 가정에 찾아온 비극
원씨는 1957년, 강원도 원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8대 독자로 태어나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11세 때 교통사고로 부친을 잃은 그는 방송통신 과정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74년 대한지적공사 임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엔 대졸자들이 취득하는 지적기사 1급 자격증을 따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대한지적공사 최우수사원으로 뽑혀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91년엔 25평 아파트도 구입해 아내, 두 딸과 단란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여름부터 술을 자주 마시고 친구들 앞에서 “병든 노모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자식”이라고 자책했다. 아내가 왕국회관에 나가기 시작한 뒤로 자주 집을 비우고, 중풍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노모와도 사이가 나빠져 노모가 누이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