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청와대·통일부·국정원, 정상회담 막전막후

통일부 출신 靑 비서관 ‘원톱’ 부각… 각 부처 ‘정치 촉수’ 풀가동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09-12 2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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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말부터 남북정상회담 논란이 ‘정치화’하면서 관련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4자 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오가는 아이디어는 여러 곳에서 제기됐다. 아직 열리지 않은 회담의 추진 과정 비화를 말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그 편린들은 이곳저곳에서 확인된다. 뜻밖의 초대형 태풍을 맞은 관련 부처들의 분위기와 막후의 흐름, 또 다른 한 축인 북한 내부를 들여다봤다.
    청와대·통일부·국정원, 정상회담 막전막후

    8월5일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2차 남북정상회담을 8월28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양측 배석자는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작은 사진)

    지난해 북한 핵실험 이후 공식 라인과 비공식 라인을 막론하고 구체적 협상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접어들었다. 핵실험 직전까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전력투구한 국가정보원 3차장실 중심의 대북 공식 라인은 활력을 잃었고, 비공식 라인 역시 안희정씨의 11월 대북접촉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중단됐다. 대신 정치권의 공방과 이재정 통일부 장관 등이 ‘실체 없는 논란’을 이어갈 뿐, 사실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은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신동아’ 2월호 186쪽 ‘남북정상회담 공작 막전막후’ 참조).

    해가 바뀌면서 핵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못 되는 남북정상회담 대신 6자회담 참가국의 다자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아이디어가 힘을 얻었다. 첫 번째 움직임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2월초 방한한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대사의 구상. 서울에서 전현직 당국자들을 접촉한 그는 ‘6자 정상회담 안(案)’을 구체화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제안했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의 가장 큰 어려움은 6개국 정상의 일정을 맞추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비슷한 시기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을 중심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4자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분리’ 아이디어가 주목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장시간이 필요한 평화협정보다 정전협정 당사국인 남·북·미·중 정상이 모여 이벤트 차원의 종전선언을 하면 2·13프로세스에 큰 모멘텀이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북한 핵 문제가 북미 양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니 이 방안은 적잖은 공감을 얻었다. 일단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6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 사실이 힘을 실었다. 정치권에서는 3월 방북, 5월 방미 등에서 사실상 특사에 준하는 막후 조정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 이해찬 전 총리가 이 아이디어를 수용했다. 여기에 청와대 안보실과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역시 6자회담 프로세스와 무리 없이 연결되는 4자 정상회담 방안에 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약속 깨는 일 없던 사람이…



    그러나 논의만 무성할 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특히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와 함께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정치공방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 취임 당시 통일부 장관이 겸직하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자리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맡으면서, 정동영 장관 시절부터 통일부 장관이 맡던 공식 라인의 정상회담 추진상황을 청와대에 보고하는 책임이 김만복 원장에게 넘어간 게 이 무렵이다.

    이후 여건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 김만복 원장이 대선과정에서 국정원의 정치개입 논란을 염려해 서훈 3차장과 공식 라인의 움직임을 일정 부분 자제시키고 있다는 말이 당국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이 때문에 김 원장과 서 차장 사이가 다소 껄끄러워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정치풍향을 의식하는 김 원장의 스타일과 ‘정통파 대북 정보맨’인 서 차장의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업무 전문성의 차이가 ‘자세’의 차이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BDA 문제가 해결되고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방북한 6월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힐 차관보 방북과정에서 사실상 ‘소외’됐던 통일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중단된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는 등, 북미관계에 남북관계가 뒤처져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국정원 역시 중단 상태였던 공식 라인의 정상회담 논의를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7월 들어 서훈 3차장이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예정된 약속을 깨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정부 주변에서는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관측이 흘러나온다. 안보부처 출입기자들 사이에 ‘정상회담이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 시점이다.

    정상회담 발표와 함께 확인됐지만, 7월초 김만복 원장은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에게 접촉을 제안했고, 이후 7월 한 달 동안 서훈 3차장이 중국 등지에서 최승철 통전부 부부장을 만나 조율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만 해도 통일부 등 다른 부처 관계자들은 ‘마지막 몸부림’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많았던 게 사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7월29일 김양건 부장이 김만복 원장에게 방문을 요청하면서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고, 8월2일 김 원장이 남북교류협력법 절차에 따라 노 대통령의 ‘특사 임명장’을 받고 평양을 방문했다. 이튿날 귀국했던 김 원장이 4일 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평양을 재방문해 정상회담 일정에 합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개되지 않은 방북단 멤버

    청와대·통일부·국정원, 정상회담 막전막후

    정상회담 의제정리 취합작업을 맡고 있는 조명균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

    일각에는 정부가 발표시점까지 이를 4자 정상회담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상회담 개최일정을 특종 보도한 ‘중앙일보’가 이를 4자 정상회담으로 보도한 것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 정상의 스케줄 조율에 힘쓰고 있다는 기사 내용 등이 이 때문 아니냐는 것. 남북이 일단 합의해놓고 이를 바탕으로 판을 키우려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이를 부인했다. 사실도 아니고 개연성도 없다는 것이다.

    김만복 원장의 평양 방문에 이전까지 막후 조율을 담당했던 서훈 3차장은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여러 추측이 나돌지만, 국정원 관계자들은 “원장과 차장이 동시에 평양에 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로 답을 갈음하고 있다). 대신 공개되지 않은 방북단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 회담준비의 막후주역으로 거론되는 조명균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다.

    조 비서관이 방북에 동행한 데는 여러 배경이 있지만, 현재 청와대 내에 남북관계 실무에 정통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백종천 안보실장은 군 출신 학자에 가깝고, 윤병세 안보수석은 정통파 외교관이다. 박선원 안보전략비서관 역시 학자 출신, 유희인 위기관리비서관은 현역 공군 소장, 김정봉 안보정보비서관은 국정원 해외파트에서 오래 일했다. 이렇듯 대북실무 전문가가 없다 보니 청와대 내부에서도 취약한 인적구조를 거론하며 “준비가 쉽지 않을 듯하다”는 토로가 있을 정도다.

    청와대 안보실 간부 가운데 남북대화 실무에 참여해본 사람은 조 비서관이 유일하다. 행정고시 23회 출신으로 1984년부터 통일부에서 일해온 그는, 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을 지내던 2006년 2월 현직에 임명됐다. 노무현 정부 초기 청와대 안보관련 고위직 가운데 통일부 출신이 드물었던 것을 감안한 케이스다.

    이 때문에 최근 진행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의제준비 작업의 막후 실무총괄 역시 조 비서관이 담당하고 있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추진위원회와 준비기획단 등 공식 체계가 있지만, 8월13일 각 외교안보부처가 청와대에 제출한 의제예상 보고서를 받아 검토하고 조정하는 작업은 조 비서관이 맡았다(안보정책비서관이 본래 관련부처의 정책조율을 담당하는 직책이기도 하다). 덕분에 8월8일 이후 조 비서관 팀이 정상회담과 관련해 청와대 내에서 가장 바쁘다는 것. 조 비서관은 이후 끊임없이 열리고 있는 NSC 상임위원회와 장관급이 참석하는 안보정책조정회의, 차관보급이 참석하는 안보정책실무조정회의 등 회의체 운영도 담당하고 있다.

    의제 취합의 길목에 선 조 비서관이 통일부 출신인 까닭에 외교부와 국방부 등 다른 부처는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의제조정 과정에서 아무래도 ‘통일부적 시각’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 실무부처의 ‘레이더’가 온통 이 방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임무는 ‘의제정리 방향 파악’

    이는 7월29일 북한의 초청이나 김 원장의 방북 사실을 알지 못했던 다른 부처의 요즘 분위기와도 관계가 깊다. 최소한 8월5일 김 원장이 서울에 돌아와 합의 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하기 전까지는 송민순 외교부 장관이나 이재정 통일부 장관 역시 관련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것. 특히 외교부 장관실 주변에서는 자기 부처 출신인 윤병세 안보수석이 사전에 ‘언질’을 해주지 않았음을 서운해 하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와 관련해 송 장관이 외교부 직원들의 ‘정보력 부재’를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확인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안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불리며 ‘판을 장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송 장관으로서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최근까지 힘을 실어온 4자 정상회담과 달리 남북정상회담은 외교부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안이다 보니 상황전개를 주도하던 분위기에 큰 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도 외교부에서는 천영우 6자회담 수석대표 정도만이 방북단에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 전전긍긍하는 것은 국방부다. 현재 국방부 수뇌부와 청와대 안보실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는 별다른 ‘끈’이 없다. 백종천 안보실장은 김장수 장관의 육사 4년 선배이기 때문에 국방부의 이해관계에 신경 쓰는 처지가 아니고, 유희인 위기관리비서관은 노무현 정부의 ‘창업공신’에 해당하는 데다 아프가니스탄 인질 문제를 맡고 있어 정상회담 논의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에서 서해북방한계선(NLL)이나 군비통제 등 군사분야 의제가 폭넓게 거론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고 보면, 그간 NLL 등을 두고 통일부와 대립해온 국방부 처지에서는 통일부 출신 비서관이 의제 취합을 맡은 현재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국방부는 회담 준비상황이나 의제정리 작업의 방향 등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후문이다.

    통일부라고 해서 흥겹기만 한 것은 아니다. 8월14일 정상회담 준비접촉을 위해 개성을 방문한 대표단이 이관세 차관과 김웅희, 박봉식 국장 등 통일부 인사들로 구성되는 등 회담실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지만, 회담합의 자체가 국정원장을 통해 성사돼 맥 빠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 이재정 장관 역시 김만복 원장의 방북과정에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2월 임명된 이재정 장관은 조명균 비서관과는 통일부에서 함께 일한 적이 없다.

    정상회담을 만드는 사람들, 북한의 경우

    김정일이 평양에 없었다면, 최종 의사결정은 누가?


    청와대·통일부·국정원, 정상회담 막전막후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

    이번 정상회담 준비를 맡고 있는 북측 인사로는 우선 최승철(52) 통전부 부부장을 들 수 있다. 서훈 3차장의 카운터파트였던 그는 실질적인 위상도 우리 정부에서 서 차장이 차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2003년 초 라종일 전 안보보좌관이 베이징에서 만나 에너지 협력방안을 논의한 인사가 바로 최승철 당시 아태평화위 대남실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수석급이 접촉하기에는 격이 낮지 않으냐”는 평이 있을 정도로 덜 주목받는 인물이었지만 이후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와 림동옥 통전부장이 사망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탁월한 실무능력과 조직 장악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직후부터 통전부에서 일했다. 부장이 공석인 동안 사실상 대남사업을 총괄했으며 안경호(77) 조평통 서기국장 등 원로급 대남사업 관계자들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지난번 6·15 7주년 공동행사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석단 착석 문제를 두고 파행을 빚었을 때, 안 서기국장은 상황을 전혀 몰랐던 반면 최 부부장이 행사장을 다녀간 후에 북측 방침이 정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한동안 통전부장 승진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국정원에서는 아직 나이가 젊어 어렵다는 분석이 많았다는 후문.

    2005년 이후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서훈 3차장과 맞상대했고, 이번에도 7월 한 달 동안 베이징 등에서 사전접촉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최근 그를 정상회담 준비접촉 북측 수석대표로 임명한 것은 이번 회담에 대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만복 원장과 합의서에 서명한 김양건(69) 통전부장은 1986년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처음 공개됐다. 1997년 국제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주로 공산권 국가와의 협조업무에 종사했고, 김 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의 주요 인사들을 면담하는 자리에 배석한 적이 있다.

    당초 김인호 범청학련 북측본부 의장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던 통전부장에 그가 발탁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05년부터 국방위 참사로 일하며 얻은 김 위원장의 신임이 있다는 분석이다. 대남업무에 종사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의외라는 분석이 있었으나, 현재 그의 위치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 관할하는 북핵 문제를 빼고 안보 문제 전반을 조율하는 ‘핵심참모’로 보는 게 옳은 듯. 한 대북소식통은 그를 “NSC 사무차장 시절의 이종석 전 장관과 비견할 만하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만복 원장의 방북 때 김 위원장이 평양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북한매체들은 김 위원장이 함경남도 일대에서 현지지도를 하는 사진을 계속 내보냈다. 1차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특사로 방문한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귀환 직후 김 위원장과 찍은 사진을 공개한 것과 달리, 김만복 원장의 경우 사진은 물론 김 위원장 면담 여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통령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김 위원장이 만나지 않았다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7월29일 초청 전에 이미 여러 가지 결정을 내려 김양건 부장에게 전권을 줬을 수 있고, 김 부장으로부터 유선으로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도 크며, 본인이 헬기 등을 이용해 잠시 평양에 다녀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함남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김 위원장을 대신할 만한 누군가’가 평양에서 대신 최종 의사결정을 지휘한 것일 수 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를 김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6월 이후 평양에 머무르고 있다는 최근 소식과 연결해보면, 이번 정상회담이 북한 후계체제의 동향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계기나 이벤트가 되는 것 아니냐는 흥미로운 상상이 가능해진다.


    임명장의 기한

    정상회담 합의로 가장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국정원, 특히 3차장 산하 북한파트다. 최근 대선주자 검증공방 와중에 국내정치 개입 의혹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였던 내곡동 주변의 공기는 일신됐다. 그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해 ‘천덕꾸러기’ 신세나 다름없던 대북전략국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 다만 1차 정상회담 당시의 흥분과는 차이가 있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보니 정상회담의 후과(後果)가 차후에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가늠하기 쉽지 않고, 구체적인 성과물이 없을 경우의 역풍에 대해서도 고심하는 모습이다.

    국정원 전체적으로 휴가 중이던 직원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고, 특히 대북파트는 8월11, 12일 주말과 광복절 휴일에 모든 직원이 출근해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겉으로 드러난 회담 준비과정은 주로 통일부가 담당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회담전략 등 상당부분을 국정원 대북전략국에서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만복 원장이 8월4일 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특사 임명장의 기한은 정상회담이 끝나는 8월말까지. 이 때문에 국정원 주변에서는 공식 준비접촉과는 별개로 국정원장이 주도하는 비공개접촉이 한 축을 맡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남북간 주요 회담에서 국정원과 통전부의 막후접촉이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74년 중앙정보부에 7급 직원으로 입부한 김만복 원장은 주로 국내파트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노무현 대선캠프의 외교안보 수장 노릇을 했던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이 재학시절 서울대를 출입하는 ‘기관원’이었던 김 원장과 ‘악연’을 맺었던 건 잘 알려진 일화. 1980년대 후반 자메이카와 미국 등지에서 화이트 요원으로 활동했던 김 원장은 1990년대 초반 4자회담에 관여하면서 대북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차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전략수립 과정에 참여했고, 장관급회담 등의 막후조정을 맡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과장급이던 그는 이후 계급정년 문제 때문에 세종연구소에 파견됐을 만큼,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요원은 아니었다는 게 전현직 정보당국자들의 회고다. 그러나 파견기간 중 이종석 당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과 인연을 맺은 그는, 노무현 정부 들어 파격인사를 통해 청와대 NSC 사무처 정보관리실장(1급)에 임명된다.

    감각과 캐릭터

    노 대통령과는 동향에 동갑인 그는 386 실세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부산 출신으로 국정원에서도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과도 오랜 친분이 있다.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 2006년 4월 1차장, 그해 11월 원장 임명의 ‘초고속 승진’을 두고 국정원 내부에서도 반감이 있던 게 사실이다. 김 원장이 부임 이래 조회 등을 통해 수차에 걸쳐 직원들의 ‘정치적 줄서기’를 경계하는 연설을 했지만, ‘사실은 김 원장 본인이 그런 경로로 성장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관계자들이 있었다.

    특히 김 원장이 내년 총선에 출마해 정치에 참여할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사석에서 주변 인사들에게 그러한 뜻을 공개적으로 말한 일이 있을 정도다. 지난 4월에는 현직 정보기관 수장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모교인 부산 기장중학교 동창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주간동아’ 보도를 통해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대북 공식 라인의 창구를 맡았던 서훈 3차장은 이번 회담 성사로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버린 듯하다.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남북협상에 회담조정관으로 관여해온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정상회담과 2005년 6·17 면담, 9·19 공동선언에서도 막후조율을 맡아 성사시킨 대표적인 대북통이다. 특히 1996년부터 3년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금호사무소 대표로 경수로 건설현장에 나가 있으면서 겪은 북측과의 ‘산전수전’이 큰 자산이 됐다는 평가. 2003년 대북송금 특검 당시 조사를 받는 등 ‘겨울’을 겪었지만, 김만복 원장의 후임으로 2004년 초 NSC 정보관리실장에 임명되면서 노무현 정부와 인연을 맺었다.

    탁월한 업무조율능력과 리더십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일벌레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상황을 즐기는 편’이라는 평이 있다. 철저한 보안의식과 좌고우면하지 않는 ‘오리지널 정보맨’ 캐릭터를 고위직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부분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주변의 견제그룹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을 정도다.

    6·17 면담 당시 북한측이 방송한 화면을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훈 차장에게 친밀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만큼 북측 지도부의 신뢰가 깊다는 것이다. 대북협력에 오랜 기간 종사해온 한 인사는 “남측뿐 아니라 북측에도 손해가 나지 않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인물이라는 게 북측 관계자들의 평가”라고 전했다. 이번 정상회담 성사도 그 같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것. “견줄 상대가 없는 술 실력도 한몫한 듯하다”는 농담도 나온다.

    탁월한 업무성과를 바탕으로 2006년에는 청와대 안보수석 하마평에 올랐다가 마지막 순간에 좌절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에서는 역시 그의 빠른 승진과 ‘대북채널 독점’을 비판하는 견해가 있으며, 특히 보수성향이 강한 김승규 전 원장과는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본인의 개인적 정치성향은 알 수 없고 줄서기와도 거리가 멀다지만, 외부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사람’으로 인식된 까닭에 현 정부 임기종료 이후 내곡동에 머물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영남권 親盧 신당’과 훈장

    이렇듯 이번 정상회담이나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에 얽힌 변수 중 하나가 연말 국내정치 일정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386인사 상당수는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대북송금 특검 때 떨어져나간 노 대통령 지지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이를 발판 삼아,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경우에도 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계승하는 ‘영남권 친노(親盧)신당’이 총선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성급한 희망도 피력한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김만복 원장뿐 아니라 정치인 출신인 이재정 통일부 장관도 내년 4월 총선에 ‘노 대통령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출마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정상회담의 스타로 떠오른 이들의 경력이 득표력으로 연결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 총선에 출마하려면 이들은 선거 60일 전인 2월9일까지 장관직을 사퇴해야 한다. 어차피 임기 끝이기는 하지만, 핵심 안보부처의 수장이 공석인 채로 수주일 동안 방치될 수도 있다. 다음은 ‘노무현 캠프’ 시절부터 관여했던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6·15 정상회담 공로자에 대한 포상은 2년 후에 이뤄졌다. 실무자들도 상을 받긴 했지만 훈장의 서열은 객관적인 기여도보다는 정부 내 직위 순대로 이뤄졌다. 임기 말인 이번 정부는 수개월 내에 포상을 하게 될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그때는 참여정부의 정신에 따라 직위가 아닌 공적에 의해 훈장 등급이 정해지길 빈다. 그게 ‘정상회담의 정치적 활용’을 주시하는 이들을 향한 가장 좋은 대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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