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闽 - “사장 못 되면 남자 아니다”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5-05-20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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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완과 마주보는 푸젠성은 예부터 과거 급제자와 상인, 그리고 해적을 많이 배출하기로 이름난 땅이었다. 이유는 하나. 영토의 8할이 험준한 산이라 살아남으려면 죽어라 공부하든 장사하든 해야 했기 때문이다. 푸젠인들은 한족의 핍박을 피해 바다로 나갔고, 광둥성과 함께 가장 많은 화교를 배출했다.
    2011년 핼러윈데이. 한국에도 핼러윈 파티가 보급되긴 했지만 아직 대중적이진 않던 때였다. 그런데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이 핼러윈 의상을 입고 특별 세일 행사가 한창이었다. 나이트클럽 호객꾼들도 핼러윈 분장을 하고 핼러윈 파티 홍보전단을 돌렸다. 한국보다 더 일찍, 더 적극적으로 핼러윈을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날 밤, 바닷가에 있는 하바나 클럽을 찾았다. 많은 이가 핼러윈 분장을 한 채 파티를 즐겼다. 특별 이벤트로 ‘패션 콘테스트’와 ‘섹시 콘테스트’도 열렸다. 패션 콘테스트 1등은 능글맞은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손오공 의상을 입은 서양인에게, 섹시 콘테스트의 1등은 칭다오 맥주걸로 분장한 팔등신 금발미녀에게 돌아갔다. 두 1등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인물 좋은 서양인이 중국 친화적인 콘셉트를 잡았다는 점이다. 서양에 대한 동경과 중화의 자부심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것. 조계지(租界地)로서 서양에 일찍 문호를 개방한 샤먼의 특징을 읽을 수 있던 밤이었다.

    문에 달라붙은 벌레

    푸젠성의 약칭인 ‘민’은 ‘종족 이름 민’ 자다. ‘종족’이라고 쓰고 ‘오랑캐’라고 읽는다. 한족과 다른 종족을 뜻하는 한자는 많으나 ‘민’ 자만큼 오랑캐에 대한 중원인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자가 있을까. ‘민’ 자를 풀어보자. ‘문[門]’ 앞에서 알짱거리는 ‘버러지[蟲]’!

    푸젠성은 한족의 경계 바로 앞이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푸젠성에 대해 민월왕 무제(無諸)는 월왕 구천의 후손으로 초한전에서 유방의 편을 든 공로를 인정받아 민월왕이 됐다고 썼다.



    훗날 민월은 옆 나라 동구(東·저장성 남부)와 전쟁을 벌였다. 민월이 정복에 성공하기 직전, 동구는 한무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태위(太尉·국방부장관) 전분은 ‘오랑캐의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고, 중대부(中大夫) 장조는 ‘천자의 나라가 소국의 어려움을 방관해서는 안 되므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천조국으로서 외국의 일에 개입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낼지 말지 논쟁한 것과 같다.

    한나라는 동구를 구하고 동월을 평정했지만, 산은 험하고 사람들은 거칠어 복속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영토 욕심이 많던 한무제조차 동월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고, 동월 백성을 장강과 회수 사이(안후이·장쑤 북부의 평야지대)로 옮겨 살게 했다. 중원의 통치력은 강북의 평야지대까지는 미쳤지만, 강남의 산악지대는 감당할 수 없었다. 민월은 이후 1000여 년 동안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남송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동화했다.

    유구한 시간 동안 한족에 흡수·동화하지 않은 민월인들. 한족의 시선으로는 당시 ‘글로벌 스탠더드’이던 한족의 찬란한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 ‘미개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자신의 경계, 문[門] 주위에 귀찮게 달라붙는 벌레[蟲]라는 뜻으로 ‘민’이라는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뱀을 숭상하는 민월인이 문 안에 뱀을 키웠기 때문에 ‘민’ 자가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이 경우에도 한족의 눈에 민월인의 풍습은 괴이하고 야만적으로 비쳤으리라.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단결만이 살길”

    푸젠 친구에게 추석 때 뭐 할 거냐고 묻자,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빌 거라고 했다.

    “아, 마조(祖) 사당에 가려고?”

    “아니, 마조는 뱃사람들의 신이야. 우리 집은 장저우(州) 산골이라 토지신 사당에 갈 거야.”

    푸젠은 바다의 여신 마조로 유명하니까 마조 사당에 갈 거라는 예상을 깼다. 푸젠 문화가 지역별로 다양함을 새삼 일깨웠다.

    ‘민월은 8할이 산, 1할이 물, 1할이 밭’이라고 할 만큼 산이 많다. 푸젠의 역사는 산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산악지형은 이동하기 힘든 데다가, 많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도 아니다. 그렇다보니 산에서는 소수의 부락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작고 폐쇄적인 공동체에 있으니 언어와 문화도 독자성을 갖게 된다.

    게다가 푸젠은 종족도 다양하다. ‘백월(百越)’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월족, 고산족(高山族), 피난 온 한족 등이 산다. 같은 산 안에서도 종족이 다르고 산을 넘어가면 언어가 다르다. 지방마다 말이 다른 중국에서도 푸젠은 언어가 가장 다양한 곳으로 손꼽힌다.

    산은 외부의 시선을 피할 수 있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중원의 끊임없는 전란은 대규모 피난민을 여러 차례 발생시켰다. 푸젠에 내려간 피난민은 전쟁을 피해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토착민인 토가(土家)와 비교해 피난민들은 새롭게 찾아온 손님과도 같아서 객가(客家)라고 불렸다.

    객가인은 불안했다. 전쟁의 공포는 아직도 생생한데, 생경한 땅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거친 오랑캐들이 득시글거렸다. 산은 임자가 없는 대신에 거칠고 험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약자에게 살길은 단 하나였다. 단결.

    그래서 객가인들은 거대한 원형의 흙집을 지었다. 온 마을 주민이 두세 채 흙집에서 함께 살았다. 산속 요새를 방불케 하는 토루(土樓)는 그들의 공동 숙소이자 병영(兵營)이었다. 1950년대 미군이 인공위성으로 토루를 처음 보고는 핵 군사시설로 착각했을 정도다.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어도 수확은 신통찮았다. 이에 푸젠인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했다. 아이들은 “두꺼비야, 두꺼비야, 하하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지 못한다”라는 동요를 부르며 놀았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오늘날의 ‘권학가’와 놀랄 만큼 닮았다.

    서민적, 실용적, 세속적

    푸젠은 강절(江浙·장쑤성과 저장성) 지역과 함께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강절의 학문은 풍요와 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푸젠의 학문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방도였다. 따라서 강절 문화는 귀족적이고 이론적이며 고아했으나 푸젠 문화는 서민적이고 실용적이며 세속적이었다.

    장쑤 쿤산(昆山) 출신의 대학자 고염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의를 위해 학문을 했지만, 푸젠 취안저우(泉州) 출신의 선비 이탁오(李卓吾)는 관리가 되는 목적은 명예와 이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먹고 입는 것이 인륜”이라며 당대 사회의 위선에 돌직구를 날렸다.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朱熹)도 푸젠의 대학자다. 주자는 대의를 중시하는 유학과 실리적인 푸젠 문화를 조화시켰다. 당시 푸젠에선 고시 준비를 위한 참고서 출판업이 성행했고, 주자는 인기 수험서 저자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탁월한 중국역사서지만 너무 방대했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핵심 정리집으로 고시생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사서집주(四書集註)’도 인기 해설서였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강사가 ‘하룻밤에 읽는 자치통감’, ‘공무원시험에 꼭 나오는 논어’ 등을 펴낸 셈이다.

    태국을 여행하다 푸젠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관광객이 으레 찾는 사원이나 옛 성터 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태국 물건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자기가 앞으로 무역상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서양 여행자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사업가 기질이 대단했다.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그 얘기를 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역사와 문화보다 돈과 음식에 관심이 많아.”

    상인 문화가 발달한 푸젠의 딸다웠다. 농사로 먹고살기 힘들고, 공부를 잘해 과거 급제하기도 어려운 푸젠인은 일찍부터 장사에 나섰다. 푸젠인은 “장사 속에 황금의 집이 있고 옥 같은 얼굴의 가족이 있”으며, “사장이 되지 못하면 용감한 남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산이 많아 상업이 발달한 면에서 푸젠성과 안후이(安徽)성은 닮았다. 내륙지역인 안후이 상인들은 강으로 풍요로운 강절 지역에 갈 수 있어 국내 상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해안 지역인 푸젠 민상(商)은 바다로 나가 해외무역을 했다.

    푸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한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이 거의 비슷한 거리에 있다. 무역의 중심이 될 만한 곳이다. 송·원대 해상 실크로드의 기점이던 취안저우는 10만 명의 아랍 상인이 살던 국제무역항이다. 아프리카·아랍·아시아를 두루 여행한 대모험가 이븐 바투타는 취안저우를 “세계에서 유일한 최대의 항구”라고 극찬했고, 마르코 폴로는 “후추를 실은 배 1척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갈 때 취안저우에는 100척이나 들어온다”고 경탄했다.

    고구마,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 들어오는 창구였고, 해외 우수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인재 풀’이었다. 정화(鄭和)의 대항해는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90년이나 앞서 동남아,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케냐까지 이르렀다. 이때 정화는 취안저우에서 아랍 선원을 고용해 천문항해술을 활용하고 이슬람권의 현지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푸젠인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조정의 의구심을 샀다. 농업이 아닌 상업에 힘쓰고, 오랑캐와 친하게 지내며 이상한 물자가 유통되는 푸젠은 매우 수상한 곳이었다.

    ‘해금령’ 비웃은 생존의지

    명나라는 물자의 국외 반출과 해외 교류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나마 해외무역 창구인 시박사(市舶司)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명나라는 왜구가 시박사에 나타나자 “왜구의 재난은 시박사에서 일어난다”며 시박사를 폐쇄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때부터 왜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푸젠 순무 담륜이 말한 대로, 푸젠인은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굶어 죽으나 해적질하다 죽으나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인만이 왜구가 아니었다. 푸젠·저장·광둥의 현지인도 해적이거나 해적과 한통속인 경우가 많았다. 해적이라 불렸지만 실상 합법적으로 장사할 수 없는 상인인 경우가 많았다. 취안저우의 관료 임대춘은 탄식했다. “연해의 도시와 향촌 사람은 모두 해적이다. 해상의 뱃사람과 상인은 모두 해적이다. 주나 군을 다스리는 장관 좌우의 서리는 모두 해적이다. 연해의 빈민은 모두 해적이다.”

    왜구를 막겠다고 먹고살 길을 막아버리자 멀쩡한 백성들조차 왜구가 됐다. 해금령(海禁令)은 전혀 실효가 없었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됐다. “판자 하나라도 바다에 들어오는 것을 불허했지만, 강 입구를 막을 정도로 큰 배가 들어왔다. 소량의 물건도 외국인이 가져가는 것을 불허했지만, 큰 배는 아이들과 아름다운 비단을 가득 싣고 갔다.”

    해적질도 하다보면 실력이 느는 법. 급기야 명나라 말기 해적 정지룡은 황제에게 푸젠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훗날 명나라가 망했을 때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했을 만큼 푸젠의 실력자였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구랑위 섬에서 바라본 샤먼 전경.



    겨우 2km 떨어진 兩岸

    청나라는 반란의 고향인 푸젠이 불편했다. 대륙에서 패해 타이완으로 도망친 정성공을 고립시키기 위해 해안 50km 이내의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1661~1663년간 8500명의 푸젠 어부와 농민이 죽었다. 해외무역을 금지하고 화교를 ‘외국과 밀통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에 많은 화교가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중톈은 구랑위(鼓浪嶼) 섬을 파도와 피아노 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섬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구랑위는 관광객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일치기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저녁이 되면 비교적 한산해졌다. 평화롭고 조용한 섬의 골목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어느 집 문 앞에 붙은 대련(對聯)을 보게 됐다.

    廈門金門門對門

    大小打

    (샤먼과 진먼, 문과 문이 서로를 마주 보네

    큰 포와 작은 포, 포와 포가 서로를 때리네)

    기가 막힌 대련이다. 이 대련을 이해하려면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민당 군대는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 군대에 패배했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공산당은 이제 샤먼의 코앞에 있는 진먼다오(金門島)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타이완까지 정복해 완벽한 통일을 이루려 했다. 이미 광활한 중국 전역을 해방시켰으니, 눈앞의 조그만 섬은 하루면 충분히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함이 없어 어선을 징발해서 1만 명의 병사, 하루치 식량, 승전 잔치에 쓸 소를 진먼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진먼에는 4만 명의 국민당군이 철벽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데다가, 무기의 화력과 해·공군력은 공산당군을 압도했다. 공산당의 1만 병사 중 3000명은 전사, 7000명은 포로가 돼 단 한 명도 진먼을 탈출하지 못했다. 공산군은 강력한 해·공군력이 없으면 타이완 정복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했다. 진먼 전투는 국지전이 전체 판세에 큰 영향을 준 사례다.

    중국과 타이완 정부가 각각 안정돼 갈 무렵 중동에선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은 함대를 급파해 혁명을 억제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중동의 혁명 세력을 지원하고자 타이완을 침공하는 시늉을 했다. 1958년 8월 23일, 중국은 진먼에 포격을 퍼부었다. 23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동안 4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40일 동안 47만 발의 포격이 가해졌다.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600여 명이 죽고 2600여 명이 부상했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포격이 계속됐고, 1979년 1월 1일 미중수교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포격이 중단됐다. 구랑위의 대련이 말해주듯, 샤먼과 진먼이 맞붙어 큰 포와 작은 포를 날리던 세월이었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노점에서 두유를 파는 할아버지.

    문 밖의 용, 문 안의 용

    오늘날의 샤먼과 진먼은 나른할 정도로 평화롭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기나긴 세월 동안 포탄이 날아다니던 전장이었다. 샤먼과 진먼의 거리는 2km밖에 안 된다. 린이푸(林毅夫) 전 세계은행 부총재는 1979년 진먼에서 육군대위로 근무할 때 농구공 하나를 끌어안고 헤엄쳐서 샤먼으로 탈영했다고 한다. 이제는 탈영 대신 양안 수영대회가 열려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러면서도 샤먼에는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 진먼에는 ‘삼민주의 통일중국(三民主義 統一中國)’ 구호가 각각 걸려 있어 미묘한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활발한 무역을 펼친 푸젠은 광둥과 함께 세계 화교를 양분한다. 중국 안에 있을 때는 별 볼일 없이 살다가 해외에 나가면 펄펄 날아다니는 푸젠인을 보고 중국인들은 “문 안에 있는 벌레가 밖에 나가면 용이 된다”고 신기해한다.

    오늘날 푸젠은 사상 최고로 격려받고 있다. 지난 4월 21일 푸젠은 신설 자유무역구로 선정됐다.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해상 실크로드의 기항지가 돼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 한다. 타이완의 교류·포섭에서도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김용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하지만 중국은 외국의 돈을 좋아할 뿐, 외부 생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싫어한다.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고 제도는 받아들이지 않던 중체서용(中體西用)의 21세기판이다. 폐쇄적인 중국에 개방적, 실용적인 푸젠이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푸젠인은 이제 문 안에서도 용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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