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삶의 현장

“부모와 아이가 함께 목숨 끊을 수밖에 없는 사회”

발달장애인 가족의 비명

  • 김민주 객원기자|mj7765@naver.com

    입력2017-05-18 16: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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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5만 발달장애인과 20만 가족이 우리 사회의 냉대 속에 울고 있다. 장애인도 사람 대접 받는 나라, 장애인도 일터와 가정이 있는 나라, 건강하게 문화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발달장애인이란
    소아기 자폐증과 이로 인한 기능 및 능력 장애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지적장애인, 다운증후군, 자폐, 외상에 의한 발달 손상까지 포함되며, 쉽게 말해 지적·정서적인 어려움 때문에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뜻한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가 개막했다. 각계각층에서 저마다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달라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됐던 ‘발달장애인’ 단체들도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20일 더불어민주당 후보로서 제37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도 사람 대접 받는 나라, 장애인도 일터와 가정이 있는 나라, 건강하게 문화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장애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공약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장애인등급제 폐지와 장애인 인권보호 제도 강화, 부양의무자 단계적 폐지 등 그동안 장애인이 염원하던 내용도 상당히 포함돼 있다. 윤종술 장애인부모연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장애계와 정책협약을 통해 약속한 공약을 충실히 이행해줄 것으로 믿는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동안 발달장애인에 대한 처우는 수십 년에 걸쳐 많이 개선됐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그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뉴스에서는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가 아이와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하곤 한다. 2014년 아들과 동반 자살을 선택한 40대 한 가장은 “이 땅에서 발달장애인을 둔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 힘든 것 같다. 힘든 아들은 내가 데리고 간다. 아들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겨 안타까움을 더했다.



    노골적인 장애아동 입학 거부

    영화 ‘도가니’로 사회적 파장까지 몰고 왔던 광주인화학교 사례처럼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과 학대, 폭행 등 인권침해도 여전하다. 2012년 천안 인애학교에서는 기숙사 사감과 교사가 여학생들을 잇달아 성폭행하면서 구속돼 ‘제2의 도가니’로 사회적 공분을 샀고, 지난 1월에는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인 전북 남원 ‘평화의 집’에서 생활재활교사가 장애인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추행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발행하기도 했다. 이런 인권침해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이사, 서울장애인부모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박인용 씨는 발달장애를 가진 딸 하은(23) 양을 키우는 부모로서, 누구보다도 발달장애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다. 금융업계에 종사하던 박씨가 회사에 사표를 낸 것은 딸이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이었다. 유아교육기관들이 장애를 이유로 가는 곳마다 딸의 입학을 거부했고, 힘들어하는 아내 모습을 보니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



    특수교육법 제정 위해 고군분투

    화가 난 박씨는 딸의 입학을 노골적으로 거부한 유치원에 대해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이는 장애학생 교육권 침해 사유로 낸 최초의 인권위 진정사건으로 당시에 상당히 화제가 됐다. 하지만, 결국 증거자료 불충분으로 기각 결정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박씨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옹호를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2003년 장애인교육권연대 초대 공동대표를 맡으며, 전국에 있는 장애인 부모들의 단합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박씨는 “생업을 제쳐두고 발달장애인들의 권리옹호자로서 어떤 부모보다도 노력해왔지만, 유아기를 거처 성인이 된 지금까지 미처 막아내지 못한 사건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노골적인 거부는 없었지만, 교사들이 자신의 처지에 따라 수업 여부를 마음대로 결정했다. 일반교사는 아이를 특수교사에게 맡겼고, 특수교사는 권한도 없는 교육 보조원에게 교육을 맡겼다.

    또한 학생들의 괴롭힘도 끊이질 않았다. 여학생들은 점심을 먹던 딸 아이의 식판에 콜라를 붓는가 하면, 어떤 남학생들은 딸을 놀리기 위해 여자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또한 치료실에서 집으로 가는 5분간의 빈틈을 타 아이를 추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안면이 있는 주민이었다. 박씨는 그를 즉시 고소하고 실형을 살게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계가 막막한 그 가족을 위해 법원에 가서 집행유예 탄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박씨는 “학교나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그런 행동이 약자에 대한 인권 침해나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없다”며 “자신을 지키고 판단하는 능력에 제약을 가진 발달장애인들을 무시하는 사회 인식과 그것을 방임하고 조장하는 제도적인 문제가 그 이유”라고 날선 지적을 했다.

    박씨는 지난 20년 동안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인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왔다. 가장 먼저, 전국 장애인교육권부모연대를 통해 ‘특수교육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고군분투했다. 특수교육법은 2007년 신설된 법으로 장애학생과 보호자의 권리·참여를 강화하고, 장애인의 교육 기회 보장과 교육의 질 향상에 필요한 특수교육 및 관련 서비스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박씨는 “이 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장애아들을 위한 사교육비 부담이 엄청 컸다”면서 “특수교육법이 제정되면서 학령기 특수교육 대상자에게는 대부분 치료지원(10만~12만 원 내외)이 이뤄지고, 복지부의 발달재활서비스(소득기준 150% 이내 가구에 14만~22만 원 지원)가 시행되고 있어 발달재활을 위한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이 대폭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가정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

    물론, 특수교육법이 현실화되기까지 순탄치 않았다. 박씨를 중심으로 장애인교육권연대에서는 교육부와 정부청사, 국회 앞에서 매일 시위를 벌였고, 이로 인해 박씨는 유치장을 3번이나 들어갔었다.

    “법을 통과시키는 일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 투쟁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법이 제정된 뒤, 장애인 부모들 사이에서도 ‘희망이 보인다’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죠. 그래서 이 싸움을 끝까지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2011년에는 ‘장애아동복지지원법’ 제정 청원 운동에도 나섰다.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은 각 시·군·구 지자체에 지역 장애아동지원센터를 설치·운영하면서 장애 아동들에게 필요한 복지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특수교육법’과 ‘장애아동복지지원법’ 등으로 처우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발달장애인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인권침해와 차별의 대상이 되어왔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과 자립생활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김평곤 씨는 중증발달장애를 가진 종민 군의 아버지다. 김씨 역시 지난해 서초종로학원 원장 자리에서 물러나 아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아들이 성장해 통제 불가능 상태가 잦아지면서 아내 혼자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아들의 키가 180㎝이고 겉으로 보면 건장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지능은 3세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아이가 화가 나면 그냥 발가벗은 채로 밖으로 뛰쳐나가요. 결국 아내가 제어하기 어려워지면서 제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아이의 성장에 맞춰 약물치료를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 소용이 없을 때가 많았다. 김씨는 “솔직히 말해 아이를 장애인 시설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며 “그건 우리 가족이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가족이 붕괴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매일 계속됐다”고 힘든 마음을 토로했다.



    그룹홈 운영하는 배수판 신부

    발달장애 자녀를 둔 가족은 평범한 가정처럼 살기가 힘들다. 아이와 외식이라도 하고 싶으면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선택해야 하고,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가족 모임이라도 함께하기 힘들다. 김씨는 “친척 결혼식에 아들을 데리고 갔다가, 아들이 결혼식장을 뛰어다니면서 휘저어 한바탕 난리가 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아이의 정신 연령이 3세 수준이다 보니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고, 간혹 폭력성이 있는 아이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2014년에는 경남 창원에서 아홉 살 자폐 아이가 실종됐다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2014년 12월에는 발달장애인 19세 A군이 두 살 아이를 3층에서 내던져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김씨는 발달장애인 관련 사고에 대해 “중증발달장애 아이들에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하면 그냥 뛰어내릴 것”이라며 “이 아이들은 위험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뭘 하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김씨의 아들 종민 군보다 장애 정도가 덜한 박하은 양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얼마 전 하은 양이 집에서 혼자 국수를 끓여 먹으려다가 국수에 불이 붙어 누전이 된 적이 있다. 큰 불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사건이었다. 그나마 하은 양과 종민 군은 돌봐줄 가족이 건재하니 상황이 좋은 편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돌봐줄 가족이 사망하거나, 아이를 부양할 능력이 없어졌을 때다.



    “손주 받아줘야 눈감겠다”

    후천성 뇌출혈로 10세 지능에 머물러 있는 최진혁(23) 군이 바로 그런 경우다 진혁 군의 외할머니는 아이를 낳고 가출한 딸 대신 지극정성으로 외손자를 돌봐왔다. 하지만 어느 날, 할머니는 병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외손자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만난 사람이 바로 배수판 신부(도미니코 수도회)였다. 배 신부는 “할머니가 만날 때마다 ‘우리 진혁이 좀 받아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셨다”며 “그 간절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어느 날 병원에서 할머니가 신부님을 계속 찾는다고 하기에 가봤더니, 폐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계셨어요. 할머니가 ‘진혁이를 신부님이 받아주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통곡하시더군요. 성직자 신분으로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주겠다’고 말씀드렸죠. 그제야 할머니가 편하게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그렇게 배 신부는 2015년 4월, 최진혁 군을 수도회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아무리 성직자 신분이라도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맡아서 돌본다는 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특히 수도회에 있는 다른 신부들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사안이라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상급기관과 함께 지내는 다른 신부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시급했다.

    “수도원 공간이 사제와 신학생들을 위한 숙소여서 장애인이 머무는 건 상상을 못할 일이었죠. 그런데 제가 가장 선배이다 보니 다른 사제들이 드러내놓고 반대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명을 보고 살자’며 다른 사제들을 설득하면서 진혁이와 같이 사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 아이도 받아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배 신부는 그중 다운증후군을 앓는 이대우(23) 군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대우 군의 어머니는 가정방문을 하면서 노인을 돌보는 일을 했지만, 일자리를 잃고 돈이 없어 살던 집마저 팔면서 가족이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이대우 군까지 수도회에 들이게 되자, 배 신부는 ‘이게 나의 길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우까지 오고 나니, 자꾸 이쪽으로 길이 열리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생명’을 보고 살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2명의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 허가 받기 어려워

    배 신부는 수도회에 장애 아이 2명이 함께 거주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상급기관에 이런 계획을 보고했다. 결정이 나면, 몇 년 안에 ‘그룹홈’ 형태로 시설을 운영할 계획도 세웠다. 그룹홈이란, 소규모 시설 또는 장애인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가정을 뜻하며, 그룹홈의 장점은 가족적인 환경 속에서 개개인에 맞춘 돌봄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러던 중, 종민이와 대원이(발달장애, 4세 수준)의 부모가 배 신부를 찾아왔다. 아이들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두 아이 모두 일반 시설에 들어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 부모는 배 신부가 운영하고자 하는 ‘그룹홈’에 꼭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그렇게 지난 3월 9일, 두 명의 아이가 추가로 수도회에 거주하게 됐다.
    하지만 ‘생명’을 보고 좋은 마음으로 그룹홈을 시작했지만 정부 허가를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배 신부는 ‘1년 동안 어떻게 운영되는지 지켜본 후 결정할 수 있다’는 허망한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후원금이나 운영비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진행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배 신부의 마음을 괴롭혔다.

    “저도 이 일을 계획한 건 아니지만,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주위에서 조금씩 후원금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이 일을 하다보니 장애인 쪽은 정부 지원이 정말 취약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하늘의 뜻이 있다면, 분명히 길을 열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이 그룹홈에 자녀를 받아달라고 요청하는 장애인 부모가 많은데, 배 신부는 재정적인 상황이 안정된다 해도 최다 6명까지만 받을 계획이다. 아이가 많으면 맞춤형으로 돌보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재활센터 턱없이 부족

    그룹홈에 있는 4명의 아이는 수도회 자원교사 신부님들의 개별 돌봄을 받고 있으며, 종민이 아빠와 대우 엄마가 수시로 들러 아이들의 산책이나 돌봄을 돕는다. 장애 가족들이 그룹홈 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하니, 수도회에서도 그룹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상황이다. 김평곤(종민 아빠) 씨는 “그룹홈을 통해 우리 가정이 일반적인 가정과 비슷하게라도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쳤다.

    “아이가 평일에 그룹홈에 있고 주말에 집에 와요. 통제가 안 돼 날뛰던 아이가 집에 없으니까 다른 가족들이 한시름 놓은 건 사실입니다. 가정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이 현격히 낮아졌거든요. 그리고 특히, 우리 부부가 죽었을 때 저 아이를 누가 돌봐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은데, 그룹홈을 통해 대안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발달장애 아이들도 우리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니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하루빨리 준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발달장애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거죠!”

    그룹홈에 있는 아이 4명은 모두 특수고교를 졸업했다. 이 가운데 3명(대우, 종민, 재원)은 사회생활이 불가능해 집에 있고, 1명(진혁)은 현재 직업훈련센터를 다니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박인용(하은 아빠) 씨는 “하은이의 꿈이 바리스타인데, 사실 수행능력이 부족해서 힘들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에는 발달장애인에 맞는 맞춤 프로그램이나 재활센터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특수교육법’과 ‘장애아동복지지원법’으로 학령기 아이들에 대한 지원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면서도 “성인이 되면 나갈 곳이 없어 집에만 있게 된다. 그러면 가족이 하루 24시간 그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에 그는 “아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 시민으로 존중받으려면 집, 소득, 직업이 있어야 한다. 이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돌봄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獨, 중증발달장애인 50% 이상 취업

    선진국에선 발달장애인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펼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에 박인용 씨와 서울장애인부모회는 2년 전 독일의 발달장애인 ‘직업시설’ 등을 견학하고 돌아왔다.

    박씨 일행이 방문한 독일 바이에른 주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마인프랑키시 장애인 공장(Main-fraenkische Werkstätten)은 대표적인 취업센터다. 이곳에는 직업훈련장, 포장조립 작업장, 재활용전선 추출라인, 교육용 목공재료 가공, 전기케이블 조립라인 등 5개 라인에서 450여 명의 발달장애인이 다양한 부문에서 각자 역량에 맞게 일하고 있었다. 발달장애인이 안전하게 제작된 ‘자동장치’를 사용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며, 인건비와 운영비는 전액 국가가 지원한다. 따라서 생산 수익은 모두 발달장애인 근로자에게 분배된다. 이곳에서 제작되는 생산품들은 생산성은 낮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씨는 “우리나라는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16%만 일을 하기 때문에, 실업률이 84%를 넘는다”며 “하지만 독일은 중증 발달장애인의 50% 이상이 장애인 공장에 보호 고용돼 있고, 학습장애인은 60% 이상이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일반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씨와 서울장애인학부모회는 지난해 6월, 독일에 위치한 ‘발달장애인 주거시설’도 탐방했다. 이번에는 독일 남부에 위치한 발달장애인 종합지원기관인 지글러 재단(Zieglerschen) 등의 주거지원 기관을 둘러봤다. 지글러 재단 본부가 위치한 지역은 각종 지원센터와 특수학교, 작업장, 집중 주거시설, 지역사회 그룹홈 등이 밀집해 있으며, 마을 전체가 교회를 중심으로 ‘장애인복지 타운(주거지)’을 이루고 있다.



    집, 소득, 사회적 인식 개선 필요

    주거시설에는 경증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자립형 주택과 중증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시설이 구분돼 있다. 이곳에는 이들을 돕는 지원자들과 다양한 연령층의 장애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은 독일 각지에서 오며, 가족과의 왕래는 30% 정도 수준이다. 이는 가족의 부양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씨는 “독일 거주시설에 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쉬운 작업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중증 발달장애인이다. 하지만 독일 부모들은 이들이 성인이 되면 지원기관에 의뢰하기 때문에 성인기 자녀로 인해 일상적인 양육 부담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는 오히려 성인이 되면 양육에 부담을 느껴 시설에 입소를 의뢰하는 것이 독일과 큰 차이점이다”며 “독일에서는 발달장애인들이 인간적으로 대접받고 지역사회와 통합된 주거가 지원되고 있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도 빨리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성인기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박씨는 “성인기가 된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며 “그들을 시민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는 집과 소득, 직업이나 돌봄 서비스 같은 지원이 선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발달장애 부모 및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지원 확대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정부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2012년부터 ‘발달장애인 지원계획’을 수립했으며, 2014년 4월 ‘발달장애인법’이 통과돼 2016년 본격 시행됐다.

    박씨는 “발달장애인법은 국내법으로는 처음으로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옹호하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 시행령과 시행규칙의 미흡한 점을 채우는 일이 부모들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주장하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부와 사회의 지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소득보장 제도가 입법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부양가족 의무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그래야 발달장애인이 기초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애인 상당수는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가족이 책임지고 노동 능력이 없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양의무제’가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부양의무제의 단계적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민

    박씨는 “발달장애인에게 고정적인 소득이 생긴다면, 다음으로는 거주시설이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은 성인이 돼도 부모와 함께 살거나, 시설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독일 사례처럼 ‘장애인이 거주할 수 있는 특화된 거주시설’ 마련도 시급하다. 또한 성인기가 되면, 그들이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자리’나 ‘즐길 거리’를 지원해야 한다. 이들이 시설에 가서 살면, 사회에 불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처럼, 사회에 나와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때문에 인식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박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발달장애인에 대한 시민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장애인 시설이 자기 지역에 들어서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무시하고 침해해도 된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동정이 아닌, 공존과 평등의 가치를 가지고 시민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1951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미국 발달장애인협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날 미네소타 주지사 루터 영달은 “우리의 위대한 민주주의의 척도는 우리 사회가 가장 약한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자부하는 요즘, 우리는 진정 약자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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