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쇼를 하라!

  • 김민경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장 holden@donga.com

    입력2007-09-05 2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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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를 하라!
    패션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정확히 말하면, 본격적으로 ‘사복’ 쇼핑을 시작한 중학 시절-TV를 통해 방송되는 패션쇼를 보며 늘 가졌던 의문이 있다. ‘도대체 저걸 누가 입지?’ 내 눈에 그것들은 옷이나 신발이 아니라, 거대한 천 덩어리거나 기괴한 서커스 용품이었다. 다른 사람들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패션쇼는 ‘해외토픽’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류 뉴스의 단골 소재였다.

    세월은 흘러 이제 패션쇼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기예보처럼 당연하게 접하는 일상이 됐다. 초봄과 가을, 뉴욕과 런던, 파리와 밀라노 같은 세계 4대 패션도시에서는 수백 회의 패션쇼가 열리고, 수천 명의 기자가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며, TV 화면에서는 런웨이와 백스테이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나 어릴 때처럼 패션쇼를 보며 ‘그냥 줘도 안 입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더는 없다. 오히려 입을 만해보이면 ‘상업적인 컬렉션’이라고 비판받는다. 해외 패션전문가들이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고 지목한 아이템들은 즉시 우리나라 부티크에서 기나긴 웨이팅 리스트가 작성되며, 신상품이 도착하기 전 백화점에는 은밀한 ‘카피’들이 출시되고, 동대문시장에는 ‘짝퉁’들이 올해의 트렌드를 제공한다.

    요즘은 패션쇼 인비테이션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 한창이다. 지난 2월에 해외 4대 도시에서 처음 공개된 가을겨울(F/W) 컬렉션이 본격 판매 시즌을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여는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패션쇼 중독자’들 사이에 인비테이션 입수를 위한 무한도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새로운 디자인들을 본다는 건 확실히 신나는 일이다. 또 쇼에 초청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VIP 여부가 결정되기도 하므로 쇼퍼홀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프레젠테이션은 브랜드에 따라서 프레스와 VIP를 함께 초청하기도 하는데, 럭셔리 브랜드는 점점 더 기자보다는 VIP를 편애하는 추세다. 기자들은 얻기 힘든 인비테이션을 VIP들은 쉽게 구한다. 요즘 한국 VIP들은 이탈리아나 홍콩에서 열리는 ‘프리 오더쇼’에서도 쇼핑을 하니, 본사에서도 떠받드는 최우수 고객들인 셈이다. 얼마 전 크리스찬 디오르는 ‘60주년 기념 아시아태평양쇼’를 서울에서 열어 아시아 기자들이 대거 취재를 오기도 했다.

    패션쇼는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길어도 30분 안에 끝난다. 그러나 쇼가 열리기까지 몇 달 동안 각 브랜드에서는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연출을 하고, 수억원의 예산을 쓰며 기발한 명분으로 A급 셀러브리티들을 끌어 모은다. 패션쇼 중독자들은 인비테이션을 구하기 위해 온갖 인맥을 동원하고, 가장 트렌디한 모습으로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최신 패션지와 케이블TV를 뒤진다. 그 결과 런웨이 밖에서도 하나의 패션쇼가 벌어진다. 봄가을로 인비테이션 때문에 몸살을 앓는 패션쇼 중독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쇼’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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