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여의도의 가을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10-04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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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의 가을
    지구온난화 때문인가. 입추는 물론 처서가 지나도록 후텁지근한 날씨가 미혼의 밤을 약탈하곤 하더니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싸늘한 기운이 찾아든다. 하지만 열대야로 늦은 시각까지 몸이 숨막혀 할 때도 우리 머릿속에는 가을이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머릿속 가을이 몸속 가을보다 앞선다는 사실. 이 ‘가을 딜레마’ 때문에 우리는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증권회사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금융의 메카’ 여의도. 여의도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그 자리를 틀고 있다. 여의도의 가을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는 걸까.

    오래전 여의도에 터를 잡은 이들은 여의도공원을 경계로 여의도를 동여의도와 서여의도로 나눈다. 증권사가 들어찬 동여의도와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의 묘한 대칭, ‘정치와 금융’은 여의도를 대변하는 키워드다. 누군가는 밤늦은 술자리에서 여의도를 이렇게 풀어냈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와 돈 냄새 물씬 풍기는 동여의도. 정치와 금융이 아우러진 여의도를 관통하는 진실은 ‘공(空)’이다. 정치도 돈도 영원불멸할 수 없고 덧없이 사라짐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더 치열할 수 있다.”

    그분 넋두리를 뒤로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등 인생무상 타령에 취기가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치열할 것 같은 여의도에서 ‘덧없음’을 얘기하는 것이 언뜻 어쭙잖아 보이지만, ‘덧없음’을 깨달을 때 더욱 치열할 수 있다는 역설.



    2007년의 여의도도 이 ‘덧없음’을 깨달았는지, 동서 양쪽 모두 치열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서쪽 여의도는 국가의 수장(首長)을 뽑기 위한 이슈로, 동쪽 여의도는 사상 최고로 잘나가고 있는 증권시장 이슈로 뜨겁다.

    서여의도 대오 가운데 한쪽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고 대운하에 배를 띄운 상황이며, 다른 한쪽은 여전히 ‘열린’ 채 우두머리 뽑기에 분주하다. 동쪽 일에 바빠 서쪽 사정엔 어두운지라 시시콜콜 서쪽 일을 써내려갈 순 없지만 ‘여의도인’으로서 서쪽에 대한 바람을 담아보자.

    여의도의 가을, 서쪽은 약속을 하느라 분주하다. 대한민국 영토에 세로로 골을 내겠다는 약속에서부터 공수부대를 동원해 멧돼지를 잡겠다는 약속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 퍼포먼스형 약속이 난무한다. 하지만 ‘하겠다’는 약속을 과연 ‘했는가’를 추궁하는 것도 이젠 식상하다. 불필요하고 실익 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아쉽다. 노자 도덕경에서는 ‘위무위(爲無爲), 즉무불치(則無不治)’란 말로 이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하지 않으면 다스리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잠깐 샛길로 빠져보면, ‘하지 않음’의 미덕이 필요한 곳은 비단 여의도 서쪽 동네뿐만이 아니다. 특정 조직의 경쟁구도 속에서 개별 경쟁자는 ‘하겠다’는 공약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실적을 토대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민간기업보다 수치화할 수 없는 행적으로 평가받는 정부기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행적 경쟁구도에서 벌이는, ‘하지 않음’보다 ‘하겠다’는 퍼포먼스가 쓸데없는 제도와 규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여의도 얘기로 넘어오자. 서여의도가 약속하는 데 골몰해 있는 동안 동여의도에서는 종합주가지수(KOSPI) 2000포인트 돌파라는 경사가 있었다. 수십년간 횡보하던 지수대를 지난 여름 뻥 뚫어버림으로써 대한민국 증시의 새 역사를 쓴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스톡 러시(Stock Rush)에 동참한 이들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예기치 않은 소나기에 흠뻑 젖어야 했던 것도 2007년 여름날의 기억이다.

    가을로 접어들어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부시 대통령이 증시 받치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덕분에 현재로선 지수가 반등해 증시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글이 실린 ‘신동아’가 발간되는 시점에는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의 지수 상승이 금융시장 패러다임의 전환 과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거창한 얘기 같지만, 주식에서 크게 돈을 번 지인의 말을 빌리면 “소득 수준별로 선호하는 자산이 있는데, 초기엔 자동차(My car)를 선호하다 소득이 늘면 부동산(My home)을 선호한다. 그 다음이 금융자산(My stock)이다. 강남에 집 가진 것이 부(富)의 기준인 시대를 지나, 우량한 주식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가 부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보유함으로써 손실을 본 개미들이 앞으로는 보유하지 않음으로써 수익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서쪽 여의도에선 미덕인 ‘하지 않음’이 미래의 동쪽에서는 악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 없는 개미들은 공연장 밖으로 나와 간접투자를 통해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것이 어떨는지.

    여의도공원을 파티션 삼아 동·서 여의도를 구분하고 있지만, 양쪽은 영역을 넘나들어 교류할 때도 있다. 서쪽 둥근 지붕 아래에서 쏟아지는 각종 정책이 동쪽 증권선물거래소에서 산출하는 주가지수로 평가받기도 하고, 대선후보별로 관련 테마주가 형성돼 있어 후보의 지지율에 따라 주가가 등락을 거듭하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한 후보가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로 결정되던 무렵, 대부분의 관련주들은 진작부터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주가가 기대심리에 좌우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대통령 당선 기대감이 주가에 고스란히 반영돼 기업의 본질가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주가를 형성하곤 하는 것이다.

    한편 서쪽에서 의사봉을 땅, 땅, 땅 내리쳐 의결한 내용이 동쪽 증권시장의 근간을 바꾸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자본시장통합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은행 중심의 대한민국 금융시장에 빅뱅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2007년 가을 동여의도의 증권회사들이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는 이유도 금융시장의 겨울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여의도의 가을
    이상균

    1977년 울산 출생

    서울대 경제학부 졸업

    증권선물거래소 코스닥 위원회 정보분석팀 근무



    現 경제·금융전문 칼럼니스트, 증권선물 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 근무


    이렇듯, 동·서여의도는 각 권역의 특성을 유지한 채 긴밀하게 교류하며 권역의 이익을 위해서 분주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지만, 여의도의 가을은 언제나처럼 수확을 준비하는 수학(修學)의 계절이다. 동서의 끊임없는 교류와 견제라는 비료가 여의도를 살찌우고 있다. 서여의도는 동여의도에 비친 평가에 골몰하고, 동여의도는 서여의도를 잘 비춰낼 수 있는 효율적인 시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가을, 갈, 갊, 삶…. 가을은 한 해가 가는 것이고, 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고, 또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삶이다. 살아나는 것이 삶이 되었다가 또 이맘때쯤엔 사라지는 것이 삶이 되는 모순, 덧없음 속에서 치열함을 추구하는 여의도의 모순. 여의도의 가을은 모순투성이지만, 그것이 던지는 선문답(禪問答)에서 깨달음을 수확할 수 있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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