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다산지식하우스)라는 책을 펴낸 뒤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검사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책을 쓰게 됐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책을 쓴 건 정말 운명적이었다.”
법무연수원 검사교수로 신임 검사들을 가르치던 지난해 8월 중순. 아들의 여름방학 숙제인 대학 탐방 리포트를 쓰기 위해 서울의 모 대학을 방문했다. 더우니 시원한 곳에 들어가자는 아들의 제안에 들른 대학 구내에서 나도 모르게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책 쓰기에 대한 책이었다. 평소 책 읽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던 난 무심코 몇 장을 넘기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사건 ‘떼기’에 급급했던 과거
책은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 국문과를 졸업한 사람이나 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반인도 쓸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그려내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책이 된다는 것이다.
책을 내려놓고 내게도 남에게 내놓을 만한 스토리가 있는지 생각해봤다. 물론 10년 넘게 검사실에서 접한 수많은 사건이 생각났다. 아니, 그 사건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생각났다. 검사 시절, 사건 하나에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하고자 맹세했지만 밀려드는 사건의 파도에서 힘들게 허우적대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검사로서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선순위에서 밀리던 가족에 대한 미안함 역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남들이 어떻게 책을 쓰는지 보려고 먼저 서점에 들렀다. 무슨 책이 그렇게 많은지 새삼 놀랐다. 한참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너가 눈에 들어온다. 감성 에세이와 약해진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는 심리분석 관련 서적 코너에 사람들이 붐빈다. ‘역시 다들 힘들게 살고 있구나. 내 이야기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자’라고 생각하며 책을 써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책을 써내려간 기간이 3개월인데, 초반 2개월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읽었다. 몇 번 반복해 읽은 책도 있다. 목적 없는 독서와 책을 쓰기 위한 독서는 완전 달랐다. 감성을 채워 넣기도 하고, 글의 체계를 잡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어떤 것에 몰입한다는 게 이토록 즐거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검사 생활 내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던, 시골 지청 검사 시절 한 소년의 사건이 먼저 불려나왔다. 횟집만 골라 가게 다섯 곳에서 돈을 훔쳐 나오며 수족관의 산소공급기를 빼버려 물고기들을 죽게 만드는 피해를 입혔다. 구속돼 검사실로 들어온 앳된 소년을 보며, ‘왜 하필 모두 횟집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년이 어렵게 털어놓은 사연은 검사실 구성원 모두를 한숨짓게 했다.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진 소년. 할머니가 바닷가 출신으로 회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회를 사드릴 수 없던 소년은 밖으로 나돌면서 결국 홧김에 횟집을 대상으로 범행을 한 것이다.
소년의 삐뚤어진 마음을 돌린 건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주변 어른들의 관심이었다. 피해를 입은 가게 주인들의 따뜻한 마음씨, 할머니의 애절한 손자 사랑, 검찰 구성원의 관심으로 그 소년은 석방돼 할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만 있다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견디고 더 높은 곳으로 튀어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다.
책에는 검찰청에서 일어난 따뜻한 사건, 시원한 ‘사이다’ 같은 사건들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정치인이나 기업에 대한 수사 등 굵직한 사건도 처리하긴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가슴 한쪽을 따뜻하게 채우는 건 형사부에서 맡았던 안타까운 사건들이었다.
네잎 클로버 vs 세잎 클로버
어느 검사나 초임 시절엔 사건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처리하고자 마음먹는다. 그러나 매일 밀려드는 사건 부담에 초심은 오간 데 없어지고 사건 ‘떼기(처리)’에 급급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건 처리로 인한 과오는 언제나 검사에게 책임이 돌아온다. 자존심 강한 검사들이 그 부담감으로부터 초연해지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남 보기엔 빛나지 않지만, 그래도 묵묵히 일하는 형사부 검사들이 있기에 검찰청 내부 업무 전산망엔 민원인의 따뜻한 편지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형사부를 검찰의 필수품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소·불기소 판단에 그치지 않고 민원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도울 일이 없는지 찾아보는 검사들이 있다. 사건 속 사람 일을 남 일로 여기지 않고 마치 가족의 일로 여기며 정성을 들인다. 그리고 규정과 매뉴얼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성을 발휘해 그에 맞게 사건을 처리해준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용기를 발휘하는 것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검사 생활 중간에 사건과 사람으로부터 오는 막중한 부담감으로 난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닥친 시련에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동료들의 관심과 가족의 사랑으로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을 너무 높게 설정하고, 스스로 자신을 토닥이지 못하면 결국 신경계통의 부조화가 오게 마련이다. 증상의 경중은 있어도 현대인 대다수가 겪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검사 생활을 뒤돌아보며 안타까운 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일 다른 사람의 사건 속에서 헤매다보니 막상 내 가족을 소홀히 했다. 막연히 ‘올해만 가족을 잊고 열심히 하면 내년엔 좀 여유 있는 자리에 가 있겠지’ 하는 생각에 가족과 일상을 즐기는 게 행복임을 잊고 지냈다.
하지만 인생살이가 어디 그런가. 내년이 되면 다시 상황이 변한 게 없음을 깨닫고도 또 내년을 기약한다. 일상을 희생하고 높은 자리, 남이 탐내는 자리에 오른다고 그 인생이 진정 행복하다고 장담할 순 없을 것 같다. 있을지 모르는 네잎 클로버를 찾자고 그 많고 아까운 세잎 클로버를 깔아뭉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책을 쓰면서 검사 생활 내내 힘들었음에도 내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혼자 성장한 게 아니라 검사실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 검찰청의 동료와 수사관, 가족과 일상을 겪으며 성장했다. 새벽에 혼자 글을 쓰며 웃고 울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치유됨을 느꼈다. 그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지 잘 모르겠으나,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가족에게 상당히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아내는 내가 글 쓰는 동안 더 부드러워지고 남의 말을 더 경청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고위직에 있거나 돈이 많다고 하여 그 가치가 빛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존재만으로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 그걸 깨닫고 가족,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일상을 채워간다면 저 먼 인생길에서 행복감에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은 벼락치기가 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바로 지금, 행복하세요.”
안종오
● 경희대 법학과 졸업, 환경법 박사
● 법무연수원 검사교수(부장검사), 서울중앙지검·수원지검·의정부지검 등 검사 경력 16년
● 現 법무법인 아인 대표변호사
● 저서: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다산지식하우스), ‘Laws of Korea’(Korea Law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