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박근혜 ‘인혁당 인식’, 민주주의 기본도 몰라” “치명적 재앙 부를 ‘이명박 운하’ 폐기해야”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7-03-08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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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패망 없었다면 ‘인혁당 사형’ 없었을 것
    • 긴급조치 유죄판결 판사들, 자리에서 물러나야
    •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법을 웃음거리로 만든 것
    • 北 인도적 지원해도 핵에는 단호히 대처했어야
    • 양 극단 배제한 중도(中道)로 갈등의 시대 들어올려야
    • 내가 투쟁현장에서 벗어난 건 ‘변절’ 아닌 ‘복귀’
    • 내가 꿈꾼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문화혁명
    • 경제학 기초도 모르는 여권, 워낙 상식 밖의 짓을 하니…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그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남은 마지막

    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김지하, ‘1974년 1월’ 전문


    인터뷰가 끝난 후 김지하(金芝河·66) 시인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무지하게 말 많이 했지요? 이렇게 말 안하는데….”

    누군가에게 많은 얘기를 하고 나면 허전한 법. 그 공허함이 기자에게 고스란히 밀려왔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인터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많은 얘기를 했다. 인터뷰 계기가 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출발한 대화는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방면으로 옮겨갔다. 현실정치에 대해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여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명박 박근혜 등 유력 대선후보들에 대한 평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뜻밖이었다.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2월8일 그를 만나러 경기도 일산으로 가는 동안 시대의 혼돈처럼 안개비가 내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밥’ ‘대설 남(南)’ ‘생명’ 등 오래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이 기억의 저편에서 꼬물거렸다. 이미 한 시대의 전설이 된 그에게는 시인, 투사, 사상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1970년대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유신정권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그는 1980년대 이후 생명운동을 주창하면서 사상가로 거듭났다.

    그가 사는 오피스텔은 대로변에 있었다. 거주한 지 4~5년 됐다고 한다. 시인이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니…. 왠지 어색하다. “불편하지 않냐”고 묻자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외국 기자들이 그러더군. 조그만 채마밭 딸린 데서 사는 줄 알았다고. 내가 원래 그런 데를 좋아하긴 하죠. 해남에 내려가 있을 때는 그런 집에서 살았죠. 그런데 큰 도시에 올라오니 단독주택에 살기가 어려워요.”

    그는 말을 할 때 눈살을 찌푸리는 습관이 있었다. 숯덩이 같은 눈썹에서 발산되는 거칠고 강인한 기운을 온화한 눈빛과 여유로운 말투가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늙는다. 시인도 투사도,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시간은 어느덧 그를 삶의 내리막길로 이끌고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꾸 외롭고 쓸쓸해져요. 아, 그래서 자식을 낳는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자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자식이 있다는 것에서 내 생명이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자식한테 무슨 도움을 받는다든가 하는 차원을 떠나…. 나이 들수록 생명이 무엇인가, 시간이 무엇인가 자꾸 생각하게 돼요. 젊은 시절의 용기도 사라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그래선지 요즘 평론가들이 내 시에 외롭다는 표현이 많다고 지적해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자취는 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젊은 시절엔 그저 살다 가면 그만이지 생각했는데, 나이 드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훤칠한 처녀가 자꾸 울어”

    강물처럼 흘러가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과거라 부른다. 최근 법원의 재심 판결로 화제가 된 인혁당 사건은 과거가 뭔지 역사가 뭔지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32년 전에 사형당한 사람들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시간의 부질없음, 삶의 덧없음, 역사의 허망함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일전에 영남대에서 강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키가 무지 큰 여자가 자꾸 울더라고. 왜 우냐고 물으니 하재완씨 딸이라고 해요. 세월이 30여 년 흘렀는데 참, 가슴이 아프다고 하기도 뭣하고…. 훤칠한 처녀가 자꾸 그렇게 울더라고.”

    그가 인혁당 사건을 회고하면서 꺼낸 일화다. 하재완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혁당 사형수 8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사건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과 구분해 2차 인혁당 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린다.

    김 시인도 이 사건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인혁당 사건과 ‘형제 관계’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74년 4월 중앙정보부는 학원가 반(反)체제조직이라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배후로 북한과 연계됐다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대구·경북 지역의 혁신계 인사들이 1964년에 적발돼 와해됐던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유신반대 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청학련의 상부조직이 인혁당이라는 얘기였다.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은 253명에 이른다.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혐의였다. 1, 2심은 군사재판(비상군법회의)이었다. 인혁당과 관련해 기소된 사람은 모두 23명. 그중 8명에 대해 사형선고가 확정됐다. 민청학련 관련자들도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모두 감형되거나 무죄로 석방됐다.

    김 시인의 경우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당시 민청학련 주모자급으로 기소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75년 2월 대부분의 민청학련 관련자와 함께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하지만 석방 직후 ‘동아일보’에 ‘고행…1974’라는 옥중수기를 실었다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재구속돼 198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날 때까지 6년간 복역했다.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1975년 2월,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던 김지하 시인이 출감하자 동료와 가족들이 무동을 태워 교도소 앞을 돌고 있다.

    “너희들, 절대 사형 안 시킨다”

    김 시인은 지난해 9월 인혁당 사건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의 길이 열린 것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하면서다. 2005년 12월 국정원 진실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았던 단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지난해 3월 첫 재심 공판이 열렸다. 지난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문용선)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8명에 대해 수사기관의 조작, 고문 등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시인은 당시 구치소에서 인혁당 관련자인 하재완, 이수병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사건이 조작됐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하재완씨한테는 두 번 들었어요. 구치소에서 내가 위층에 있었고 하재완씨가 아래층에 있었어요. 나는 그때 하씨를 몰랐어요. 그런데 자꾸 내 이름을 부르며 통방(通房)을 시도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 물으니 인혁당 관련자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거예요. 그 후 구치소 복도에서 진찰받을 때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어요. 고문으로 내장이 파열됐다는 거예요. 장이 파열될 정도면 아주 심한 고문이거든요. 하재완씨 말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정치 문제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학생들 때문에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너희들 절대 사형 안 시킨다’고.”

    그가 사건이 조작됐다고 판단한 또 하나의 근거는 이른바 공작금이었다. 당시 정보부는 인혁당이 민청학련의 상부조직이라는 유력한 근거로 공작금을 내세웠다.

    “여정남씨는 하재완씨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던 사람입니다. 경북대 운동권 출신인데 이 사람이 서울대생 이철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2500원을 줬는데, 이게 공작금이라는 거예요. 조직의 상부와 하부는 자금으로 연결되잖아요. 그런데 교통비밖에 안 되는 2500원을 공작금으로 줬다는 게 말이 돼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구나 싶었죠.”

    김 시인에 따르면 인혁당 재건위는 정보부가 만들어낸 단체지만, 민청학련은 어느 정도 실체가 있는 조직이었다.

    “유인태, 이철, 서중석, 나병식, 김병곤 등이 주축이었지요. 그렇지만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무슨 어마어마한 체계와 조직계보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전국 각 대학에서 반유신 데모를 연합해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이었죠.”

    당시 반유신 투쟁을 벌이던 민주인사들 사이에서는 대학가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주세력을 결집해 총궐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무슨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를 전복하자는 게 아니라 헌정질서를 회복하자는 게 목표였다”고 한다.

    당시 가톨릭에 몸담고 있던 김 시인이 원주의 지학순 주교로부터 200여만원을 받아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대학가(서중석, 유인태)와 기독교(나병식)측에 투쟁자금으로 전달한 것도 그러한 민주세력 통합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도 박형규 목사를 통해 30만원이 전달됐다.

    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김 시인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조사받은 지 닷새째 되는 날 민청학련을 인혁당과 연결하려는 정보부의 공작을 간파하고 이를 저지할 속셈으로 가톨릭측으로부터 돈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정보부는 인혁당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여정남을 이철과 유인태에게 공작금(2500원)을 줬다는 이유로 하재완과 더불어 인혁당 재건위 조직원으로 규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가톨릭 돈을 받아 학생들에게 투쟁자금으로 전달했다는 김 시인의 진술이 나오자 정보부는 부득이 수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종교계와 정계 인사가 민청학련의 상부선(上部線)이 됐고, 인혁당의 역할은 중간에 개입한 정도로 축소됐다.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2003년 6월8일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지하 시인.

    ‘슬라이딩 태클’ 전술

    “공작금이 한쪽은 200여만원이고 한쪽은 2500원이에요. 도대체 비교가 안 되잖아요. 내가 돈 받은 사실을 실토한 것은 가톨릭, 개신교, 야당을 물고 들어가기 위해서였어요. 가톨릭이 일어나면 개신교와 불교도 일어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죠.”

    김 시인을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이른바 ‘슬라이딩 태클’ 전술을 구사했다.

    “말 그대로 ‘발 걸어 같이 자빠지자’는 뜻이죠. 잡히는 대로 혐의사실을 불어버려 피해범위를 확대하자는 작전이었어요. 우리 진술 때문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본 사람은 다 반유신 활동가로 나설 거라는 계산이었죠.”

    김 시인에 따르면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사형집행은 베트남 공산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두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75년 4월9일이고, 베트남이 최종 패망한 것은 그해 4월30일이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정부도 다 풀려고 했어요. 분위기가 그랬어요. 자기들 잘못을 시인했죠. 사건이 애초 자기들이 구상한 대로 안 되고 잡탕이 됐거든요. 그런데 베트남이 자빠지니 반공(反共)국가체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사형시킨 거예요. (그 직전에) 나도 다시 구속되고. (베트남 패망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죠. 몇 달 전부터 중국을 통해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그러니 얼마나 불쌍해. 정말 억울하지. 법관들은 (사건기록을) 보면 (조작 여부를) 알 텐데. 사법살인을 한 거지. 인혁당 사람들이 희생된 거요, 완전히.”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당시 재판 분위기는 어땠을까. 김 시인에 따르면 “한 마디로 코미디”였다. 김병곤은 사형이 구형되자 이렇게 최후진술을 했다.

    “20대에 반국가단체 수괴로 취임시켜 주셔서 영광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뒷줄에 앉아 있던 서경석 목사는 김병곤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웃기네” 하고 내뱉었다. 서 목사는 당시 해군장교로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법이 뭐가 됩니까. 법치가 안 되는 거죠. 민주주의체제에서 법의 위엄이 사라지면 뭘로 통치합니까. 박정희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민주적 법질서를 땅에 떨어뜨린 거야. 그게 가장 큰 과오였어요. 헌정질서를 유린해 법을 웃음거리로 만든 거지.”

    김 시인도 사형이 구형되는 순간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참새도 죽을 때 짹 하는데, 사람이라고 짹 소리 못할까보냐. 법을 이렇게 끌고 가면 앞으로 어느 미친 놈이 법을 지키겠느냐. 법이 없어지면 뭘로 민주주의를 보장할 거냐. 군인들이 다 할 거냐.”

    김 시인을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다들 항소를 포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하는 배짱이었다. 그러자 군법회의는 선고 일주일 만에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낮추는 등 감형조치를 했다.

    “사형선고 받은 놈이 항소 포기하는 것 봤어요? 얼마나 웃기는 판결이라 생각했으면 항소를 포기했겠어요.”

    “법철학 다시 공부하라”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반공법위반으로 재구속된 김 시인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곳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이 갇혀 있었다. 그들이 사형당하는 날 구치소 당국은 수감자들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사형장으로 가는 모습을 못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인혁당 재심 무죄판결이 나온 후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제성호 교수는 “조작된 사건이 아니라 법규정을 잘못 적용한 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 김 시인은 “궤변”이라고 잘라 말했다.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법 적용을 잘못했다면 오심했다는 얘기지. 당시 재판에 관련된 사람이 수백명이고 정보부 애들한테 따귀 맞은 사람만 해도 1000여 명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뉴라이트건 뉴레프트건.”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의해 이뤄진 것인데, 그러면 두 법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김 시인은 박 전 대표의 발언에 대해서도 호되게 비판했다.

    “그 사람은 내가 보기에 대권 근처에 갈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법을 잘 모른다는 거지. 나도 법은 잘 몰라요. 하지만 이건 기본 아닌가. 민주주의의 기본이 뭡니까. 법 아닙니까. 내가 미국에 가보니 모든 게 법에 의해 결정돼 따를 수밖에 없더라고. 우리도 법의 엄정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들 함부로 말하면 어떻게 해요?”

    그는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던 판사들의 명단 공개에 대해 “당연한 일”이라고 찬성했다.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생활에 쪼들린 사람이 술 한잔 하고 ‘에이 씨팔 못살겠다’고 말했다고 감옥으로 보냈어요. 이런 판결을 해놓고 지금 와서 변명하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야. 봐주고 자시고 할 게 없어. 명백한 오심이었으니 비판받는 게 당연하지. 그들에게 법이 뭔지 물어야 해. 그 사람들, 법철학을 다시 공부하든지 법대로 되돌아가든지 해야 해요. 우리가 법관을 존중하는 이유가 뭡니까. 오차 없는 정확성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는 그 자리에 계속 비비적거리며 앉아 있으려 해요? 법관은 다시 뽑으면 돼요.”

    ‘나도 뒤따라 갑니다’

    참여정부의 과거사 규명 작업은 국론을 분열시켰다. 여와 야가 대립하고 보수와 진보가 부딪쳤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반대여론이 만만찮았다. 그러다보니 지지부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는 두 가지 문제점을 거론했다. 첫째는 시기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

    “‘IMF 사태’의 후유증이 굉장히 심각한 상태에서 이 정권이 출범했어요. 그러면 경제 문제부터 다뤘어야지. 국보법이나 과거사법같이 민감한 문제는 조금 뒤로 미뤄놓고 경제 쪽에서 훈풍이 불어왔을 때 밀고 나갔어야 해요. 그런데 초장부터 숙청 분위기를 조장했어요. 그건 굉장한 실수예요. 서툴러도 그렇게 서투를 수가 없어. 화염병 던지던 시대와는 다르잖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으면 어른이 돼야지.”

    두 번째는 실행 방식의 문제다.

    “과거사 정리처럼 윤리·도덕이 결부된 일에는 공론, 정론을 세우는 일이 앞서야 해요. 지금 우리 사회엔 그게 없어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때 쳐야지. 예컨대 친일 규명의 경우 일본이 왜 우리에게 원수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이 선행됐어야 해요. 일제 때 잘살았던 사람들이 뉴라이트 이론으로 설치는 판에 무조건 숙청 분위기 조성한다고 되겠어요? ‘5·16은 혁명이고 4·19는 학생운동’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분위기에서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겠느냐고요. 하나에서 열까지 서툴기 짝이 없는 아마추어들의 행진이라고.”

    그는 수감생활 중 정신착란을 겪었다. 기나긴 독방 생활의 후유증이었다.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이 거쳐간 방으로, 모니터가 설치돼 있어 24시간 감시당했다.

    1979년 여름 그는 참선을 시작했다. 꼭 100일째 되는 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직후 그의 마음속에서 세 마디의 말이 줄지어 풍선처럼 떠올랐다. 첫째 풍선은 ‘인생무상’, 둘째 풍선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풍선은 ‘나도 뒤따라 갑니다’였다.

    “내가 아는 기독교인이 그 소리를 듣고 ‘니가 원수를 용서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나는 용서한 적이 없거든. 그럼 뭘까. 허무를 느낀 거예요. 당신이나 나나 별수 없이 가야 한다, 때가 되면. 장례식 때 김수환 추기경이 추도사를 하는데 첫마디가 ‘인생무상’이었어요.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박정희 정권과의 모진 악연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박 정권 치하에서 모두 세 차례 옥살이를 했다. 서울대 문리대생이던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체포돼 4개월간 수감된 게 그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1970년 ‘사상계’에 권력상층부를 비판한 시 ‘오적(五賊)’을 실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100일간 투옥된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시인 김지하, 시대를 논하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모자로 몰려 도피 중일 때는 그의 부모가 대신 잡혀갔다. 그에 따르면 박 정권과 싸운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지만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고문 끝에 ‘반병신’이 됐다고 한다. 전기기술자였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일을 못하게 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박정희를 쓰러뜨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박정희는 원수”였다.

    한 개인이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서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 될 일이 아니다. 그라고 두렵지 않았으랴.

    “물론 두려웠지요. 나는 참 마음이 약한 사람이에요. 시 쓰는 놈치고 독한 놈 봤어요? 마음이 약하니 시를 쓰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는 싸웠다. 그것도 지독하게 싸웠다. 그 모진 저항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끝없이 생각하는 거지. 내가 이걸 해야 한다고, 맞아죽더라도 해야 한다고. 만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억지로 한 발 한발 내딛는 거지. 그게 길어지다보니 투사가 된 거고. 그런데 나는 투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마음이 약해서.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 후 여성성 얘기를 하고 부드러운 시를 쓴 거야. 그때 나보고 변절자, 배신자라고 욕을 했는데, 나는 원래의 그 부드러움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라고.”

    죽은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 중달을 쫓는 죽은 공명’처럼 여전히 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주요 지표 중 하나다. 김 시인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풀었다.

    “동학의 기본 논리가 불연기연(不然其然)이에요.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디지털 논리와 똑같지요. 예스, 노. 노, 예스. 온, 오프. 오프, 온. 컴퓨터가 뇌 운동의 모방이잖아요. 뇌 운동은 또 참선과 같아요. 시커먼 극단에서 하얀 극단으로, 지독한 혐오감에서 지독한 그리움으로 왔다갔다합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의 흐름도 음과 양, 양과 음의 반복이에요. 상생과 상극, 상극과 상생. 내가 중도를 얘기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역사도 중도적 관점에서 봐야 해요. 우리 현대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준이 산업화와 민주화 아닙니까. 산업화 과정에 잘한 게 있고 못한 게 있어요.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예요. 잘한 것만 있습니까. 문제도 많지요?

    우리가 대학 다닐 때 5분의 1이 결핵환자였어요. 밥 세 끼 다 챙겨 먹는 게 힘든 시절이었지요. 그토록 가난했어요. 그런 상태에서 경제개발 방식을 두고 학생들과 박 정권의 생각이 달랐어요. 그 차이가 한일회담반대 시위로 나타난 거예요. 일본 앞잡이 노릇한다고 시위했던 게 아니에요. 치열한 경제논쟁이 있었어요. 우리 논리는 협업적 농업을 중심으로 하고, 자생적 경공업을 규합하고, 선택적으로 중공업을 배양한다는 것이었고 박 정권은 그 반대였어요.

    하여튼 뭘 한답시고 해서 밥은 먹게 했어.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는 거죠. 그렇지만 잘못한 게 또 많아. 농업만 하더라도 토지를 전부 산성화해 화학영농이 성행하게 했어요. 그때부터 토지오염, 수질오염, 대기오염이 시작됐어요. 강물과 바닷물이 오염됐어요. 환경 문제가 거기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이처럼 박정희를 평가할 때 ‘예스’와 ‘노’ 양면에서 잘한 건 인정하고 잘못한 건 비판해야죠.”

    지난 몇 년간 박 전 대통령은 역대 최고 대통령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늘 수위를 달렸다. 경제적 업적에 대한 대중의 향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빚은 환란(換亂)의 뿌리라는 것이다. 김 시인도 비슷한 평가를 했다.

    “(박정희를 평가할 때) ‘예스’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로 경제적 업적이에요. 그렇지만 경제적인 면에도 ‘노’가 있어요. ‘IMF 사태’가 왜 일어났습니까. 관(官)과 재벌이 유착해 관치금융을 만들었어요. 그 바람에 경제체질이 허약해졌습니다. 지금 경제가 좋지 않은 데는 노무현 정부의 잘못도 있지만, 성장잠재력의 문제점을 파고들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체질론이 기어나와요. 이런 얘기가 이번 대선에서 제대로 나와야 할 겁니다.”

    환경도 망치고 실속도 없는 대운하

    화제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한반도 대운하 개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박정희식 개발논리의 전형으로 얘기되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환경론자들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해당 지역 주민들은 지지를 나타내고 있다. 김 시인의 생명운동은 환경운동과 맞닿아 있다.

    “이명박씨는 나와 6·3 동기입니다. 고려대 데모꾼이었지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실물경제를 잘 알고 추진력 있고 또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지요. 자기 말마따나 잘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운하 문제에 대한 비판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요. 우리는 대륙국가가 아니거든요. 유럽 같은 대륙국가에서 성공한 운하개발을 ─ 그것도 200년 전에 ─ 우리 같은 반도국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어요.

    우리나라의 강은 모두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요. 그리고 한강 낙동강 영산강이 모두 수평으로 흐르지 않고 굴곡이 심해요. 산지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걸 찔러 관통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높낮이 차이가 심한 만큼 상당한 보완조치가 필요하죠. 그래서 댐이니 보(洑)니 늪이니 터널이니 오만 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 좁은 나라에서 그렇게 복잡한 형태로 생태계를 부수어놓으면 뒷날 발생할 자연재앙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거죠. 예를 들어 소양호가 있는 춘천 주변에는 호흡기 환자가 굉장히 많아요.

    대구가 항구가 된다? 부산에서 컨테이너가 서울까지 간다? 멋있어 보이죠. 그런데 부산의 컨테이너 업자들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대형 수송선으로 부산-인천을 직항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운하 파 갖고 득볼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지금 거대 수송선과 쾌속정이 많아요. 부산에서 인천, 중국의 다롄, 칭다오, 상하이까지 굉장히 빨리 갑니다. 운하, 그거 옛날 얘기예요.

    물은 절대 함부로 할 게 아니에요. 청계천도 시민분과위원회의 활동 덕분에 그나마 친환경적으로 개발됐지만, 지금 조금씩 썩어가고 있어요. 물이 얼마나 복잡한 건데. 정해진 방향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역류가 있고 폭발이 있고 선회가 있어요. 그러니 정화되면서도 썩는 거예요. 여권이 워낙 개판이라 반사이익을 누리는데다 추진력이 뛰어나다고 자꾸 칭찬해주니까 운하를 밀어붙이고 있는데, 치명적인 거예요. 곧 직격탄 맞을 겁니다. 주변사람 통해 ‘제발 좀 침착하게 재검토하라’고 얘기해줬어요. 그런데 안 들어요.”

    “어떠한 조직에도 들어간 적 없어”

    세간의 평에 따르면, 그는 1980년대 들어 저항시인에서 서정시인으로, 투사에서 생명운동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인 규정은 실제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1980년대 중반에 나온 그의 시집 ‘애린’만 해도 이전의 시집들에 비해 서정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그렇다고 저항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어쨌거나 운동권에서는 “변절했다”는 비난이 흘러나왔다. 그가 정치투쟁의 현장에서 빠져나온 건 기존 노선에 대한 반성과 수정일까. 아니면 삶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일까.

    “두 가지를 봅시다. 하나는 문학이에요. 이미 20대 초반에 썼던 시에 생명사상이 깔려 있어요. 최근 조선대의 한 학생이 ‘김지하의 초기 시에 나타난 생명사상’이라는 석사논문을 제출했어요. 매사에 표면과 이면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학평론가는 내 시의 표면만 본 거야. 투쟁의 이면에 생명과 죽음 사이의 대결이 놓여 있는데 그걸 놓친 거예요.

    다른 하나는 사상적인 면이에요. 내가 감옥에서 정신이 왔다갔다했어요. 어느날 꿈에 하얀 민들레씨가 창살 사이로 막 날아드는 거야. 벽이 다가서고 천장이 내려오고. 반 미친 거지. 허공에서 생명, 생명, 생명…이라고 메아리가 울려요. 그때 이런 깨달음을 얻었어요. 저 민들레씨도 감방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데, 고등생명체인 내가 잘만 깨닫는다면 여기서 바깥에 있는 우리 애들이랑 마누라랑 같이 앉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생명을 깨달아야 내가 산다. 그래야 저들에게 항복하지 않고도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참선을 시작한 거예요.”

    그는 참선 이후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생태학, 환경학, 불교에 이어 테이야르 드 샤르뎅의 고생물학 책을 읽었다. 그 책을 보다 그 원리가 동학에 있다는 걸 알게 돼 ‘사상의 본거지’를 동학으로 옮겼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동학운동을 하다 죽었다. 동학을 공부하는 것은 곧 집안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게 생명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운동권에서 그를 ‘변절자’라고 비난한 데 대해 “잘들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했다.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적인 사상가, 좌익 혁명가라면, 한번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요. 4·19 직후 친구들이 전부 민통련에 들어갔어도 난 안 들어갔어요. 나는 문화 쪽에서, 민족문화운동으로 너희들의 투쟁에 동참하겠다면서. 한일회담반대투쟁 때는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라고 있었는데, 거기도 안 들어갔어요. 그후로도 조직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그러기에 나는 무슨 이스트(-ist·∼주의자)가 아니에요. 공부를 했을 뿐이지. 중도 사상도 이미 23세 때 접한 거예요. 강원도 원주에서 가톨릭 농민운동을 하면서 여운형의 제자이자 조봉암의 친구였던 장일순 선생에게 배웠지요.”

    중도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1월10일 보수와 진보 진영의 시민사회단체 인사 1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화제가 됐는데, 자리를 마련한 단체가 바로 그가 관여하는 ‘화해상생마당’(운영위원장 이부영 전 의원)이라는 중도모임이다. 이날 행사에서 그는 중도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은 시 ‘허공은 신’을 낭독했다.

    (초략)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두 끝도 아니요

    가운데도 아닌 모든 것

    함께 손잡고

    한 차원을 뛰어넘자

    허공은 도약

    (중략)

    허공은 삶

    허공은 앎

    허공은 그리고



    다아 그렇다

    -‘허공은 신’ 중에서


    시에 불교적 냄새가 짙다고 지적하자 예상했다는 듯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칠 때는 쳐야지”

    “(시 중간 부분에서)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노인과 청년, 남과 북 관계의 중도를 말했는데, 사실 이 시의 사상적 기반은 신에 대한 신앙과 공(空)에 대한 순행이에요. 종교의 중도를 말한 겁니다. 허공은 불교적 개념이지요. 내가 중도를 말하면 목사님들은 불교 아니냐고 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엔 기독교도 중도예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바로 중도예요. 반대되는 것끼리 상호 보완하는 것이니. 신은 기독교의 상징이잖아요. 그래서 시 마지막이 ‘허공은 신’이라고 끝난 겁니다.

    내 생각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거예요. 비어 있어야 복이 온다는 얘기지. 비어 있으면 오른쪽도 보이고 왼쪽도 보여요. 여당도 보이고 야당도 보여요. 다 보고 가자는 얘기지요.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바로 이겁니다. 불교는 동양종교이고 기독교는 서양종교예요. 하지만 그 사상적 근본을 따져보면 같은 종교라는 거죠.”

    그의 중도론이 현실정치로 옮겨갔다.

    “중도는 디지털 논리와 같아요. 예스, 노. 노, 예스. ‘온’ 하면 ‘오프’ 하고 ‘오프’ 하면 ‘온’ 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천장을 치면 바닥으로 내려가고 바닥을 치면 천장으로 올라가는 원리지요. 이처럼 양쪽을 다 보고 중간도 보고 전체를 들어올리자는 거예요. 공자가 ‘시중(時中)’이라는 말을 했지요. 중용의 조건은 시중입니다. 중용은 균형이고 시중은 중심이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면서 기우뚱하는 거예요. 이것을 기우뚱한 균형 또는 역동적 중도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중도라고도 하고. 그런데 중도라고 일의 선후가 없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시장과 분배, 성장과 복지가 맞설 경우 양쪽 다 끌어안되 상황에 따라 더 중요한 쪽을 배려해야 한다는 거죠. 성장과 분배가 결합된 것이 일자리예요. 그런 것을 손학규 같은 사람이 얘기하니 내가 좀 점수를 쳐주는 거지. 비즈니스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그 비즈니스가 옳은 건지 그릇된 건지 따지고 들면 복잡해지지만.”

    “동 트기 전이 밤보다 새카맣다”

    그의 중도론은 노사문제와 남북관계에도 적용된다.

    “경총과 민노총,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갈등이 큽니다. 이런 문제를 화해와 상생의 방향으로 부드럽게 해결할 방안이 없는지 따지는 게 중도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중도의 원리가 적용돼야 해요. 당근과 채찍이 다 필요해요.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더라도 핵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때렸어야 해. 왜 그것을 병행하지 못해요? 조여가야 해요. 칠 때는 쳐야지. 그게 다 중도입니다. 가운뎃길로 가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중도가 아니에요. 이변비중(離邊非中). 양 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도 아니라는 거죠.”

    그가 참여하고 있는 중도모임은 그의 제안에 따라 오는 5월 음악회를 열 예정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문화가 키워드예요. 그들은 중도를 몰라요. 대신 퓨전이 있어요. 크로스오버도 있고. (중도모임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과 미국의 랩이나 팝, 록을 뒤섞는 큰 음악제를 열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하는. 지금 10대, 20대, 30대가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해요. 이들의 정치결정력과 문화결정력이 굉장히 큽니다. ‘중도’ 하자면서 이 세대를 외면하면 안 돼요. ‘꼰대’들의 잔치가 되면 안 된다는 거죠.”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의 현대사는 중도세력 실패의 역사다. 임시정부 말기 좌우합작 노선이 주류를 이뤘지만 광복 이후 뜻을 펼치지 못했다. 김구와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 실패는 그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장덕수, 송진우 등 자유주의자들도 합작노선에 다가설 무렵 암살당했다.

    북한에서는 현준혁과 조만식이 남북합작 통일정부를 구상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함흥의 유명한 노동운동가 오기섭도 남북합작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이승만 정권 때는 혁신계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당했다. 4·19 직후 출현한 민족노선들도 다 깨졌다. 이처럼 중도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모두 짓뭉개졌다. 그래서 남과 북 양쪽 다 극단주의자가 판을 쳤다.

    그는 진보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우리나라가 잘되려는 징조”로 해석했다. 위기는 기회라고, 위험은 늘 비약하려 할 때 날카로워진다며.

    “우리 역사에서 중도세력이 다시 살아나야 해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구한말과 비슷한데, 중도적 외교로 우리의 국익을 챙길 수 있는 탁월한 전략이 나와야 합니다. 남북관계도 그렇고. 중도적 위치에 설 때 비로소 우리의 살 길이 열리고 역사적으로 짓밟혔던 평화세력이 되살아날 수 있어요. 앞으로 지금보다 더 어려워지지는 않을 거예요. 원래 동 트기 전이 밤보다 더 새카맣잖아요.”

    그의 중도적 관점으로는 노무현 정부가 잘못한 게 너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못한 것은 경제정책이다. 집권세력의 자질이 주요 원인이다.

    “화염병 던지며 민주화운동한 건 ‘예스’지. 그러나 공부 안 한 건 ‘노’예요. 집권하면 경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경제학 개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어요. 열린우리당도 ‘개판’이야. 경제가 뭔지도, 숫자가 뭔지도 몰라.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다면 최소한 경제학에는 밝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마르크스주의가 뭐예요. 사회경제사학 아니에요. 그런데 깡통이에요.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투쟁하느라 시간이 없어 공부 못했다면 집권한 후 밤새워서라도 공부했어야지. 또 색채가 좀 다르더라도 전문가를 모셨어야지. 이런 얘기 (언론에) 처음 하는 건데, 하는 짓이 하도 꼴같잖아 그래요.”

    열린우리당의 신당 창당 움직임도 비판했다.

    “분당 전에 신당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요? 그런데 천정배파, 김한길파, 김근태파, 정동영파 다 찢어놓고 무슨 신당을 해. 그렇게 상식 밖의 짓을 하니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다들 후배니, 솔직히 나는 좋은 쪽으로 말해주고 싶어요. 같이 감옥에서 공부한 놈들, 웬만하면 욕하겠냐고. 워낙 엉망이니 그렇지.”

    서양의 하드웨어와 한류 결합해야

    그는 또 “문화적 안목도 없어 한류(韓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에서 문화관광부 예산이 400억원이나 삭감됐다면서.

    “요즘 세대, 특히 신세대의 키워드는 정치·경제가 아니에요, 문화지. 우리 시대엔 막걸리 한 되, 밥 한 그릇이 중요했지만, 요즘 애들은 CD와 비디오, 영화야. 한류 문화산업 수출총액이 재작년에 63조원에 이르렀어요. 이 중요한 시기에 관련 예산을 작년보다 깎다니. 도대체 마인드가 없는 거지.”

    문화는 그의 사상적 기반이자 지향점이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꿈꿔온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문화혁명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문화 쪽에서 투쟁에 이바지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는 정치와 경제, 자연과 도덕 중심의 프랑스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삼은 것이 바로 러시아 10월혁명이에요. 이것 역시 정치·경제 중심으로 했기에 망했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실러는 문화, 종교, 유희, 예술… 이런 쪽에서 교양을 쌓은 사람들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물론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같은 건 혁명이 아니라 깡패들 난장판이지만. 조금 나은 게 유럽의 68혁명이에요. 거기서 후기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왔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것도 완전하지 않아요. 동아시아에서 나와야 됩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에서 결집한 서양세력의 하드웨어와 아시아를 압축한 이 한반도의 콘텐츠가 결합해야 돼. 이것이 바로 문화혁명이에요. 문화를 통해 세계를 바꾸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지구 온난화 문제, 어떻게 해결할래요? (이대로 가면) 100년 안에 지구는 끝장인데, 70억 인구가 많은 동식물과 함께 행성이동할 수 있는 우주항공기술이 개발될 가능성이 있느냐, 그건 꿈이에요. 미국으로 압축돼 있는 유럽의 사상이 고유의 정신을 잃지 않고 한국의 문화와 합작하는 것. 그런 점에서 이것도 중도입니다. 그것을 이룰 중심세력이 바로 붉은 악마 세대이고 한류 세대이고 디지털 세대라는 거죠.”

    그는 대선후보들에 대한 쓴소리를 부탁하자 “공부 많이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부, 지독하게 해야 해요. 지금 우리나라 형편 보세요. (대통령이 되려면) 생각 많이 하고 고민 많이 하고 의논과 토론을 많이 해야 해요. 저 잘났다고만 떠들지 말고. 이 김지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 사실 나 이런 말 잘 안하거든요. 해도 간단히 몇 마디 하고 말지 ─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얘기야, 이 세상 끌고 가기가. 껍데기만 봐서는 참 힘들어요.”

    “나는 바보였다”

    그는 현재 두 군데 대학에서 석좌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영남대에서 ‘생명학 탐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한류미학개론’을 가르치고 있다. 올봄 신학기에 강의가 하나 더 생긴다. 홍익대에서 가르치게 될 ‘생명학’이다.

    그의 젊은 시절은 시위와 도피, 구속, 재판, 옥살이의 연속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밤새껏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던 뜨겁고 어두컴컴했던 날들.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든 지금 그 젊은 날의 여정은 그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과거에 대해 물어보면 ‘바보였다’는 말밖에 안 나와요. 그렇게 안 해도 이해할 수 있었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적정선을 지키며 대작도 쓸 수 있었을 텐데, 마구 대갈박치기를 해대 집사람을 무지하게 고생시켰죠. 내가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집도 자주 옮겨 다녔어요. 해남에서 광주로, 서울로. 애들이 공부할 틈이 없었지요. 그래서 둘 다 대학에 못 갔어. 그러나 워낙 잘난 놈들이라 하나는 영국 유학 가 있고 하나는 지금 연세대 강사로 있어요. 걔들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미안한데. 안 미안할까? 아, 내가 민주화운동 했으니 잘났다? 천만에. 나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에요. 민주화운동을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대갈박치기하고 7년간 독방에 사는 그 지랄 안 했어도 폼 잡는 놈들 세상에 쌔고 쌨는데, 뭐 할라고 그랬는지…. 바보가 아니냐.”

    이건 뭔가. 겸손인가, 위악인가. 설마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뜻은 아니겠지.

    “내가 바보라는 말을 왜 하겠어요? 뭐 그렇게 잘난 것도 없다, 이 말이지.”

    공자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했다. 요즘 김 시인의 낙은 무엇일까.

    “내가 술도 끊었잖아요. 15년이 지났지요. 담배도 끊은 지 10년 됐고. 그러니 뭐 낙이 없는 거라. 그저 글 쓰고 책 읽는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생명평화운동 하고. 앞으로 포럼이 많을 겁니다. 워싱턴에서도 열릴 예정이고, 대구와 경기도에서도 하게 될 것 같아요.”

    여기서 인터뷰를 끝냈다. 머리가 무거웠다. 세 시간 가까이 꼬박 앉아 많은 얘기를 들은 탓이겠지만, 그가 한 얘기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너무 깊이 들어간 얘기는 기사 쓸 때 빼리라 작정했지만. 거실 서가에 빼곡히 들어선 책들의 예리한 시선을 느끼면서 그의 집을 나섰다. 거리는 거대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고, 아스팔트에서 안개비의 체취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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