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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박경리·윤이상의 고향 통영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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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의 보랏빛 하늘

김윤식은 김원일의 ‘노을’을 아주 상세하게 읽는다. 예컨대 그는 ‘노을’에 나오는 철하, 물통걸, 진영 같은 지명에 대해 해명하면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뿐이었는데, 수리시설과 철도 통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모여들었던 것. 일제강점기에 이미 읍으로 승격할 만큼 발달한 진영은 단감 생산의 최적지로 판명되어 일인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진영·김해 사람을 빼면 부산 형무소가 텅 빈다는 속설만큼 여기에 모인 주민들의 성향을 잘 말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좌우익 싸움이 유별나게 벌어진 곳”이라고 썼다.

바로 그 ‘유별난 싸움’을 기록한 것이 김원일의 소설이다. 농산물이 집약되는 곳이었기에 쟁의의 소지가 다분했고, 그래서 광복 이후 좌우 대립이 격렬했으며 급기야 6·25전쟁 중에는 경남 남부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좌우 쟁투가 펼쳐진, 그리하여 이 지역 사람들의 가계는 분단 이후의 남북관계 모두에 핏줄을 나눌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김원일은 장편 ‘노을’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진영 출신의 어느 변호사로부터 ‘소설을 잘 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진영 출신의 변호사가 몇 안 되니 아마 그 변호사가 노 대통령 아닌가’ 하고 김원일은 회고한 적 있다. 만약 이 회고가 맞다면 그 전화는 단순히 동향 출신의 유명인사들이 ‘트고 지내려고’ 인사치레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노을’에 대한, 진영의 슬픔에 대한, 이 한반도의 쓰라린 상처에 대한 답례일 것이다.

김원일의 소설 ‘노을’은 금병산과 봉화산에 대한 멀미 나는 묘사로 끝이 난다. 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왜 김원일이 진영을 물들이는 노을을 ‘붉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묘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을은 산과 가까운 쪽일수록 찬란한 금빛을 띠고 차츰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라색 쪽으로 여리어져, 노을을 단순히 붉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여러가지 색이 교묘히 섞여 있음에도 사람들은 노을을 붉다고만 말한다. 진노란색, 옅은 푸른색, 회색도 저 속에 섞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 뭉뚱그려 구별지어버리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비에 젖은 통영, 동피랑마을

나는, 봄철이라 해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폭우 때문에 통영이 너무 일찍 어두워질 것을 염려하며, 봉하마을에서 통영 쪽으로 길을 서둘렀다. 길게 선회하는 고속도로 대신 마산을 관통해 고성에서 통영으로 직하하는 국도를 잡았다. 길은 평탄했으나 비가 시야를 가렸다.

통영에 당도해 우선 동피랑마을을 찾아갔다. 거제도와 남해도 사이, 바다로 뻗어나온 고성반도 끝자락에 통영이 있고 그중 높은 곳에 동피랑마을이 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라는 뜻으로 실제 주소지인 통영시 정량동, 태평동 일대 산비탈 마을을 가리킨다.

이 높은 마을에 올라서면 왜 통영이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이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통제사영(統制使營)’을 줄인 것이 ‘통영’이다. 옥포해전, 한산대첩, 사천해전, 당포대첩 등 임진왜란 때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격전의 요충지이자 부산에서 여수까지 이어지는 남해안 뱃길의 핵심 거점이다. 한때 거제와 마산과 남해에 지역 중심처 지위를 빼앗겼으나 2001년 통영 대전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그리고 윤이상·박경리·전혁림 등의 문화 자산이 전국적 사랑을 받으면서 통영은 은성(殷盛)한 항구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동피랑마을에 올라서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동피랑마을에서 내려다본 통영.

‘벽화마을’의 여러 얼굴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동피랑은 ‘벽화 마을’로 유명하다.

빗줄기가 바닷바람에 의해 사선으로 몰아치는 중에도 동피랑 언덕에 올라 사진을 찍고 비좁은 골목 사이로 산책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직 동피랑만을 보려 통영을 찾아온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우선 동피랑부터 방문하고 보는 것이 최근의 흐름임은 틀림없다.

부산의 감천마을과 더불어 이곳 통영의 동피랑마을은 이른바 ‘벽화마을’의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동네로 유명하다. ‘동쪽 벼랑’이란 뜻의 동피랑마을은 2006년까지만 해도 재건축이 예정된 낡은 달동네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던 마을이 재건축으로 일거에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푸른통영21 추진협의회’의 윤미숙 전 사무국장이 기획하고 전국의 미대생들이 마음을 더해 벽화를 그린 게 지금의 동피랑마을로 진화했다.

사실 가난한 동네에 벽화를 그리는 유행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이 있어왔다. 생활환경 개선에 관광사업까지 된다 해서 전국의 지자체들이 자기네의 가난한 동네들을 두서없이 벽화마을로 정해 최소한의 미적 기준이나 장소의 의미도 고려하지 않고 덮어놓고 벽화를 그려대는 풍토가 만연했다.

특히 인천 중구 송월동의 ‘동화마을’ 벽화는 지자체가 주민과 지역 예술가들의 반대에도 오직 ‘관광사업’이라는 목적을 앞세워,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곳이다. 국적 불명의 조잡한 그림을 가난한 동네의 벽과 담에 잔뜩 그려 넣는 것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을의 의미와 정체성, 마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감각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벽화란 오히려 마을을 조잡한 구경거리로 전락시킨다.

동피랑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현황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면서 새로운 모색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동피랑 주민들과 예술가들은 이 기이한 열기를 되새기면서 참여작가 공모, 주민 공동기획, 이야기가 있는 벽화 그리기, 마을 벽화와 공공성 토론 등을 아울러 전개했다. 동피랑의 빈집 가운데 다섯 채를 리모델링한 후 화가, 작가, 음악가들이 입주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개별 작업을 하는 것도 이 동피랑의 미덕이다. 주민 모두가 조합원으로 등록된 동피랑생활협동조합이 마을의 기념품 판매점 등을 운영하고 그 수익금을 주민 전체의 공동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도 이 마을의 특색이다.

동피랑마을의 자생성을 마련한 윤미숙 씨는, 통영시의 부당해고에 맞서 승소했고 현재는 전남도청 소속으로 전남의 섬 가꾸기 프로젝트 총괄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2000여 개의 섬마을을 지속가능한 곳으로 재생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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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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