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정여울 에세이] 내 안의 눈부신 사랑에 눈뜰 때

  • 정여울 문학평론가

[정여울 에세이] 내 안의 눈부신 사랑에 눈뜰 때

[GettyImage]

[GettyImage]

오래전에 사랑했던 노래의 가사가 마음속에서 다시 예전과는 다른 울림으로 메아리쳐 올 때가 있다. “오래전에 결정해 버렸지요. 나는 결코 누군가의 그늘 아래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길지라도, 그 누구도 나의 존엄을 빼앗을 수 없어요. I decided long ago, never to walk in anyone’s shadows. No matter what they take from me, they can’t take away my dignity).” “왜냐하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죠. 그 사랑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the greatest love of all Inside of me).”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 ‘더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The greatest love of all)’을 들으며, 나는 학창 시절 그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외로움의 나날을 견뎠다. 나는 팝송에서 말랑말랑한 사랑 타령이 아니라 ‘dignity(존엄, 위엄)’라는 견고한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듣는 순간, 마치 그 노래가 그 어떤 철학 수업보다 아름다운 강연처럼 느껴졌다. 학교 다닐 때,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진실로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임을 배울 수만 있었다면, 그토록 오랜 시간 나 자신을 증오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학교교육은 이와는 반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쟁과 성적으로 인해 ‘나는 왜 이토록 부족한가’하는 생각을 심어주고, ‘세상의 북소리’를 듣느라 ‘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학교교육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정말 마음이 따뜻한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토록 매달리고 싶었나 보다.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나를 어여삐 여겨달라고. 나의 재능과 나의 성적이 부족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스승을 찾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는지. 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나를 질책했던 그 모든 순간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른이 돼 신화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 안의 영웅,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진정한 숨은 영웅’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옛이야기 속에서 간절히 찾는 무엇임을 알게 됐다. 내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바로 그런 내면의 영웅이다. 마블 시리즈의 히어로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괴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존엄’을 평생 소중히 간직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우리는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강력한 파워를 가질 수는 없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아름다운 내면의 정원을 가꿀 수는 있다.

마음속에서 가꾸는 내면의 유토피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얼마든지 가꿀 수 있는 내면의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그에게는 눈에 띌 만한 성공도,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재력도 없었지만, 1년 동안 콩을 키워 번 ‘연 매출’이 8달러일 때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일정 시간을 정해 딱 그 시간에만 밥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고, 월귤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최고의 음식이 자연에 있음을 깨닫고, 남들이 노동에 쓰는 시간을 ‘자연과 함께하기’와 ‘읽고 쓰기’에 투자한 소로의 삶은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오직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소박한 삶은 바로 그 누구의 속도도 아닌 오직 자기 삶의 속도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긍정하는 삶이었다. 

휘트니 휴스턴이 노래하는 존엄(dignity)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꿈꾸던 존엄과 꼭 닮은 것이 아니었을까. 대세나 유행에 내 삶을 맡겨버리지 않는 삶, 머나먼 매스미디어 속 유명인을 롤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내면의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살아가는 삶. 



나는 어젯밤 꿈속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오직 내 마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사유의 집을 지으라고. 그 집이 어떤 모습인지, 그 집을 왜 짓는지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과 나만의 견해를 가지는 삶이 충돌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그것이 대단한 조언이라 믿으며 나의 원래 견해를 포기하는 때가 너무 많지 않은가. 

타인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겐 너무 부족했던 것 같다. 꿈은 나의 오랜 결핍을 일깨우며 이제 너만의 집을 지을 때가 됐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꿈속의 목소리를 현실의 내 목소리와 합쳐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말한 바로 그 ‘개성화’, 즉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와 합일되는 삶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개성화’라는 융의 개념을 잘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신도 모르게 눈부시게 개성화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동문들이 저마다 변호사, 의사, 기업의 대표를 맡으며 승승장구할 때도, 그는 상처받지 않았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삶을 못난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이미 자신은 그런 성공한 삶과 다른 삶을 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동급생들이 엘리트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임을 만들고 귀족적인 취향을 즐기며 흥청망청 음주가무를 즐기는 동안, 그는 오래된 고전 속에서 풍겨오는 책 먼지 향기를 맡으며 글을 읽고, 고향 땅 콩코드의 숲과 야생화 핀 언덕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월든’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누군가가 함께 걷는 사람들과 보폭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서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북소리가 자로 잰 듯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의 귀에 들리는 바로 그 북소리에 맞춰서 걷도록 하라(If a man does not keep pace with his companions, perhaps it is because he hears a different drummer. Let him step to the music which he hears, however measured or far away).” 우리가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숙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른 나무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의 봄을 타인들의 여름으로 바꿔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나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여름일지라도, 나만은 봄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나만은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 나무처럼 뿌리내리고 싶다면, 세상의 속도에 맞춰 마구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그곳에서는 마음껏 쉬어도 좋다

“너는 밥을 왜 그렇게 느리게 먹니?” “뭘 그렇게 꾸물거려? 얼른 준비하고 나오지 않고.” 이런 재촉 속에 살아가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 나의 속도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나의 발걸음과 외출 준비 속도와 밥 먹는 속도를 알고 그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들이 돼주어야 한다. 나처럼 빨리 먹지 않는다고, 당신처럼 빨리 걷지 않는다고, 누구처럼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로 사는 것에 전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나는 아직 스트레스를 느낀다. 타인이 말하는 것, 타인이 즐기는 것, 타인이 좋아하는 것들, 특히 타인이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듣고 이해하기는 하되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만의 북소리를 찾아, 나만의 악보를 찾아 연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에게는 억지로 만들어가야 할 타인의 월든이 아니라 항상 내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월든의 세계가 있음을 믿기 시작했다. 내가 읽고 쓰는 모든 것 위에, 나의 월든은 피어나 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 위에, 콩코드의 숲 못지않은 아름다운 생각의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공간에 찾아갈 땐, 이런 마음으로 찾아가고 싶다. 내가 당신의 월든을 방문해도 될까요. 당신이 가꾼 생각의 정원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그의 공간에서 그 무엇도 다치지 않게, 그가 가꾸는 사유와 느낌의 나무들을 고스란히 칭찬해 주고 싶다. 이곳에서는 마음껏 쉬어도 좋으니까. 이곳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본래 지닌 최고의 향기를 누릴 수 있기를.



신동아 2020년 7월호

정여울 문학평론가
목록 닫기

[정여울 에세이] 내 안의 눈부신 사랑에 눈뜰 때

댓글 창 닫기

2020/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