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간 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슬픔과 기쁨이 왈츠 선율로 흘렀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애수

  • 이종수|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입력2017-05-18 17: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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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유학 첫날부터 도나우 강과 불가사의한 인연이 이어졌다. 도나우 강가 시골마을에서 병원실습을 했고, 간염에 걸린 뒤 강변 요양원에서 휴양을 했다. 간 이식 아이디어를 얻은 곳도 도나우 강가였다. 그곳에서 고통과 행복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독일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라인 강은 유럽 대륙의 남에서 북으로 1320km를 유장하게 흘러간다. 5세기까지는 로마와 게르만의 경계였고, 중세기부터 700년 넘게 독일과 프랑스 양국 분쟁의 원천이었다. 스위스 동북부에 있는 토마 호수에서 발원한 라인 강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북해로 흘러들어간다.



    도나우 강의 첫인상

    독일 땅과 연결되는 또 다른 큰 강인 도나우(Donau)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한국에선 영어식 이름인 다뉴브(Danube) 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강은 독일 서남부에 있는 국립공원인 흑림(슈바르츠발트)에서 발원해 9개국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2880km로 라인 강의 2배가 넘는다. 독일인은 라인 강을 “아버지 라인 강”이라고 자부하며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지만 도나우 강에 대해서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도나우 강은 유럽의 라틴·슬라브·게르만 족들 사이 끝없는 전란의 현장이었고, 수백 년에 걸친 아시아 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면서도 왈츠와 집시 음률처럼 수천 년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내가 도나우 강과 최초로 접한 것은 소학교 시절이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가 1880년에 작곡한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라는 감상적인 선율에 맞추어 그 강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흘러가는 강물의 잔물결을 눈에 그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린 것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느리게 시작하는 침울한 음률이 갑자기 템포를 빨리하며 잔물결이 바람에 요동치는 듯할 때면 나의 꿈은 날개를 달아 그 율동에 맞추어 푸른 하늘 높이 환상 속 공간으로 끝없이 날아갔다.

    이 동화 속 강을 독일 유학생활 첫날 운명적으로 보게 됐다. 1959년 3월 27일 서울을 떠난 나는 프로펠러 여객기의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3월 29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역 앞의 아이펠러호프 호텔에서 1박하고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동남부 도나우 강가의 도시 레겐스부르크로 갔다. 뉘른베르크를 지나 도나우 강가를 달리자 연한 녹색의 관목이 잔잔한 강물에 비쳐 참 부드러운 수채화 같은 인상을 풍겼다.



    나는 레겐스부르크에 살고 있는 한 독일인 가족을 방문했다. 6·25전쟁 후 한국에 나와 있는 독일인 뮐러 씨의 부탁을 받고 그 부모를 만났다. 다음 날 나는 뮐러 씨 가족의 안내를 받아 레겐스부르크 주변을 관광했다. 로마시대에 형성된 도시인데, 로마는 기원전 74년부터 400년간 도나우 강 전역을 지배한 유일한 나라다.



    바이에른의 자랑 발할라

    이 방문에서 내 기억에 남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강에서 약 50m 떨어져 있는 고딕 양식 대성당이다. 이곳은 오스트리아 빈의 소년합창단 못지않은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참새’라는 소년합창단으로 유명했다. 그 성당에서 강가로 나가면 작은 집을 절반으로 잘라서 세워놓은 것같이 보이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지붕에서 하루 종일 연기가 솟아오른다. 이곳이 레겐스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소시지 집’이다. 몇 백 년은 됐다고 했다. 그곳에서 점심 겸 그 유명한 소시지를 먹었다. 직경 1.5cm에 길이 15cm 정도의 이 도시 고유의 소시지를 숯불에 구운 것이다. 독일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는 음식은 소시지와 빵인데 그 종류만도 각각 300가지 이상이라고 한다.

    소시지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이다. 돼지의 중요한 부분을 떼고 나머지 고기찌꺼기를 비계 등과 함께 갈아서 양념한 뒤 돼지 창자에 넣어 만든다. 우리나라 순대를 연상케 한다. 이 레겐스부르크의 ‘역사적 소시지 집’에서는 소시지를 낼 때 반드시 사우어크라우트를 곁들인다.

    사우어크라우트는 김치와 같은 발효식품인데 양배추로 만든다. 옛날에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는 양배추를 많이 재배했다. 추운 겨울에 먹기 위해 이 양배추를 잘게 썰어서 소금으로 간을 해 발효시켰다. 이것을 보통 겨울철에 꺼내 먹는데 레겐스부르크의 소시지 집에서는 이것을 삶아서 소시지와 같이 주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월동준비는 다 같은 방법으로 한 셈이다. 사우어크라우트란 말은 신맛 나는 양배추란 뜻이다. 나는 소시지를 사우어크라우트와 같이 씹을 때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소시지 집 창 너머로 도나우 강의 돌다리가 웅장하게 보였다. 이것은 도나우 강 전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석조다리다. 1134년에 완공됐으니 역사가 873년에 달하지만 아주 안전해서 지금도 자동차가 다니고 있다. 그 옛날 이 지역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레겐스부르크 남쪽으로 약 20km 지점 강의 좌안에 있는 도나우스타우프 마을에서 ‘발할라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산 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건축양식으로 건립됐다.

    “이것이 우리가, 특히 바이에른 주의 시민이 자랑하는 발할라입니다. 유명한 독일인, 또 역사에 빛나는 게르만족의 흉상과 기념비가 정계, 학계, 예술계, 군인을 막론하고 들어 있어요.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가 1842년 완성한 기념관이지요.”


    치통과 그리움이 겹쳐

    뮐러 씨는 독일 민족은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우수한 민족이란 점을 의기양양하게 강조했다. 나는 독일 생활 첫날 이 시골 노인의 얼굴에서 강한 민족주의를 엿볼 수 있었다. 이 기념관에는 192명의 기념비와 흉상이 전시돼 있다고 했다. 기념관 입구에는 ‘조국의 명예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이 건물 앞의 언덕에 앉아 오후의 햇빛에 번쩍이며 굴곡을 이루고 흐르는 폭넓은 도나우 강과 그 유역의 비옥한 들을 바라보며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생각했다. 그런데 뮐러 씨는 “저기 봐요. 저 도나우는 푸른 도나우가 아니라 초록과 황토가 섞인 도나우예요”라며 웃었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해 가득 찬 강물은 강의 우안과 좌안에 부딪히며 왈츠의 멜로디에 맞춰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들판에 수많은 전쟁의 역사가 숨어 있고 피의 자취를 남겨놓은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묵게 될 뮐러 씨 집 탁자 위에 큰 옹기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그 대야 안의 꽃병보다 큰 옹기단지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곁에는 수건 하나와 비누, 그리고 손수건보다 작은 옷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옷 입기 전에 이 물로 몸을 씻으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화장실에 가서 한국식으로 손 씻는 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로마에 와서 로마법을 모른다고 집주인은 웃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목욕실에 화장실 변기가 있지만 당시는 욕실에 욕조를 갖추고 있는 독일 가정이 아주 드물었다. 특히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나의 침실에 놓인 물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집주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치아가 아프기 시작했다. 독일 생활 이틀째 나는 고통 속에서 아침 해를 맞이했다. 나는 집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나는 산책을 가겠다고 그 집을 나와 도나우 강가로 갔다. 화창한 날씨에 강기슭의 보리밭에 주저앉아 수평선 위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난생처음으로 타국 멀리 날아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향의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에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도나우 강가에서 왈츠곡에 맞춰 즐겁게 몸을 흔들어야 할 내가 타향의 애수 속에 치통의 아픔을 참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나우 강가에서 요양

    뒤셀도르프의 하인리히하이네 대학교 의과대학에 등록을 끝내고 공부에 여념이 없던 나는 1961년 4월초 다시 도나우 강을 찾았다. 첫 번째 방문한 날로부터 2년 후였다. 나는 B형 간염 때문에 1960년에 근 1년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나 몸이 너무 허약해졌다. 그 상태로는 학업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학 당국과 의료보험공단이 서둘러 나를 이 도나우 강가로 4주 요양을 보냈다.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내가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은 것이다.

    뒤셀도르프에서 밤차를 탄 나는 1959년 3월 말에 찾아왔던 레겐스부르크에서 강 하류 쪽으로 약 30분 더 내려가 데겐도르프 시에 도착했다. 아침 햇살 속에 도나우 강 유역의 넓은 들에는 노란색 민들레꽃이 푸른색 풀밭 속에서 바둑판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역에 내리자 내가 4주 요양할 니더알티이흐 수도원에서 수사 두 명이 차를 가지고 나왔다.

    “닥터 리(의대에 다니고 있어 아직 의사가 못 됐어도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분도회 소속인데 요양 차 온 사람이 많습니다. 도나우 강가의 아주 조용한 곳이에요. 푹 쉬고 건강을 회복하세요.”

    자동차로 약 10분 달리니 수도원이 나왔다. 길이가 아주 긴 이층집 위에 급경사의 높은  지붕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여러 층의 창문이 새집처럼 달려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5층 건물이었다. 긴 수도원의 건물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몇 백 년 된 고목엔 초록색 싹이 봄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4층 다락방으로 안내받아 짐을 풀었다. 소박한 침대에 옷장 하나,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세면대가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이 수도원에 약 20가구의 작은 마을이 인접해 있고 그 마을 옆을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인연

    이 수도원은 당시 우나산타(Una Santa)운동, 즉 여러 종파로 나누어진 기독교를 합병하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 비잔틴교파인 희랍정교 미사, 루터교의 예배 등을 각각 작은 성당과 예배당에서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요양 온 사람들은 자기 교파와 무관하게 아침마다 미사 또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레고리안 양식의 미사성가를 들을 수 있었다. 빵 굽는 사람이 쓰는 것과 같은 형태의 검은 모자를 쓰고 길고 숱 많은 수염을 단 이들이 부르는 성가는 러시아 볼가 강의 뱃노래를 상기시키면서 아침마다 나를 끌어당겼다. 식사는 환자의 질병에 따라 식단이 정해져 있어 간 환자인 나의 식탁에는 고단백 식품이 쌓여 있었다. 식사시간 외에는 산책을 하든 독서를 하든 자유였다.

    첫 주에 나는 식사만 끝나면 도나우 강둑에 담요를 펴놓고 아직도 써늘한 공기를 호흡하며 강물을 바라보거나 민들레 꽃잎을 하나씩 강물에 띄워보기도 했다. 내가 환자의 몸으로 독일의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 요양 와 있지만 학업을 지속해야 할 시간에 공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상처가 적지 않았다. 도나우 강의 애수에 젖어 해를 쳐다보며 날을 보내면서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점심 식사하러 수도원에 가고 해가 수평선에 가까워지면 저녁을 먹으러 수도원에 들어갔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초조한 나날이었다. 4월 말의 강물은 눈 녹은 물이라 비교적 차가워서 내 감각은 위축됐고, 도나우의 왈츠 멜로디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2주가 지난 뒤 요양을 중지하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특히 만학이기에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시켜야 했지만 그저 놀고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내가 의학을 공부한 뒤셀도르프는 라인 강 하류 루르공업지대 입구에 있는 도시다. 이 도시는 당시 인구 1500만이 넘는 서부독일의 가장 큰 주(州)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수도였으며 루르공업지대 회사 사장들이 살고 있는 도시다. 이 지역의 라인 강은 유속이 빠르며 화물선의 왕래가 많아 활기를 보였다.

    라인 강 권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도나우 강과 불가사의한 인연이 많았다. 1961년 4월 수도원의 요양을 중지하고 대학으로 돌아온 나는 여름학기가 끝나자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휴가 중임에도 국가시험 자격을 얻기 위해 병원실습을 나가야 했다. 여름학기가 끝날 무렵 4월에 요양 갔던 니더알타이흐 수도원 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나우 강가 시골에서 병원실습

    “닥터 리, 하기휴가 중 병원실습 나가게 되면 내가 병원을 소개해드리겠어요. 독일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입니다만 조용한 시골이니 건강도 돌볼 겸 휴양도 할 겸 가보세요. 인심도 좋은 곳입니다.”

    일주일 후에 ‘바이에릿시발트’란 시골 군립병원에서 8월 1일자로 실습을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지도를 보니 도나우 강이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국경도시 파사우 시 인근이었다. 도나우 강은 나를 끌어들이는 인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해 7월 31일 나는 도나우 강을 따라 최초로 가본 도시 레겐스부르크를, 그리고 요양 갔던 데겐도르프를 지나 파사우 역에서 내렸다. 파사우란 세관이란 뜻이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는 선박에서 관세를 받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바이에릿시발트로 가는 석탄연기 내품는 시골 기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 파사우 시 동북쪽으로 갔다. 발트키르헨이란 작은 면 소재지가 나왔다. 여기는 당시 공산권인 체코와의 국경에 인접한 곳이다.

    시골역은 한산했다. 기차에서 2~3명의 승객이 내릴 뿐이었다. 내가 내리자 좌우에 하얀 날개가 달린 수녀모자 속에 얼굴을 감춘 프란체스카회 소속의 수녀가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왔다. 당시 독일은 시공립병원이건 종교계통 병원이건 여러 수녀단체가 병원 전체의 간호를 맡고 있는 곳이 적지 않았다. 발트키르헨 군립병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상 100개의 병원이었고 의사 한 분이 내과와 외과를 겸한 총책임자였으며 동시에 의료원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그곳에 온 젊은 의사 한 사람이 돕고 있었다. 이는 당시 독일의 형용키 어려운 의사 부족 상태를 보여준다.

    나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병원에서나 마을에서나 “헤어 독토 리”(이 박사님)라고 불렸다. 이 마을에서 나는 일약 유명한 의사로 등장했다. 이것은 중세부터 삼사(三師)가 마을에서 존경받아온 관습 때문이었다. 삼사는 목사, 교사, 의사를 말한다. 마을은 참으로 빈곤한 지역이었다.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옷차림도 허름했다. 병원의 간호 담당 수녀들은 자신들이 키운 닭이 낳은 날달걀을 바구니에 듬뿍 담아 아침 식탁에 올렸고, 들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점심 식탁에 내놓았다.

    이곳 사람들이 아주 심한 독일어 사투리를 사용하다 보니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과와 외과, 산부인과 구별 없이 산실에서 어린아이를 받고 수술도 하고 내과 환자의 질환도 치료했다. 시간이 나면 검사실에서 책을 읽어가며 혈액검사, 소변검사도 했다. 이것이 당시 독일 시골의 의료 사정이었다.

    나는 토요일이면 오후에 휴가를 받아 이 시골의 감옥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도나우 강가의 파사우 시로 갔다. 이것이 독일 생활에서 3번째 도나우 강 면접이다. 

    “독토 리! 파사우에 가면 언덕위의 성에 올라가 구시가지가 있는 삼각지대를 봐요. 그곳에서 3개의 강이 합류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파사우 대성당의 과거

    병원장은 나에게 그곳을 둘러보기를 권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려 시내관광버스를 타고 도나우 강 좌측의 높은 언덕 위 고성의 뜰에서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다.

    “여기가 도나우 강 시원으로부터 600km되는 곳입니다. 북쪽인 체코의 산에서 흘러오는 일스 강물은 저기 보시는 바와 같이 어두운 색이어요. 저 반대쪽인 남쪽에서 흘러오는 인 강물은 알프스 지방의 물이니 맑지요. 그리고 탁한 저 물이 도나우 강의 물입니다.”

    나는 거대한 도나우 강이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오는 하천의 물을 받아들이는 광경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도나우는 맑은 물도 검은 물도 받아들이며 탁한 강이 돼가는 것이다. 안내자는 우리를 구시가지에 있는 대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오늘날 이곳은 아주 조용한 성당입니다. 그러나 15세기 말까지는 이 파사우의 주교가 파사우 동쪽, 즉 도나우 강 하류 전역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이곳 주교는 이 지역을 지배한 영주이기도 해 그 힘이 막강했지요. 1273년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가(家) 루도르프 백작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이래 강대한 정치세력을 과시했어요. 그런데도 200년간은, 즉 15세기 후반에 빈의 주교가 독립할 때까지 파사우의 주교가 오스트리아 전체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답니다.”

    안내인은 흥미로운 파사우의 주교 이야기를 또 하나 들려주었다.

    “여러분, 오늘날 파사우 대성당과 주교는 힘이 약합니다만 서기 1000년에 마자르족이 건국한 헝가리 왕이 파사우의 필그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 슈테판(이슈도판이라고 함)으로 세례명을 받아 헝가리를 기독교화했습니다. 성 슈테판은 서기 1001년에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헝가리 왕관을 받았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던 나는 도나우 강 하류 방향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역사를 흥미롭게 들었다. 해가 수평선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관광안내자가 권하는 대로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 내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곡이 연주되고 손님들이 갑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대부분이 이 지방 농부들이었다.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선상에서 포도주 한잔 즐기며 한 주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산실 근무 중 쓰러지기도

    배는 파사우의 삼각주를 떠나 오스트리아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부두에 배치된 옛 모형의 대포들이 지난날 세관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람선 안내원은 달리는 도중 음악을 중지하고 3개의 강물이 합쳐진 광경을 설명한 뒤 지금 독일을 떠나 이웃나라 오스트리아로 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도나우 강 최상류에 위치한 한 나라를 이제 겨우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오스트리아의 도나우 강을 처음으로 접한 기회였다. 선상에서는 바이에른 지방의 2박자 민요와 알프스 요들이 술기운으로 고조된 농민들을 흥겹게 했고, 폴카 음악은 강물의 흐름에 맞춰 갑자기 왈츠로 바뀌기도 했다.

    간염 때문에 요양하고 온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기에 매일의 병원생활은 몹시 피곤했다. 수술 도중 식은땀이 나는가 하면 산실 근무 중 쓰러지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파사우 부둣가에서 도나우 강물에 비친 창백한 내 얼굴을 보고 미래에 대한 애수의 눈물방울을 강물 위에 떨어뜨려 둥근 원을 그려보았다. 인생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고 앞날에 대한 설계도 불가능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67년 여름 나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았다. 본에서 고속도로로 레겐스부르크를 거쳐 도나우 강변길을 따라 파사우까지 간 후 천천히 빈으로 향했다. 독일을 지나 오스트리아에 들어가면 강의 왼쪽에 숲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것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역 숲이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 린츠를 지나 강가의 길이 36번 도로와 교차되는 곳에서 입스 페어센보이그의 댐으로 잔잔히 차 있는 강물을 보며 조금 달리니 강의 오른쪽 언덕 위에 유명한 멜크 수도원이 보였다. 1730년에 완공된 이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황금색 건물이 푸른 하늘에 솟아올라 교회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수도원으로부터 크렘스 시까지의 짧은 구간이 도나우 2800km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디. 이곳을 사람들은 “바하우”라 한다. 바하우란 바헨(wachen), 즉 경계하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프랑크왕국의 카를 대제가 동쪽에서 침공해 온 적을 이곳에서 경계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왈츠 도시 빈에서 간 이식 아이디어

    나는 강의 좌안을 달리다가 뒤른슈타인 성안에 차를 멈추고 성의 강쪽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가지고 간 이 지역 역사 기록을 읽었다.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가 민족의 이동을 겪고 게르만족, 슬라브족 등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중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 쓰였다. 오스트리아 동쪽에 위치한 도나우 강 하류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거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오후 늦게 강 오른쪽의 석양을 바라보며 빈의 숲 속에 있는 칼렌베르크 쪽으로 차를 몰아 그곳 전망대에서 도나우 강 유역에 전개되는 빈 시가지와 그 속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해가 빈의 숲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카렌베르크 언덕의 중턱에 있는 그렌징 식당에서 아코디언 음률을 들으며 마시지도 못한 호이리게 잔만 식탁 위에 놓고 7월의 밤공기에 취했다. 호이리게는 미완숙의 신맛이 강한 빈의 독특한 포도주다. 빈에 간 손님은 반드시 시음해봐야 한다는데 당시 나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도나우 강가의 빈에서 개최된 국제학회에 참석해 간 이식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1년 후 나는 본대학병원의 400병상 외과에 근무하고 있는 100명 가까운 의사 중에서 간이식팀장 자리를 쟁취함으로써 유럽 대륙 최초로 간 이식 수술을 할 기회를 가졌고 간 분야를 평생 전공하게 됐다. 그로 인해 고국에 돌아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독일 땅에서 늙어갈수록 향수가 짙어가지만 하나님이 내게 준 길이었다고 여기고 오늘까지 그 운명을 감수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빈에서 만난 도나우 강은 나로 하여금 평생을 외국에서 방랑하는 집시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더욱 더 사라사테의 집시 선율 속을 헤매면서 오스트리아의 도나우에 증오를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명성을 얻었어도 민족주의가 강한 유럽에서 살다 보면 고국의 품이 손짓하는 것을 자주 느낀다.

    유럽을 공격한 아시아 민족은 전부 도나우 강을 따라서 왔다. 오스트리아 빈이 공격을 받으면 유럽 각국이 힘을 합해 기독교문화권 보호차원에서 아시아를 물리침으로써 빈은 기독교문화권 보호의 최전방 교두보 노릇을 해왔다. 그 예로 서기 1683년에 오스트리아 빈은 오스만튀르크군의 제2차 포위로 항복 위기에 놓였는데, 기독교 교도의 연합군에 의해 구제됐다. 그 반면 오스트리아의 도나우 강은 동서 문화교류의 매체 노릇을 해왔다.



    공산국가 헝가리의 도나우

    나는 빈을 방문할 때마다 커피를 즐긴다. 오페라극장 옆의 케른트너 스트라세와 성 슈테판 대성당 곁의 그라벤 스트라세에 유명 커피점이 줄지어 있다. 1683년 7월 14일 빈을 포위한 오스만튀르키군이 2개월여의 포위를 포기하고 9월 12일 후퇴하면서 남기고 간 것이 커피다. 그때까지 빈 사람들은 커피를 몰랐다. 그러니 빈의 커피 맛에는 300년 역사의 향이 돈다.

    오스트리아를 지난 도나우는 슬로바키아의 남부를 거치고 헝가리로 들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국경을 형성하고 헝가리 왕조 건국 초기의 수도였으며 헝가리 기독교의 총본부인 에스테르곰을 지나가자마자 이젠 북에서 남으로 직각을 이루며 흘러 세르비아로 들어간다. 여기가 유명한 도나우의 크니(Knie), 즉 독일어로 무릎이라고 불리는 관광명소다. 사람의 무릎처럼 직각으로 굽는다는 뜻이다. 

    내가 처음 헝가리 도나우 강을 본 것은 1971년 헝가리 정부 초청으로 세게트 의과대학에서 열린 학회에 강연차 갔을 때다. 기차여행이라 부타페스트 역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비교적 폭이 넓은 도나우 강을 볼 수 있었다. 당시 한국 국적 소지자인 나로서는 최초의 공산권 여행이라 불안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아직 복구되지 않은 도나우 강에서 왈츠와 낭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방국가에서 온 사람에 대한 규정이 엄해 종일토록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부다페스트를 종단하는 도나우 강을 바라본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독일 통일 이후, 즉 동서 양극체제가 붕괴된 후 나는 ‘도나우의 여왕’이라 불리는 부다페스트의 부다 쪽 왕궁 뜰에서 전쟁의 상처에서 완전히 복구된 아름답고 평화로운 테스트 쪽과 호수처럼 잔잔한 도나우 강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헝가리 출신 학자 가운데 나와 같이 고국을 떠나 독일에서 살고 있는 펠디 교수를 생각했다.


    서울 손님과 자동차 여행

    1970년대 초반 몇 년간 나는 간이식 연구 외에 간의 임파학에 대한 연구를 겸했다. 20세기 중반, 즉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의학에서 임파학이 나름대로 발달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셈멜바이스 의과대학 루스니아크 교수 일파의 임파학 연구가 당시 세계 의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제자인 펠디 교수가 독일로 망명 와 있었다. 그가 독일 임파학을 재건할 때 나도 그 연구에 가세했다. 따라서 이 펠디 교수를 통해 여러 헝가리 학자와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제약회사에서 연구 담당 책임자로 있으면서 내게 수년간 간임파학 연구에 쓰라고 많은 연구비를 보내주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술 한잔하면서 고국이 가까이 있어도 가보지 못하는 처지라 향수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 헝가리와 한국은 같은 점이 많아요. 우선 이름이 성의 뒤에 가는 것부터요. 나는 독일에서 미히엘 펠디라고 하는데 헝가리에서는 펠디 미히엘이라 해요. 한국도 종수이가 아니고 이종수이지요? 우리는 같은 뿌리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동사 밑에 돕는 단어가 붙어서 격변화하지요. 동사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같은 어족이에요.”

    2002년 가을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아는 분과 한잔하면서 농담으로 유럽에 놀러오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진담이 돼 두 쌍의 부부가 찾아왔다. 70이 넘은 고령에 병원 일은 밀려 있는데 술좌석에서 약속한 대로 내가 경비를 부담해 3000km 이상을 혼자 달리며 이분들을 안내했다.

    그런데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영웅광장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이동할 때였다. 내 차에 가까이 갔을 때 차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순간 차의 시동이 걸렸다. 열쇠는 내가 갖고 있는데 어떻게 시동이 걸렸을까 하고 나는 놀랐다. 대낮에 귀신이 나올 리 만무하다. 먼저 차의 뒤와 오른쪽에 두 사람이 조심조심 발소리 나지 않게 가까이 가고 차의 왼쪽 뒷문 옆에 내가 섰다. 내가 손을 들어 신호를 하자 그에 맞춰 다 같이 소리를 질렀는데, 그 순간 2m 가까운 거인이 차에서 튀어나와 쏜살같이 주차장 곁 대로를 횡단하며 달아났다. 시속 100km는 될 듯 싶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삭발한 칭기즈칸 후예 같은 인상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망가는 도둑의 자취가 보이지 않자 차 안을 검사했는데, 그가 직접 만든 열쇠를 열쇠구멍에 강제로 넣어 시동을 걸었던 것이다.

    우리가 1분만 늦게 그곳에 도착했어도 자동차는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의 심장은 빠른 속도로 뛰고, 혈압은 천장까지 올라갔다. 차의 열쇠구멍이 손상돼 차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음 날 독일로 돌아갈 일이 걱정됐다.



    ‘황소의 피’와 집시 음악

    우선 부다페스트의 벤츠 특약점에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도 독일어가 통했다. 견인차를 보내서 두 시간 내에 임시방편으로 열쇠를 만들어줄 테니 독일로 가서 자동차보험회사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수리하라고 했다. 다음 날 이 차로 출발할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차를 수리 공장에 맡기고 그 와중에도 관광을 완결해야 하니 택시를 타고 성 이슈트방 대성당을 관광했고, 사람들 틈새로 헝가리 초대 왕 이슈트방(슈테판)의 손 미라를 바라봤다. 그럼에도 일행의 분위기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주헝가리 한국대사관의 도움으로 도나우 강 속의 마르키트 섬에 있는 호텔 테르말에서 묵었다. 정신적 피로를 진정시키려고 우리는 집시 악단이 연주하는 인근 라마다그랜드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이날의 돌발사고를 잊어버리려고 몇 잔의 ‘황소의 피’(헝가리 에게르 지방의 유명한 붉은 포도주 비카베르)를 연거푸 들이켰다. 이 비카베르는 내가 1974년에 폴란드 과학원장 초청으로 바르샤바에 갔을 때 시음했는데, 당시 공산권 전역에서 유명한 포도주였다. 비카베르에 집시음악은 헝가리 밤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진미다. 집시 악단의 단장을 불러 10달러짜리 몇 장을 호주머니에 넣어주고 먼저 스페인의 사라사테가 1878년에 작곡한 집시 선율 ‘치고이너바이젠’을 주문했다. 대머리가 번쩍이고 양 눈이 자동차 라이트처럼 큰 악단의 단장은 우리 테이블 곁에 와서 바이올린의 줄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켜며 침울해하던 내게 에너지를 채워줬다.

    집시는 이어 내가 중학생 때 애수에 젖어 부르던 ‘집시의 달’을 연주했다. ‘달이여 집시의 달이여(moon of love, romantic gypsy moon)’ 하는 곡이 터져 나오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3000km 길을 달려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브람스가 1869년에 집시음악을 편곡한 ‘헝가리무곡’이 연주됐다. 제5번은 내가 즐겨 듣기에 먼저 주문했고, 제1번으로 이어졌다. 집시가 물러가자 단상에선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가 흘러나왔다.

    일행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피아노 리듬이 빨라지자 생기를 되찾고 다음 날의 출발을 마음으로 준비했다. ‘오늘의 고뇌는 오늘에 족하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고 ‘내가 뿌린 씨는 내가 거두어야 한다’라고 자위했다.

    호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나우 강의 밤물결에 부다 쪽의 조명이 반사되는 것을 보자 애절한 집시 음률과 낮의 사고가 애수를 더욱 짙게 했다. ‘황소의 피’는 내 머리를 마취시켜가고 있었다.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고 꿈속에서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이니 어느 땐가 도나우 강에서의 환희를 기대할 수 있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종수
    ● 1929년생

    ●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 저서: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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