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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銅鐘 껴안은 현존 最古 한옥 교회, 강화성당의 비밀

[명작의 비밀]

  •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불교 銅鐘 껴안은 현존 最古 한옥 교회, 강화성당의 비밀

  • ● 바실리카, 강화도에서 한옥을 만나다
    ● 성공회의 강화도 토착화
    ● 유교·불교·기독교 조화를 이루다
    ● 과감함·치밀함 어떻게 가능했나
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양식 성당이다. [이광표]

인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양식 성당이다. [이광표]

강화성당 천장. 한옥과 바실리카 양식이 혼용돼 있다. [이광표]

강화성당 천장. 한옥과 바실리카 양식이 혼용돼 있다. [이광표]

1900년 11월 강화도 한복판 강화읍 관청리의 야트막한 언덕에 서양 교회가 하나 들어섰다. 개화의 물결을 따라 들어온 서양 교회라고 하면 뾰족지붕 첨탑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어야 할 텐데 그 모양은 한옥을 닮았다. 예상을 벗어난 외관에 강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양 교회와 한옥, 그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은 낯선 풍경이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 건물이다. 사실 한옥 교회는 곳곳에 있다. 그런데 강화성당은 흔히 만나는 한옥 교회와 좀 다르다. 낯선 것과의 만남의 양상이 좀 더 복잡하고 내밀하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섬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일견 바다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항해를 나선 사람들의 시각에서 섬은 일종의 통로다. 바다를 지나 육지나 또 다른 섬으로 이동하는 정류장이 될 수 있어서다.

섬과 바다는 세계로 진출하는 통로였지만 외부 세력이 침투하는 침략의 교두보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근대기 한반도의 섬들이 그러했다. 근대기 외부 세력으로부터 침략당한 섬들은 대부분 정치적·군사적 요충지였다. 요충지는 소통성이 강하다는 걸 의미한다. 결국 섬의 소통에는 안타깝게도 침략이라는 요소가 숨어 있는 셈이다.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20세기 초까지 강화도는 서구 근대 문물 유입의 최전선이었다. 그렇기에 강화도에는 이런저런 근대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근대 역사의 상흔도 많다. 도처에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흔적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군의 ‘외규장각 의궤 약탈’도 이곳 강화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강화도 해안을 따라 조성된 광성보, 초지진 등의 군사 유적도 그 뼈아픈 상흔 가운데 하나다.

강화도, 서양 종교를 만나다

서양 종교는 근대기 강화 사람들이 만난 이국 문물 가운데 하나다. 그 무렵, 서양 종교 유입은 강화도만의 일은 아니었다. 종교의 측면에서 봤을 때, 서구 사회의 종교가 조선 사회에 ‘합법적’으로 유입되는 과정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혹독했던 천주교 박해가 벌어졌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도 이런 격세지감은 없었을 것이다.



강화도 지역에선 어느 곳보다 개신교의 선교가 활발했다. 강화도의 정치·지리적 특성 덕분이다. 감리교, 장로교, 영국성공회의 선교사들이 강화도로 들어왔고 강화도는 초창기 개신교의 전파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개신교의 인천 선교는 1880년대 후반 시작됐고, 강화도 선교는 1893년 처음 시작됐다. 이듬해인 1894년 강화도에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교산교회(감리교)가 생겼고, 이후 선교활동이 확산되면서 1896년 홍의교회(감리교)가 들어섰다. 강화도의 부속 도서인 석모도에도 1898년 첫 개신교회인 삼남교회(감리교)가 세워졌다. 당시 개신교는 선교 과정에서 강화도 주민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손잡고 신교육을 실시하고 계몽운동을 이끌면서 지역과 조화를 이뤄나갔다.

강화人 마음 사로잡은 성공회

1906년 인천 강화군 길상면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의 솟을대문. 이광표

1906년 인천 강화군 길상면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의 솟을대문. 이광표

근대 개신교의 강화도 선교에선 영국성공회(이하 성공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성공회는 초기에 서울과 인천 중심으로 선교를 전개했다. 1891년 서울보다 먼저 인천에 최초의 예배당인 내동교회(미카엘 성당)를 세운 성공회는 1893년부터 강화도 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예비 신자가 생기고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성공회는 1897년 강화성당(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을 설립했고, 이어 1900년 한옥으로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강화성당이다. 이어 1906년 한옥으로 온수리 성당을 신축했으며 이후 1936년까지 계속 한옥으로 교회를 지었다. 1910년에도 석모도 석포리에 한옥으로 석포리교회(성모마리아회당)를 지었다.

이 같은 한옥 교회 신축 분위기는 감리교에도 영향을 주어 1923년 강화도의 부속 도서인 주문도에 감리교 서도중앙교회가 한옥으로 지어졌다. 물론 한옥 교회가 강화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북 김제의 금산교회(1908), 충남 논산 강경의 북옥감리교회(1923), 충북 진천의 진천성당(1923) 등 여러 곳에 있지만 강화도처럼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한옥 교회가 조성되는 사례는 드물다.

성공회 신자도 많았고 교회도 많았다. 1910년엔 강화도의 성공회 교회가 전국 성공회 교회의 37.5%를 차지했다. 강화도가 서울의 관문이었다고 해도 성공회 신자가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두고, 성공회의 ‘강화도 토착화’라고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 여기 어떤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일까.

해군사관학교가 성공회 선교에 미친 영향

우선 강화도 특유의 사상적 정서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곡학(霞谷學)으로 대표되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사상이다. 하곡학이라고 하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와 그 후학의 학문 세계를 말한다. 이들은 성리학의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 중심의 양명학을 토대로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강화도의 이 같은 분위기는 강화 사람들이 서양 종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분위기를 적극 활용했다. 강화도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접목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화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선교 과정에서 강화도의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은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더욱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 샤머니즘, 풍수지리, 불교 같은 전통 신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 전 영국에서 한국 선교 잡지 ‘The Morning Calm’을 창간했다. 이 잡지에 강화도의 문화와 전통, 선교 소감 등을 지속적으로 기고했다. 이 잡지에 열심히 기고한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이 마크 트롤로프였는데 그가 바로 강화성당 건축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영국성공회의 유입과 선교는 당시 고종의 해군 양성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93년 고종 정부는 해군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받아 간부 양성 학교를 강화도에 설립했다.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으로 지금의 해군사관학교인 셈이다.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았으니 교관은 당연히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해군 장교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강화도에 몰렸고, 총제영학당에 대한 강화 주민들의 기대도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성공회의 선교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총제영학당은 이듬해 폐교됐지만, 1897년 성공회가 총제영학당의 교관 관사와 땅을 매입해 선교 본부로 활용함으로써 성공회의 강화도 선교는 더욱 활성화됐다. 고종의 정치·군사·외교적 판단이 결과적으로 성공회 선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유교, 불교 끌어안은 성공회의 집요함

강화성당 정문인 외삼문. [이광표]

강화성당 정문인 외삼문. [이광표]

성공회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강화성당을 짓기로 했다.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1899년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은 한국 문화와 전통에 관심 많은 트롤로프였다. 그는 강화읍 도심의 야트막한 경사지를 구해 배 모양으로 조성했다. 노아의 방주를 본뜬 것이다.

건물은 한옥과 비슷하게 짓기로 했다. 서양 건축양식을 고수하던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 파격적 선교 전략이다. 100년 된 백두산 소나무를 구해 압록강 뱃길로 운반해 들여왔으며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일급 도편수를 초빙했다고 한다. 그 도편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트롤로프가 최고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 어느 정도 심혈을 기울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900년 11월 완공된 강화성당은 국내에 현존하는 한옥 교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석축 계단을 지나면 정문(외삼문)-내삼문(종각)-성당 본당-사제관으로 이어진다. 본당 건물은 중층(重層) 구조의 한옥으로 동서 10칸, 남북 4칸이다.

통상적 방식과 달리 측면을 정면 출입구로 활용함으로써 길쭉한 예배당의 형태를 갖췄다. 외관과 기본 목가구(木架構)는 전통 한옥 양식이지만 내부는 바실리카 교회 양식을 취하고 있다. 바실리카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두 줄의 기둥을 세워 내부 공간을 3분할하는 것이다.

건물은 곳곳에서 한옥의 요소를 살렸다. 성당 지붕 용마루에 올라앉은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그 팔작지붕 합각 아래에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는 한자 현판이 있고, 정면 기둥에는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걸어두는 문구)을 걸었다. 모두 성경 문구를 한자로 해석한 것이다. 내부의 제단 중앙 위엔 하느님을 의미하는 ‘萬有眞原(만유진원)’ 현판이 걸려 있다. 설교대와 세례대 위에도 성경의 의미를 표현한 한자 문구가 여럿 새겨져 있다.

내부 천장 공간은 서로 넘나드는 목가구 부재들이 어우러지면서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렇게 강화성당은 여러모로 이색적이다. 건물 구석구석에 그 낯섦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묘한 매력이다.

트롤로프는 이런 모습을 통해 이질적 서구 종교에 대한 강화 사람들의 거부감을 희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옥 교회 강화성당의 낯섦은 근대기에 들어선 여러 한옥 교회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한국적 전통의 차용과 활용이 좀 더 깊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건 입지와 건물 배치에서 잘 드러난다. 강화성당에 가면 예배당 건물에만 머물러선 곤란하다.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아야 한다. 그러면 예상치 못한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유교적 분위기를 들 수 있다. 강화성당은 입지와 건물 배치에서 한국의 전통 향교(鄕校)와 닮아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단-외삼문-내삼문(종각)-성당 순으로 건물을 배치한 점이 그렇다. 이런 구성은 마을 어귀에 위치한 향교 분위기를 풍긴다. 경사지의 이런 배치는 사찰과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출입문(외삼문)을 보면 영락없는 향교의 분위기다.

불교 사찰의 범종과 비슷하게 생긴 강화성당의 종.[이광표]

불교 사찰의 범종과 비슷하게 생긴 강화성당의 종.[이광표]

강화성당은 또한 불교적이다. 이는 보리수와 동종(銅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화성당의 경내에는 보리수가 있다. 보리수는 불교의 상징이다. 이 보리수는 트롤로프가 인도에 묘목을 직접 주문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동종은 1914년 영국에서 만들어 가져온 것으로, 서양식 교회 종이 아니라 우리네 사찰의 종 모양이다. 그 동종을 내삼문 종각(鐘閣)에 걸어놓았다. 트롤로프가 건축 공간 곳곳에 유교, 불교 등 한국의 전통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질적인 것의 조화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트롤로프의 치밀함과 집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화성당을 보는 여러 시선

강화성당 입구 계단에는 이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제국은 식민통치 말기인 1943년, 대동아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령과 더불어 전쟁 물자 공출을 이유로 강화읍 교회의 정문 계단 난간과 종을 강제로 압수했다. 한일 성공회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성공회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과거 일제가 일으킨 침략 전쟁을 참회하고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동아시아의 평화 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한 2010년 11월, 강화읍 교회 축성 110주년 기념일에 정문 계단 난간을 복원하여 봉헌하였다. 이에 대한성공회는 지난 과거의 과오를 참회하고 평화를 향한 교회의 영원한 사명을 역사 속에서 실천한 일본 성공회의 용기에 감사와 연대의 뜻을 표한다.”

안내문이 감동적이다. 이렇게 난간은 되살아났다. 동종의 경우, 1989년 성당의 신자들이 힘을 합해 다시 만들어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강화성당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강화성당이 건립된 이듬해인 1901년 대한성공회의 1대 주교 찰스 존 코프(C. J. Corfe)는 이렇게 말했다. “새 성당은 다른 건물들과 조화롭게 위치했으며 시내를 품격 있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의 모습이 두드러지거나 오만함은 없습니다.”(‘The Morning Calm’, N.87, 1901. 박장희, ‘영국성공회의 강화도 선교와 특징’)

누군가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은 “강화 도심 한복판 높은 언덕에서 주변 건물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오만함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내밀한 비밀

저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트롤로프의 시도는 매우 과감한 것이었다. 그 과감함은 다른 한옥 교회들과 비교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근대기 다른 지역의 한옥 교회는 대개 밋밋히다. 그러나 강화성당은 전체적인 배치는 물론이고 구석구석에서 치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1906년 건축된 성공회의 강화도 온수리 성당에서도 발견된다. 온수리 성당은 솟을대문의 가운데 칸을 높게 올려 종각으로 활용하고 있다. 놀라운 파격이다. 이 또한 트롤로프가 건축한 한옥 교회다.

어떻게 이런 과감함과 치밀함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트롤로프 개인의 의지와 열정도 작용했겠지만, 강화도 정착 과정에서 성공회가 확보한 자신감이 한몫했기 때문이 아닐까. 잡지를 만들 정도로 한국 문화에 체계적인 관심을 가졌던 성공회 선교사들, 총제영학당 교관 국가로서 누렸던 정치적 이점, 이에 대해 강화도 사람들의 우호적 반응,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트롤로프의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 결과적으로 고종이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강화성당은 단순한 한옥 교회가 아니다. 겉으로 보면 한옥과 서양 교회의 평범한 만남인 듯하지만 그 이면엔 이렇게 복합적인 양상이 중첩해 있다. 시대 흐름의 자연스러운 산물인 것 같지만 거기 정치적 의미가 숨어 있었고 선교사들의 치밀한 열정이 녹아 있다. 이것이 19세기 말~20세기 초 강화도의 분위기였다. 그 복잡다단한 모멘텀이 교회 건축으로 절묘하게 구현된 것이 바로 강화성당이다. 이것이 강화성당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신동아 2022년 7월호

이광표 서원대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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