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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내기 시인 최영미가 재발견한 서울 이야기 - 마지막 회

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 최영미│ ymchoi30@hotmail.com│

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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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타벅스가 점령한 거리가 부끄럽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우아한 실내. 외부는 한옥이지만 안에 들어오면 서양냄새가 나는, 술집으로 부를지 찻집으로 불러야 할지 애매한 그곳은 메뉴에서도 동서양이 혼합된 소위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녹차와 데킬라, 새우가 들어간 해산물도리아가 나의 단골메뉴였다. 앙증맞은 데킬라 잔에 소금을 바르며, 나는 세계시민이 되는 의식을 치렀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 술을 시켰는데 왜 소금이 나올까? 의아해 하는 내게 선인장으로 만든 멕시코 전통주를 제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던 그가 누구인지. 내 옆에 앉아있던 그의 얼굴도 이름도 잊었지만, 알코올에 녹아든 소금의 찝찔한 맛을 내 혀는 지금도 기억한다. 호기심에 한두 번 시도했지만, 깔끔한 맛을 선호하는 나는 다음부터는 내 술잔을 소금으로 더럽히지 않았다. 이탈리아어인지 스페인어인지 모르지만 ‘도리아’라는 이름의 서양음식이 있다는 것도 거기서 처음 알았다. 서양음식을 (구경할 기회가 없어) 즐기지 않던 내가 치즈에 버무린 밥에 익숙해지며, 1980년대에 갇혀있던 입맛이 현대화 국제화된 것도 ‘볼가’의 덕이다.

내가 그곳에 자주 출입하던 등단 무렵, 1990년대 초에 서울에서 ‘해산물도리아’를 파는 레스토랑이 드물었다. 오래된 레코드판, 구식 다이얼 전화기. 그리고 벽에 걸린 옛날 영화포스터.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다.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처럼 우울하고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노래들. 팝과 재즈와 클래식의 명곡들이 번갈아 나와 지루하지 않았다. 의자가 푹신하고 장식이 과하지 않은 실내, 그리 크지 않지만 편안한 공간. 저녁에 여럿이 어울려도 술맛이 나는 세련된 분위기. 아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나처럼 가난한 문인의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한, 늦은 오후에 호젓이 앉아 점심을 때우기에 딱 알맞은 식당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메뉴이지만 음식도 괜찮고 값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Volga’ 라는 러시아식 이름도 향수를 자극했다. 서양사를 공부한 내가 볼가 강변에서 해산물도리아를 포크로 찍어 먹는 모습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소개한 밥집은 다 입맛에 맞았다

고기가 당기는 날은 수도약국 뒤의 사동면옥에서 설렁탕을 먹었다. 뜨거운 국물을 살살 식혀 숟갈로 떠먹으며 나는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언제던가, 월드베이스볼 대회 뒤에 아버지와 여기에서 만나, 설렁탕을 먹으며 신나게 야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좌투수의 공을 좌타자들이 왜 못 치는지, 커브와 슬라이드가 어떻게 다른지…. 나의 끝없는 질문에 즐겁게 답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나는 알았다. 내가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부녀는 닮았다. 내 몸에는 운동선수의 피가 흐른다.

광복 후 처음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해 역도와 해머던지기에서 메달을 땄던 당신의 영향으로 나는 어려서부터 온갖 놀이와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다. 고교시절에 한때 나는 농구선수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야구와 축구의 기본 규칙을 아버지로부터 처음 배웠다. 여고 1학년 여름이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인 당신의 딸이 고교야구에 빠져 라디오를 끼고 사는 걸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내 또래의 여자애에게 허락된 거의 모든 스포츠를 섭렵하며 나는 자랐다. 식탐이 심한 나는 운동에도 욕심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형편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는 내가 사달라고 조르는 운동기구를 사주었다. 어머니는 굶더라도 딸은 여름에도 실내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즐겼고, 수영복을 입고 각선미를 뽐내는 흑백사진이 유년의 앨범에 자랑스레 꽂혀 있다. 영양부족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간, 비쩍 마른 엄마와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 사진들을 내가 버리지 못하는 한, 나는 당신들의 희생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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