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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제대로 살아야 사는 것”… 열사의 울림, 100년을 뛰어넘다

  • 손택균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기자 sohn@donga.com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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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베리아 철길을 되밟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헤이그 시내의 이준열사기념관. 바겐 슈트라트124번지에 있는 드 용(De Jong)호텔을 한국인이 인수해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2007년 6월29일 오후 9시35분.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없다. 러시아 각 도시의 철도역에는 구간별 종착도시 이름이 붙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행 기차를 타려면 ‘모스크바 역’으로 가면 된다.

온통 짙은 잿빛뿐인 역사(驛舍) 초입에는 거무튀튀한 ‘TSR 시발점 표지비’가 서 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두(雙頭) 독수리 조형물 아래 모스크바까지의 철도 길이 ‘9288(km)’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경부선(444.5km)의 20배가 넘는 거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올라 중간 기착 없이 모스크바에 닿으려면 꼬박 6박7일이 걸린다.

시베리아는 전세계 목재 생산량의 25%가 나오는 땅이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80%가 이 땅 밑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잠자는 땅’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시부르’의 영어식 발음이 ‘시베리아’. 동서 최장 7000km, 남북 최장 3500km에 달한다.

1891년 착공된 TSR은 1916년 아무르 강 철교를 끝으로 완공됐다. 일찌감치 전철화와 복선화를 마쳐 목재 석재 등을 운반하는 러시아 물류의 ‘핏줄’이다. 답사단의 첫 TSR 체험은 일단 하바로프스크까지의 12시간 25분 하룻밤 여정이었다. ‘혼자 탑승한 동양인 승객은 러시아 열차강도가 노리는 표적이라더라, 돈만 뺏는 게 아니라 운 나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칼을 맞을 수도 있다더라…’. 워낙 흉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열차를 기다리는 일행의 얼굴에 적잖은 긴장이 비쳤다.



허름한 회녹색 열차는 수십년 전 한국의 완행열차를 연상시켰다. 폭 85cm 정도의 비좁은 복도 한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객실이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객실 출입구를 중심으로 양쪽 벽에 침대 두 개 씩을 아래위로 나란히 붙여놓은 4인실 침대칸. 비치된 담요와 매트리스를 펴자 희뿌연 먼지가 훅 날아올라 객실을 가득 채웠다. 객실 폭은 180cm, 침대 길이는 190cm, 천장 높이는 2.2m. 거구의 러시아인이 잔뜩 웅크려 누운 자세로 몇 날 몇 밤을 견뎌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화장실 사용도 고역이었다. 세면대 수도는 물 나오는 구멍을 위로 밀어 올려야 물이 나오는 괴상한 얼개다. 한 손으로 꼭지 끝을 잡고 위로 힘주어 누른 채 손가락 사이로 졸졸 새어나오는 물을 다른 한 손으로 힘겹게 받아 세수나 양치를 해야 한다. 하룻밤 세면과 용변을 포기하는 이가 대부분. 배설물은 기차 바닥 밑으로 그냥 흘려버리기 때문에 중간역사에 정차하기 직전과 직후에는 화장실 문이 잠긴다.

하지만 ‘12시간 전초전’을 거치고 나서 7월1일 오후 5시에 재개된 하바로프스크-이르쿠츠크 2박3일 강행군에서는 답사단 전원이 만만찮은 생활력을 과시했다. 한 차례 낭패를 겪으며 터득한 노하우로 머리 감고 면도까지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몇 시간에 한 번씩 나타나는 간이역에서 정차 시간은 짧게는 2분, 길게는 15분 정도. 허름한 매점에서 기름 좔좔 흐르는 빵과 소시지, 탄산음료, 보드카, 떠먹는 요구르트 등을 살 수 있다. 매점 밖에서는 주르르 늘어선 좌판 상인이 승객을 기다린다. 식당차 음식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들이 파는 식은 닭튀김, 삶은 감자, 멜메니(러시아식 만두), 블린(크로켓), 생오이 등이 요긴한 끼닛거리가 됐다.

목표지인 이르쿠츠크에 거의 와 닿을 즈음 답사단은 ‘목초의 바다’ 한가운데서 ‘민물의 바다’ 바이칼 호수를 만났다. 열차는 마치 고단한 승객들을 배려한 듯 정확히 해질 무렵에 호숫가 레일 위를 고즈넉이 달려줬다.

오후 10시15분. ‘아름답다’ 또는 ‘장엄하다’는 식의 뻔한 형용사를 붙이기 미안한, 20여 분 동안의 고요한 일몰. 부족한 언어를 짜내 억지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광경이 답사단 전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3만1500㎢)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수심 1741k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라는 여행안내 책자의 정보는 수면에 비친 진홍빛 구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100년 전 이상설과 이준도 이와 똑같은 민물바다 노을빛을 하염없이 바라봤을 것이다. 살아생전 언제 다시 볼지 모를 풍경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 없는 100년 뒤의 답사단과 달리, 살아생전 다시는 나라 잃은 처지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처연한 마음으로.

이범진과 이위종 父子

열차는 7월4일 오전 2시에 이르쿠츠크 역에 닿았다. 하바로프스크와의 시차 2시간을 더해 꼬박 59시간을 열차 안에서 보낸 셈이다. 하지만 답사단이 도합 나흘간 힘겹게 지나온 철길은 헤이그 특사들이 100년 전에 열차로 달린 거리의 고작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비행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세 번째라 익숙해진 답사단원들은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열차 안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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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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