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해전을 재현한 행사. 이순신이 12대 133의 절대 열세 싸움에서 승리한 요인은 헌신적인 리더십이다.
“망명이 내 본뜻이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욕을 가장 많이 먹은 리더는 선조일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인재가 가장 많은 시대를 열었기에 성군(聖君)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최악의 리더십을 보여줬기에 공분을 샀다.
1592년 4월 13일, 조선 땅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연일 전해지는 패전 소식에 선조와 신하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에는, 4월 30일 아침 대화가 기록돼 있다. 선조가 피난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선조는 이산해와 류성룡을 부르고는 가슴을 치며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모(李某)야! 류모(柳某)야!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 꺼리지도 숨기지도 말고 생각을 말해보라.”
신하들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이항복이 의주를 추천하며,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로 가서 호소할 수 있다”고 했다. 윤두수는 전통적으로 군사력이 강했던 함경도를 추천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임금께서 우리 땅을 벗어나 한 발짝이라도 나간다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 말이 비수가 됐는지, 선조가 본심을 드러냈다.
“내부(內附, 명나라로 망명)가 내 본뜻이다.”
선조는 국가와 백성보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명나라로 도망치려 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도망이 아니었다. 종묘사직과 백성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생존에만 연연했다. ‘유체이탈 화법’으로 백성과 신하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전가한 선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참된 리더가 이순신이다. 다음 두 장면을 보자.
#1 이순신의 조카 이분(1566∼1619)이 쓴 ‘이충무공행록’(이하 ‘행록’)의 1597년 2월 26일 상황이다.
이순신은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해 한산도에서 체포됐다. 서울로 압송될 즈음이다. 선조처럼 도망치는 길이 아니다. 불패의 명장이 한순간에 나라의 죄인이 되어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을 떠나고 있었다. 이순신을 본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이 그를 둘러싸고 “대감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은 목숨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2 이순신 자신의 일기다.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통제사 원균(元均·1540~1597)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밤중에 기습당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이 전투 중에 이끌고 나온 12척을 제외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참혹한 사태에 직면한 이순신은 8월 3일 삼도통제사 임명장을 받고 수군 재건의 길을 나섰다.
8월 6일,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이 이순신을 만났다.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살길이 생겼습니다”라며 기뻐했다. 8월 9일 이순신이 낙안을 지나갈 때 길가에 동네 노인 등이 줄을 서 다투어 환영하고 위로하며 음식과 음료수가 든 항아리를 바쳤다. 받지 않으면 울며불며 떼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