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춘추 5覇’ 제나라 환공의 탁월한 통치철학

“먹고살 걱정이 없어야 개혁도 한다”

  • 글: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3-24 1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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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륭한 인재를 활용하려면 통치자 자신부터 훌륭해야 한다. 개혁정치에 성공하려면 분명한 목표설정과 국력집중이 필요하다. 기량 큰 군주로 숭앙받는 제나라 환공, 티끌만한 질투심도 없이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천거한 포숙, 부민화 정책을 통해 민생안정을 이끈 관중. 이들이 엮어낸 제나라의 부흥 이야기.
    ‘춘추 5覇’ 제나라 환공의 탁월한 통치철학

    일러스트·이우정

    키가 작은 통치자는 본능적으로 키가 큰 인재를 꺼린다는 말이 있다. 이는 보통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약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활용한 통치자라면 먼저 그 통치자 자신이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철강왕 카네기(A. Carnegie·1835∼1919)는 자신의 묘비명에 ‘여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쓸 줄 알던 사람 잠들다’라고 쓰게 했다. 협력자에 대한 감사와 자기 자신의 부각, 그리고 인류에 대한 교훈을 아울러 남긴 셈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염두에 두면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의 인간관계를 읽어나가기 쉬울 것이다.

    원래 제나라는 서해로 뻗은 산동반도의 북부와 황하 하류 평원지대를 겸유함으로써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유명한 태공망(太公望·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이 봉함을 받았던 동방의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져 있어 주 왕조의 제후국들 중에서도 은연 중 위신이 높았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제14대 군주 양공(襄公)이 즉위하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무도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누이동생과도 통정(通情)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가문 타령’으로 자기의 무능을 변호하고 악행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런 일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난세에 더욱 절실한 親友

    양공은 살인과 공포와 정보정치로 그럭저럭 정권을 유지했지만 결국 측근의 손에 제거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포악한 독재자는 측근의 유력자에게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양공도 믿었던 심복인 두 장군에게 살해당했는데, 그들 역시 다른 대신(양공의 종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삽시간에 대혼란이 전국을 엄습했다.



    당시는 군주를 태양으로 여기던 때로, 그 자리를 하루도 비워두기 곤란했다. 그런데 양공에겐 아들이 없었고 배다른 두 동생이 있었을 뿐이다. 공자(公子) 규(糾)와 공자 소백(小白)이 그들이다.

    두 공자는 양공의 포악무도함을 보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찌감치 각기 자기의 사부(師傅·스승 겸 후견자)와 함께 외국으로 망명했다. 공자 규는 외조부의 나라인 노(魯)국으로 갔는데, 그의 사부는 관중과 소홀(召忽)이었다. 한편 공자 소백은 이웃한 거(퀎)국으로 갔는데, 사부는 포숙(鮑叔)이었다. 포숙은 관중의 가장 가까운 친우다.

    이들 사부의 선정은 양공과 공자들의 선친인 제나라 희공(僖公)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사부 발령이 발표되자 포숙은 병을 빙자하여 출근하지 않았다. 그가 맡은 소백이 나이가 어린 편이고 서자 출신이라 장래성이 없을 것으로 보아 실망했던 것이다. 그러자 관중과 소홀이 그를 찾아갔다. 관중이 앞일을 내다보며 말했다.

    “양공의 타계 후에 제나라를 안정시킬 군주는 두 공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네. 그런데 난세의 사태 진행은 현재의 위계질서대로 나가는 게 아니지. 앞으로 누가 등극할지는 알 수 없네. 나는 공자 소백을 유망주라고 내다본다네. 그 분은 잔재주를 피우지 않고 대소고처(大所高處)로부터 사물을 파악하며 기량이 크네. 인물의 도량이 거대하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지. 미래를 예측하건대, 설령 공자 규가 집권한다 해도 나라일이 어렵게 되면 다스려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때야말로 공자 소백을 받드는 포숙 자네가 나서서 정치안정을 위해 헌신분투할 시기라고 보네.”

    관중이 계속 말하였다.

    “우리는 임명된 직분이야. 우선 모시는 분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며 사생을 초월해야지. 그러나 더 나아가서 국가이익과 민생안정에 이바지한다는 포부를 가지면 좋으리라 생각하네.”

    포숙은 관중의 그 같은 충고에 따라 출근해서 공자 소백에게 충성을 고했다. 이로써 장차 어느 공자가 집권하든 사부인 두 친구가 서로 비호하고 천거할 사상적 준비가 갖춰진 셈이다. 이러한 친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성실해야 하며, 허영과 거짓말 같은 잔재주는 어불성설이다.

    변전무쌍한 난세의 정국 추이는 주마등과 같았다. 결정적 시각의 도래가 의외로 빨랐고, 상상 이상으로 더욱 첨예화했다.

    폭군으로 악명을 날리던 양공이 시해되자 사촌 아우인 공손무기가 등극했으나 반년도 못 되어 역시 이승을 하직했다. 그동안 공자 규는 노나라로, 공자 소백은 이웃 거나라로 도피 중이었다. 공석인 군주의 자리를 메우고자 급거 소집된 중신회의의 다수 의견에 따라 거나라의 소백에게 영접의 사신이 파견됐다.

    영국의 처칠은 “난세에는 중앙무대 가까이 위치해야 유리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공자 소백으로 말하면, 가까이 있을뿐더러 의젓한 생김새에 기량이 크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조건이 매우 유리했다.

    한편 그러한 정보를 접한 노나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나이로 보아도 공자 규의 즉위가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이 기회에 제나라에 친노(親魯)정권을 수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나라 장공(莊公)은 군대를 풀어 공자 규의 귀국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이때 관중이 계산해보니, 거나라가 제나라 수도에 더 가까우므로 소백이 먼저 귀국해 즉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관중이 직접 수십량의 병차로 쾌속 선발대를 편성했다. 서둘러 인솔하면서 본대에 앞서 출발했다. 그래야만 공자 소백의 귀국 행렬을 중도에서 차단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관중의 선발대가 급행하여 즉묵에 도착해보니 벌써 공자 소백 일행이 통과중이었다. 관중이 달려가 장유(長幼)의 순서와 현재의 병력 대비 등을 이유로 귀국 중지를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설득 실패를 자인하듯 관중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듯했으나, 갑자기 돌아서더니 공자 소백을 향해 활을 쏘았다. 소백은 크게 소리지르며 차중에서 뒤로 쓰러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측근들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참 지켜보던 관중은 암살 성공을 확신하며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뒤따라오던 본대에 경위를 보고하고, 여유 있게 천천히 제나라 수도를 향했다.

    한편 공자 소백은 관중이 멀어지자 멀쩡하게 상반신을 일으킴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했고, 또한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했다.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장신구를 맞히고 옆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공자 소백의 그런 계략은 ‘임기응변 죽음 꾸미기’라고 불린다. 한자로는 ‘수기응변 양장중전지계(隨機應變 佯裝中箭之計)’다. 하여튼 임기응변의 순간적인 연극과 슬기로운 연출은 공자 소백의 신속하고 탁월한 두뇌회전을 말해준다. 후세의 일이지만 삼국시대의 제갈공명도 ‘죽음 꾸미기(裝死)’를 역용했다. ‘삶 꾸미기(裝生)’ 계략을 유언하여 자신의 사후에 적군을 격퇴한 것이다.

    공자 소백 일행은 연극에 성공한 후 발길을 재촉해 제나라 수도에 입성했다. 그러고는 백관만민의 축복 속에 즉위했는데, 이것이 곧 제나라 환공(桓公)의 등장이다. 기원전 685년의 일이다.

    한편 노나라의 방대한 병력은 공자 규를 호송하며 천천히 위의를 갖추면서 뒤늦게 국경을 넘어서야 비로소 즉위 사실을 알게 됐다. 후회막급이었으나 자기 딴에는 대의명분이 있었고 병사들에 대한 체면도 세워야 했다. 억지로 공자 규를 내세워 일전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노군의 대참패였다. 제군은 거꾸로 노군을 추격하며 국경을 넘어섰는데 사령관 포숙 명의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공자 규는 당신들 노나라의 육친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노군측에서 처분하시오. 그러나 관중과 소홀은 제나라 출신의 원수이니 우리측이 인도받아서 처단하겠소(春秋左氏傳, 莊公 10年).”

    결국 공자 규는 자살했고 소홀은 순사(殉死)했다. 살아남은 관중의 신병은 포숙이 인수해 당부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결박을 풀었다. 그러곤 귀국하자마자 환공에게 보고하고 건의했다.

    “관중은 저와 비교도 안 되게 우수하며, 천하에 둘도 없는 정치적 재능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담하게 등용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활로 쏜 적이 아닌가.”

    “그럴수록 거룩하고 폭넓은 기량을 천하에 보이셔야 합니다. 과거에 구애하면 소인에 불과합니다. 관중을 보좌역으로 기용하시기 바랍니다.”

    환공이 끄덕이며 포숙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환공은 관중을 일거에 상국(相國)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이를 전해들은 국민은 환공을 우러러보았고 또한 포숙을 존경했다. 환공은 오늘날까지도 기량이 더없이 큰 위대한 군주로 숭앙된다. 그리고 포숙은 티끌만한 질투심도 없이 자기보다 나은 인재를 공정하게 천거했다는 데서 훌륭한 참모장으로 존경받고 있다.

    ‘춘추 5覇’ 제나라 환공의 탁월한 통치철학

    고대 중국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은 분명한 목표설정과 국력집중으로 개혁정치를 성공시켰다. 사진은 2003년 3월 경기도 과천시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여정부 각료와 청와대 인사들.

    관중은 환공의 신임과 포숙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충성과 실무에 최선을 다했으며, 마침내 제나라를 천하제일의 부강국으로 부상시켰다. 환공이 춘추5패의 선두주자로 등장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보좌한 것이다.

    개혁정치를 성공시키려면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국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과녁 없이 활을 마구 쏘아대듯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정책적 낭비로, 이렇게 해서 개혁을 성공시킨 사례는 역사상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제나라 재상직을 맡은 관중에게 국정목표와 정책순위 결정은 지극히 명백했다. 난세 수습과 부강한 조국 건설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 즉 부민화(富民化) 정책을 통한 민생안정이다. 그밖에 다른 것은 파생적인 것이다.

    그는 정면으로 깨우친다.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데 있다(治國之道, 必先富民).” 이어서 부연한다. “민생이 안정되면 다스리기 쉽지만, 경제가 파탄되면 혼란이 불가피하다(民富則易治也 民貧則難治也, 管子, 治國篇).”

    나아가서 민생안정을 전제로 한 인간의 도덕의식 향상과 민성(民性) 순화가 정치의 목적으로 제시됐다. “인간이란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어야만 비로소 자주정신과 도덕적 가치에 눈뜨게 된다(衣食足而知榮辱… 管子, 牧民篇).”

    오늘날로 말하면 민주정치 안정의 경제적 조건을 말하면서 정신적 조건 형성을 내다보게 한 셈이다. 사실 신생국의 젊은 지성들이 지난날 강력한 독재정권에 맞서 희생적으로 용감히 싸워나갔던 근본지향도 그것이 아니었는가. 도덕적 가치에 눈뜬 자주적 인간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민주정치는 성립할 수 없다. 그 자주적 인간 육성의 으뜸이 바로 민생안정이고, 이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올바르고 슬기로운 시장경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관중의 정치적 실천에서 보는 신경지 개척은 무엇인가. 수천년 전의 일인 만큼 시대적 제약성은 면치 못했으나 착실한 동시에 매우 진취적이었다.

    당시는 농업입국일 수밖에 없었으나 때마침 수공업자들에 의해 철제 농구가 새로 제작될 무렵이었다. 관중은 농업생산력을 증강코자 각국의 수공업자뿐 아니라 상인들에게도 철제 농기구 도입과 관련하여 특전과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상공업자들의 자본과 기술이 제나라로 물밀듯 유입됐다.

    관중은 또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무하고자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종전의 세제가 관료들의 징세 편의 위주로 되어 있던 것을 뜯어고친 것이다. 신개척지와 척박한 땅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특별하게 보살폈다.

    제나라의 입지조건은 내륙의 제후국들과 달랐다. 해안국의 특징을 살려 제염업과 어업을 진흥시켰으며 내륙을 향한 유통구조를 개선했다. 이는 외국 상인들의 자발적 참여 의욕을 북돋웠다.

    행정관리 분야에서는 인재 선발 및 등용의 합리성과 활성화를 보장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걸쳐 진행일지처럼 공과표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할 때 언제라도 이유 있는 천거가 가능하도록 안배한 것이다. 또 사회안정과 정부시책의 효율적 시행을 위해 주민들의 무작정 상경과 정처 없는 유동인구화를 제한했다. 출생지와 생산활동지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와 방범조직, 징용과 병력동원을 서로 연관되도록 엮어놓았다. 이러한 조직화는 사회일탈을 예방하는 동시에 주민들로 하여금 보람과 이익을 아울러 헤아리게 한 것이다.

    관중의 외교정책

    관중의 외교정책은 목표와 명분, 그리고 방법이 지극히 간단명료하고도 짜임새가 있었다. 목표는 제 환공으로 하여금 제패(制覇)케 하는 것, 즉 제후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 패자(覇者)의 지위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정의가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 명분은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존왕’이란, 당시의 주(周) 왕실이 유명무실한 존재로 약체가 되어 있었으나 단결에는 중심이 필요하므로 우선 받들면서 제후들이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양이’란 주변 이민족들이 아직껏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채 중원을 유린코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그들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는 외교를 뒷받침할 실력을 갖추는 일이다. ‘종합 국력’을 증강하고 국부병강(國富兵强)해야만 제후국들이 복종하며 동원에 호응한다. 둘째, 외교에서도 신의를 굳건히 지켜야만 제후국들이 믿고 따라온다. 한번 맺은 약속은 이유를 막론하고 꼭 지켜야만 제후국들이 심복(心腹)할 것이며, 그들의 자발적 적극성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다.

    바로 그 점, 신의의 준수로 표현되는 정직하고 겸허한 자세가 관중 외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681년의 일이다. 제와 노의 무력충돌에서 제나라가 승리했다. 패배한 노 장공이 수읍(遂邑)을 할양하겠으니 화의하자고 요청해왔다. 제 환공이 응낙하여 가(柯)라는 곳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단상에 양국 수뇌가 착석하고, 신하인 중진 장군들은 단하에 착석할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단하에 있던 노나라 장군 조말(曹沫)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자신의 주공에게 무언가 귀띔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향을 돌려 환공에게 단도를 들이대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시오!”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환공은 그 위급한 순간에 “알았다, 그렇게 하지” 하고 약속했고, 조말이 단도를 버리고 단하의 신하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환공이 생각하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전쟁에 승리한 만큼 조말을 없애버리라고 요구하기로 했다. 물론 강박된 약속은 저버릴 생각이었다. 이때 관중이 달려와 말했다.

    “협박을 당한, 위급한 상황의 약속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고 이미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죽이면 신의에 어긋납니다. 일시적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가 알려지면 제후들의 불신을 초래하며 백해무익합니다.”

    환공이 관중의 간언을 수긍하고 조말과 약속한 대로 빼앗은 땅을 고스란히 노나라에 반환했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제후들이 한결같이 제 환공의 처사를 높이 평가했다. 신의를 지키는 큰 인물이라며 그를 우러러보았던 것이다. 이때의 일을 계기로 2년 후 열린 회맹(會盟) 때 모든 제후들이 환공을 맹주(盟主)로 모셨다. 즉 환공이 처음으로 중원의 패자(覇者)로 등장한 것이다.

    신의를 지킨 환공

    외교를 뒷받침하는 실력, 즉 유사시에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종합 국력’의 요인은 무엇인가. 관중에 의하면 8대 요인이 있으니, 즉 ‘재(財=경제), 공(工=기술), 기(器=생산기구), 정교(政敎=정치와 선전), 선사(選士=군인의 소질), 복습(服習=군사훈련), 편지천하(遍地天下=국제문제의 조사연구), 기수(機數=시기 장악과 객관적 조건의 활용)’이다(管子, 七法, 제6).

    이는 고대의 탁견이다. 그러나 현대 중국의 사회과학자들은 더 많은 요인을 거론한다. 크게는 정치, 경제, 군사의 세 가지 분야로 구분한다. 정치적 요인으로는 사회정치제도, 대내외 정책, 사회의식 형태, 정쟁의 성격규정, 정당·정부·군대·인민의 단결 정도, 국제적 지원을 든다. 경제적 요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수준과 가동 정도, 교통운수, 과학기술, 인구, 영토, 전략물자의 비축, 경제적 잠재력 등에 주목한다. 군사적 요인으로는 군대의 양과 질, 군사지휘관들의 능력, 군사 사상과 전략·전술, 무기장비, 후방 보급 등이 중요 관심사다(社會科學大辭典, 北京, 1990).

    미국과 서구의 학계 관심도 대동소이하지만, 지리적 위치나 천연자원, 인구의 교육훈련, 리더십, 공업력, 민족성, 국민적 사기, 외교의 질, 정치의 질, 연구의 질에 주안점을 둔 것이 관심을 끈다.

    후세의 웃음거리 된 ‘송양지인’

    관중·포숙 등 충신들이 병사한 뒤 제 환공도 기원전 643년 이승을 하직했다. 곧바로 다섯 공자 간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추잡한 권력투쟁 속에 환공의 시체가 60일간이나 방치되어 악취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고비로 제나라의 패업은 엉망이 됐으며, 영원히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 소동의 와중에 이웃 송(宋)나라 양공(襄公)한테 피난 가 있던 태자 소(昭)가 송나라 등 몇몇 나라의 후원으로 귀국하여 그럭저럭 등극했으니, 곧 제나라 효공(孝公)이다.

    한편 송 양공은 그러한 개입의 성공에 힘입어 제나라의 패업을 자기가 계승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다. 실력의 뒷받침 없이 야심만 부풀어오른 양공의 모습을 보자 크게 걱정한 공자 목이(目夷)가 진언했다.

    “우리나라는 약소국인데도 분수를 모르고 제후의 맹주가 되고자 하니 화난을 초래할까 우려됩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고, 외교무대에서도 ‘공작’의 가문이라고 큰소리치며 대접받기를 즐겼다.

    송나라의 라이벌은 남방의 신흥 강대국인 초(楚)나라였다. 그런데 이웃 정나라가 초나라에 공물을 바치는 등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참지 못한 양공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정나라으로 쳐들어갔다.

    한편 초나라는 정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자 대군을 파견했는데, 사령관은 군주가 아닌 대신이었다. 되돌아선 송군이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초군과 대치했다. 기원전 638년의 일이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맡았던 목이가 거듭 양공에게 간했다.

    목이 : “초군이 침공하는 명분은 정나라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나라와 화친하면 초군은 개입할 명분이 없어져 철수할 것입니다.”

    양공 : “환공의 패업을 계승할 우리가 초나라에 좌지우지될 수는 없다.”

    목이 : “초군의 병력과 장비가 우리를 능가합니다.”

    양공 : “우리에겐 대의명분이 있으나 그들에겐 인의(仁義)와 도덕이라는 무장이 없다. 송나라는 공작의 나라인데 정나라는 자작의 나라이니, 가문에서도 우리가 우월하다. 더구나 지금 적군의 사령관은 군주도 아닌 대신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한 문답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결전의 날이 밝았다. 초군이 도하(渡河)할 참이었다.

    목이 : “도하를 시작한 적군을 강물 속에서 격멸합시다. 적군 병력이 아군보다 우세합니다.”

    양공 : “아군은 정정당당한 인의의 군대인데, 어찌 상대방이 수중에 있을 때 습격한단 말인가.”

    이윽고 초군이 도하를 마치고 나서, 대열의 정돈을 서두르고 있었다.

    목이 : “지금이 최후의 돌격 기회입니다.”

    양공 : “군자는 적의 약점을 치지 않는다. 어찌 대열 정돈을 마치지 못한 적을 칠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이익에 현혹되어 대의를 망각해선 안 된다.”

    드디어 초군이 전투대형을 갖추고 부서 할당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송 양공이 진격의 북을 쳤다. 양군의 격돌 속에 송군이 완패하여 병력의 8, 9할을 상실했다. 양공 자신도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목이가 결사적으로 구출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패주했다. 한편 초군은 추격·섬멸 작전이 이번 임무는 아니라며 전리품만 챙겼다.



    이 홍수 싸움을 계기로 종전에 ‘남방의 야만국’으로 천대받던 초나라는 중원 진출의 발판을 굳혔다. 많은 제후국들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초국의 보호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송 양공의 시대착오적인 가문타령 내지 실력의 뒷받침이 없는 외교와 도덕에 의한 전략·전술 규제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른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타기(唾棄)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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