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ZOOM 人

“실패했어도 야구에 미친 인생 나 같은 선수 재기 돕고 싶다”

독립야구단 ‘저니맨 외인구단’ 최익성 감독

  • 이영미|스포츠 전문기자

    입력2017-05-19 10:23:4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현역 시절 6개 구단에서 선수로 뛴 ‘저니맨’ 최익성 씨가 최근 독립야구단 ‘저니맨 외인구단’을 창단해 운영 중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야구 도전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들려준 지난했던 야구 인생,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뜨거운 야구愛.
    최익성(45)이란 이름 앞에는 항상 ‘저니맨(Journeyman, 여러 팀을 떠돌아다닌 선수)’이란 수식어가 뒤따른다.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한 후 한화(1999년), LG(2000년), 해태(2001년), 현대(2002년), 삼성(2004년), SK(2005년) 등으로 팀을 옮기며 여섯 벌의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두산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만 빼고 전 구단을 경험한 셈이다. KBO리그 은퇴 후엔 야구를 좇아 미국, 대만, 멕시코를 떠돌았다.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는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그의 통산 기록을 보면 프로 12시즌 동안 621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2할6푼7리, 60홈런, 216타점, 85도루를 기록했다.

    1997년엔 122경기에 나가 2할9푼6리, 142안타, 22홈런, 33도루, 65타점을 올렸다. 야구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그해 최익성은 20(홈런)-20(도루)까지 달성했다. 그럼에도 워낙 이적이 잦다보니 선수 생활을 실패로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5년간 야구사관학교를 운영하다 최근 독립야구단 ‘저니맨 외인구단’을 창단하고, 독립리그를 출범시키는 등 최익성의 야구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20-20클럽 가입

    잠시 옛날 얘기를 해보자. 팀을 자주 옮겨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내 인생이 결코 쉽게 가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프로 입단도 연습생 신분이었고, 야구가 잘되는 듯싶으면 꼭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신인 시절 삼성에서 백인천 감독을 만난 게 내겐 큰 행운이었다. 그분 덕분에 1997년 20-20클럽에도 가입했다. 그런데 후임 감독으로 온 분이 나를 한화로 트레 이드시키면서 저니맨 인생이 시작됐다(이때 감독과 불화설이 나돌았다). 한화에서 선수협 사태에 연루된 괘씸죄로 LG로 트레이드됐고, 홍현우의 FA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가 현대를 거쳐 친정팀 삼성, SK로 옮기는 등 거의 해마다 팀을 바꿔갔다.”

    그렇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만약 내가 고분고분한 성격이고, 그래서 지도자의 말에 순응하는 선수였다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로 선수라면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밝히고, 지도자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으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인드가 윗사람들과 자주 부딪치면서 나중에는 아예 ‘찍힌’ 선수가 되고 말았다.”

    너무 잦은 트레이드는 야구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 같다.
    “매번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게 어렵기는 했다. 팀에서 굳이 잘 챙겨야 하는 선수가 아니라 트레이드 카드로 자주 활용된 면도 있었다. 나중에는 이런 트레이드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프로 생활 12시즌 동안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기록이 무엇인가.
    “아무래도 1997년이 가장 화려하지 않았나 싶다. 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20경기 이상(122경기) 출전했다. 20-20클럽 가입도 자랑스러운 타이틀이다. 삼성에서부터 SK까지 프로 12시즌 모두가 내게는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무작정 향한 미국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감독을 만났을 텐데, 꼭 만나고 싶었던 감독이 있었나.
    “김성근 감독 밑에서 야구를 해보고 싶었다. 몇 번 기회가 있었는데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오갈 데가 없을 때 감독님께 전화를 드려 테스트 받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다. 허락을 받고 찾아갔지만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다. 그 후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2005 시즌 SK와이번스에서 은퇴 후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
    “1년 6개월가량 미국에서 고군분투했다. 갖고 있던 승용차랑 집을 모두 팔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내 야구 인생은 구단이 아닌 내가 직접 마무리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선수 생활을 더 이어가고 싶었다.”

    SK에서 방출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가.
    “전혀. 사실 2005년에 컨디션이 가장 좋았다. 그해 대타로 100타석도 못 들어간 상태에서 홈런을 4개나 때려냈다(오승환 상대 홈런 포함). 플레이오프에서는 5번을 쳤다. 박재홍, 김재현, 이진영, 조원우 등과 다음 시즌을 기약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보류선수 명단 제출 마감 1시간 전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정말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12월, 추운 겨울에 해고 통보를 받은 선수의 심정이 이해되겠나. 서른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였는데 말이다.”

    은퇴를 염두에 둘 만했을 텐데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미국이었나.
    “더 이상 한국에선 내 자리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워 무작정 짐을 싸서 미국 LA로 향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전혀 없었다. LA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거기서 하숙집을 알아봤는데 그래도 야구를 한 덕분에 알아보는 분들이 있더라. 그분들 도움으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운동할 곳을 찾아봤더니 당시 미국에 와 있던 이문한 삼성 전 스카우트가 독립구단 롱비치 팀을 연결해줬다. 입단이 아닌 연습할 기회를 제공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구단에서 허락한 덕분에 그곳에서 3개월가량 훈련을 함께 했다.”

    그곳에서 훈련만 한 것인가.
    “처음에는 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다가 방망이만 휘두르면 계속 홈런을 쳐대니까 감독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중엔 내게 기회를 줄 테니 팀에 계속 남아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조건과 대우도 아주 좋았다. 처음에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모텔방에서 혼자 기쁨에 겨워 소리 지르고 뛰어다녔을 정도다.”



    호세 칸세코와의 악연

    그래서 그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건가.
    “참으로 안타까운 건 야구를 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호세 칸세코(1980~9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가 롱비치 팀을 찾아와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바람에 내게 주어졌던 기회가 하루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내게 미안하다면서 샌디에이고에 있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자 문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관광비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자 문제로 롱비치 팀에서도 뛸 수 없었다는 얘기 아닌가.
    “롱비치에서 취업비자를 내주기로 했기 때문에 칸세코만 아니었다면 난 취업비자를 받고 마음 편히 야구에 전념했을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귀국했다가 또다시 미국을 찾은 것으로 아는데.
    “미련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비자를 받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이후 애리조나 캠프로 넘어갔다. 그때 내 일을 봐주던 에이전트가 잠적하는 바람에 6개월가량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LA로 돌아와 서재응과 최희섭을 만났다. 어려운 처지에 있던 나를 후배들이 많이 도와줬다.”

    그다음 여정은 어떻게 됐나.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있는 것도 아니고, 에이전트가 책임감 있게 일하는 상황도 아니다보니 자칫하면 사기당하기 십상이었다. 나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백인 선수 두세 명과 함께 차를 타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갔다. 에이전트랑 함께였는데, 어느 훈련장에 나를 내려놓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차도, 돈도 없이 훈련장 창고에서 일주일 동안 그 에이전트를 기다린 적도 있다. 멕시코에선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돌이켜 보면 롱비치 팀에 있을 때 호세 칸세코의 등장으로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미국 생활이 꼬인 게 아닌가 싶다.”


    야구만 보고 무조건 직진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비자 기간이 6개월이라 6개월마다 귀국하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 1년 6개월가량 미국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며 아마추어 야구를 자세히 들여다봤고, 독립리그에서 뛰진 못했지만 그들의 야구 문화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빡세게’ 훈련하던 습관이 몸에 밴 난 그들이 하루 3시간만 훈련하고도 야구를 잘하는 게 신기했다. 그곳에서 그걸 배운 게 이후 많은 도움이 됐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나.
    “그걸 걱정했다면 미국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멕시코에선 선수들이 날 원숭이 쳐다보듯이 대했다. 스페인어로 얘기하면 난 한국어로 대답했으니까. 사실 선수들과 멕시코로 넘어갈 때 죽음을 각오했다. 사고로 죽는다면 한국에서 교통사고 났다고 생각하고 정신줄 붙잡고 가자는 마음뿐이었다. 정말 그때는 야구만 보고 무조건 직진했다. 다시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다.”

    최익성은 자신의 미국행에 대해 “뭔가를 이루려고 간 게 아니라 도전하러 갔다”고 설명했다. 차와 집은 돈만 있으면 다시 살 수 있지만 야구는 시간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그때 아니면 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생에 점을 찍어야 했다. 어떤 형태로든 도전해보고 싶었다. 대한민국 야구 선수 중에 몇 명이나 그런 도전을 해보겠나. 다른 선수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실패했다고 해도 난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최익성의 진심이었다.

    미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귀국해선 어떻게 보냈나.
    “그때 내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다. 이미 돈은 미국에서 다 썼고, 가진 것 한 푼 없는 신세였다. 사실 SK에서 나오기 전 코치 연수 제의를 받았다. 받아들였다면 먹고살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야구선수로 더 뛰고 싶은 마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을 찾은 건데, 대가는 혹독했다. 다른 것은 다 견딜 만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정말 버티기 쉽지 않았다. 주위에서 도와준 덕분에 잘 극복해냈다. 이승엽도 나를 도와준 한 사람이다.”



    야구육성사관학교

    이승엽이 어떤 도움을 줬나.
    “삼성에 있을 때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그런데 내 소식을 들었는지 날 찾아왔더라. 승엽이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타자’였고 난 실패한 떠돌이 인생이었는데 내게 ‘밥은 먹었느냐, 운동은 어디서 하느냐, 잠 잘 데는 있느냐’면서 챙겨줬다. 요미우리 코치 연수를 알아봐주기도 했다. 성사 단계까지 갔다가 막판에 틀어졌는데 나보다 더 속상해하고 흥분했던 사람도 승엽이다. 참 고마운 후배다.”

    야구육성사관학교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된 건가.
    “한두 해에 계획해서 이뤄진 일이 아니다. 약 7년 동안 기획했고, 2012년 처음 설립해서 3년 만에 본 궤도에 올랐다. 이전의 나처럼 갈 곳 없는 선수들의 재기를 돕고 실력과 인성을 함께 어우르는 시스템을 통해 선수들을 발굴해내고 싶었다. 만약 야구만 가르치려 했다면 굳이 ‘학교’란 단어를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성과 실력을 모두 갖춘 선수로 키우고자 사관학교란 명칭을 단 것이다. 야구만 하는 선수들은 야구로 성공하지 못하면 갈 곳이 없다. 그걸 염두에 두고 사관학교를 통해 좋은 인재를 발굴하고 성장시키려 했다.”

    안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고액과외’라느니, 어린아이들 ‘삥’ 뜯는다느니 하며 비난을 했다. 독립구단을 만들 때는 선수들 인생을 다 망치고 있다며 날 비하했다. 설령 내가 돈을 번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재투자됐다. 내가 돈을 벌려고 했다면 굳이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난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그걸 인정해주면 내게 선수들을 보내고, 믿지 못하면 안 보내면 된다. 사람들은 남 잘되는 건 절대 두고 보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저니맨 외인구단’이란 독립리그 팀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
    “전혀 계획에 없었다. 야구육성사관학교를 통해 4명을 프로에 보냈다. 내가 만든 시스템에 자신이 생겼다. 어느 날 실패한 야구선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더 이상 프로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들이 내 주위로 몰렸다. 야구는 계속하고 싶은데 뛸 수 있는 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독립리그 팀인 연천 미라클의 시스템을 연구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야구인들에게 자문했고, 운 좋게 타이틀 스폰서를 구하면서 독립리그를 출범시키게 됐다.”


    돈을 내며 뛰는 선수들

    선수들로부터 돈을 받아 구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지 않고선 운영이 어렵다. 물론 앞으로 선수들의 돈을 받지 않고 자생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돈 없이 어떻게 구단을 운영할 수 있겠나. 이전 고양 원더스를 운영했던 허민 씨처럼 사비를 털어야 하나.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1년에 3억~5억 원 정도면 팀 운영이 가능하다. 더 열심히 뛰어 선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게끔 만들 것이다.”

    독립리그 출범을 준비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이었나.
    “나보다 더 유명한 선수 출신들이 나서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여건에서 리그가 진행됐을 것이다. 은퇴한 선수들은 다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하다. 차라리 무관심은 낫다. 뒤에서 이런저런 소문을 만들고 음해하는 사람들로 인해 심적 고통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 정도였다. 몇 번 그만둘 위기가 있었다.”



    김상현, 유창식…

    지금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 건가.
    “선수들이 매달 50만~80만 원 정도 숙식비를 납부한다. 연천 미라클은 스폰서인 연천군에서 2억~3억 원을 지원한다. 우리도 스폰서를 유치하면 선수들로부터 숙식비를 받지 않을 것이다. 현재 여러 지자체와 협의 중인데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김상현(KBO리그 홈런왕 출신인 그는 지난해 7월, 품위 손상 등의 이유로 임의탈퇴 처분 받음), 유창식(승부조작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음) 등 저니맨 외인구단에서 뛰는 선수들 중에 사건 사고에 연루된 선수들이 눈에 띈다. 그들에게 손을 내민 이유가 궁금하다.
    “그런 선수들이 한국에서 설 무대가 없다고 일본 독립리그로 진출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기술자’들을 일본에 빼앗기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특히 김상현은 너무 어이없는 일에 연루됐고, 오는 7월이면 임의탈퇴 처분이 해제된다. kt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지만 야구 잘하는 선수가 실의에 빠져 힘들게 지내는 모습을 보기가 안타까웠다. 처음엔 내가 손을 내밀었고, 지금은 내가 그 손을 꼭 잡고 있다. 왜냐하면 상현이가 날 살렸기 때문이다.”

    ▼살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구단 형편상 코치를 두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상현이가 배팅볼도 던져주고, 타격 코치도 하면서 때론 투수들 투구 폼도 봐준다. 웨이트트레이닝에 대한 노하우도 알려주고, 선수로서 주의해야 할 부분도 꼼꼼히 체크해준다. 상현이의 헌신적인 노력이 16명의 어린 선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앞으로 안지만, 임태훈 등도 우리 팀으로 데려올 것이다.”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을 것 같다.
    “안다. 그 또한 충분히 감수할 생각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나. 실수로 벌어진 일들이었고, 잘못을 저지른 대가를 치렀다면 그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KBO리그는 야구 잘하는 선수들만 위한 시스템을 발전시켰지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선수들의 복귀 프로그램엔 무관심하다. 죗값을 치르고 돌아오고 싶어 하는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냥 야구계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능사인가. 그런 물음표를 갖고 내가 총대를 멘 것이다.”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인터뷰하면서 줄곧 ‘어려운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앞장서고 싶다. 나도 때로는 쉽게 쉽게 살고 싶기도 하다. 내가 뭐라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나. 대통령도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런데 야구를 떠올리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선수 생활하면서 후회되는 일 한 가지를 꼽는다면?
    “2004년 삼성에서 자진해서 나왔을 때다. 그때 내가 계속 삼성에 있었더라면 선동열 감독이 부임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기회를 얻고자 SK로 갔던 게 결국엔 방출로 이어졌고, 미국 여정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1997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약간 건방을 떨었다. 그때 도루 기록이 33개였다. 왜 33개였는지 아나. 내 백넘버가 33번이어서 그 숫자에 맞췄다. 40개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았다. 40개 도루를 달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음 시즌에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그 기회는 내게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선수 은퇴 전이나 은퇴 후나 최익성은 여전히 ‘저니맨’으로 살고 있었다. 여전히 싱글인 그는 결혼 얘기를 꺼내는 기자에게 “이런 내게 시집올 여자가 누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2년 전 홀어머니를 여의고 오랫동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던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가진 기자와의 술자리에서 속내를 드러내며 ‘야구愛’를 표현했다. 뚝심과 의지, 강단으로 대변되는 그의 인생은 어려운 길 속에서 더욱 빛나는 듯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최익성에게 진심을 담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