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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판 실미도 부대’ 요원, 11차례 휴전선 넘어 특수임무 수행했다”

미군, 휴전 후 대북침투부대 운용했다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나는 ‘미국판 실미도 부대’ 요원, 11차례 휴전선 넘어 특수임무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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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잣대로 이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선 1950년대에는 미군을 포함해 누구도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대북 첩보작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또한 전쟁을 진두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극동사령부는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최고지도부였기 때문에 파견이나 차출 등의 지휘체계 문제도 지금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이를 지금 상황에 비추어 비판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전후 첩보보고 176건

뜻밖이었던 것은 국방부 자료에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03년 12월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에 따르면, 전쟁기간에 미군이 운영했던 KLO 첩보대는 거의 해산되었지만 비하이브(Beehive), 무스(Moose), 캐멀(Camel) 팀 등은 1954년 2월부터 북한에 투하되어 11번의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수의 대원들이 미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미 중앙정보부(CIA) 또한 1954년 1월 새로운 대북 첩보기구를 창설해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쟁 이후 계속된 대북 침투요원들의 첩보보고가 모두 176건에 달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씨가 활동했다는 부대는 과연 어떻게 구성됐을까.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미군 관계자들을 접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 전우회와 연구회 등을 통해 어렵사리 1950년대 후반 미군의 대북 정보업무 최일선 부대였던 공군 6006 항공정보대(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AISS)와 8군 관계자들, 이들을 지휘한 극동사령부의 정보부대 퇴역장교들을 수소문할 수 있었다.

전화와 e메일을 통해 이들에게 사실을 확인해달라는 인터뷰를 시도했다. 마감을 앞둔 3월 중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6006 AISS와 그 후신인 4499부대에서 근무했으며 퇴역 후 미군의 정보활동에 관해 몇 권의 저술을 남기기도 한 미군 퇴역장교가 보낸 메일이었다. 이후 몇 차례 오간 전화와 메일을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했다.



“전쟁 이전부터 한국에서 대북 첩보업무를 총괄한 사람은 도널드 니컬스 대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조언자이기도 했던 그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국군을 차출해 부대원으로 활용하거나 하위부대를 조직해 대북 첩보업무를 수행하도록 설계했다. KLO 등 미군이 관리한 한국인 첩보부대는 실질적으로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휴전 후에는 한국군이 대북 첩보부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훈련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그의 평판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한국정치에 개입하려 하거나 월권을 행사하고 정보를 독점한다는 이야기였다. 불법행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1956년부터 위상이 흔들렸고, 급기야 1957년 11월 본국으로 소환되어 장기간의 조사를 받은 끝에 이듬해 봄 퇴역했다.

1956~57년의 ‘새로운 시도’

1956~57년은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시기였다. 니컬스 대령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기존의 대북 첩보 시스템을 재편하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나와 있던 극동사령부 G2의 예하부대인 6006 AISS가 오산의 4499부대로 재편되면서, 그간 이 부대가 독자적으로 수행하던 대북 첩보업무 일부를 일본에 있던 사령부가 직접 수행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북한에서 활동이 가능한 한국군 요원을 직접 훈련시켜 대북 침투임무를 수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우선 북한의 대공경계망과 내부 경비가 강화됨에 따라 희생이 만만치 않았고, 한국군으로부터 인원을 파견받는 문제도 깔끔하지 못했다고(비공식적인 파견이었다는 뜻인 듯) 들었다. 더욱이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미군이 휴전 후에도 대북 침투임무를 직접 다룬다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미군기가 북한지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요원을 공수해 침투시키는 식의 작전은 매우 위험했다. 반면 한국군은 1960년대 들어 체계를 갖춰갔고 항공기를 제외한 다양한 경로로 북한에 침투하는 독자적인 첩보부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 후 미군이 자체적으로 대북 첩보부대를 운용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이 말한 경우는 1957년에 시도된 독자적인 부대 운용의 한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 침투경로와 퇴로의 구성, 조 편성과 훈련기간 등의 내용은 상당부분 당시 미군의 대북 첩보부대 운용 스타일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부대 운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나로서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임무 등이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은 여기까지다.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미군이 운용하던 대북 첩보부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이제교씨의 회고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 타당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대북 첩보부대 활동 같은 기밀사항을 형사사건 재판기록처럼 낱낱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싶었다. 그러한 이유로 작전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남지 않게 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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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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