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삿짐 싸던 시절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해마다 이삿짐을 싸셨다. 오르는 방값을 감당할 길 없어 매년 더 싼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고, 그러느라 나는 초등학교를 네 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러다 결국 가게 된 곳은 서울 삼양동 산 중턱. 남들은 그곳을 판자촌이라 불렀다. 한겨울, 차다 못해 칼로 베인 듯 손을 아프게 만들던 동네 어귀의 공동 수돗물. 그 물을 길어 집으로 나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우리 가족의 경제위기는,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월급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처음부터 궁핍한 것이 아니라, 점점 궁핍해졌다. 그것은 처음부터 궁핍한 것보다 더 힘들고 절망스러웠다. 요즘 많은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도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 당시의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힘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주눅 들거나 부모님을 원망하며 삐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기억이 내게는 없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태도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월급을 받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진 분은 어머니였다. 바느질을 해 남대문시장에 수예품을 내다 파시고 번 돈으로 우리를 공부시키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 역시,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으로 비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저녁마다 여동생과 나를 불러놓고 호롱불 아래서 한자를 가르쳐주시며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셨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모습만은 잃지 않으셨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당시 우리 가족이 가진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후, 과거 우리 가족이 겪어냈던 고달픔을 여전히 겪어내고 계시는 저소득 빈곤층의 시민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마음이 바빠졌다. 무언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드리고 싶은데,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아서였다. 사실 그동안의 복지 정책은, 일정한 범위에 속하는 저소득 빈곤층에게 일정한 현금을 지급하는 수준의 시혜성 정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는 가난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생각했던 것은, 단순한 생계 유지 위주의 지원에서 그치지 않고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리는 쪽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 어린 시절, 그러한 희망이 나에게 가난을 이겨내는 디딤돌이 되었듯이 말이다.
빈곤의 대물림 막는 ‘희망통장’
결국 지난 10월, 나는 서울시의 새로운 복지정책을 선보였다. ‘서울, 희망드림 프로젝트’다. 이제 서울시에서는 자활 의지가 있는 저소득층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혜택이 더 돌아간다. 저소득 가구가 매월 정기적으로 일정액을 적립하면 그만큼을 함께 적립해드리는‘희망플러스통장’을 비롯해서, 노숙인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 시작한 ‘희망 인문학 강좌’, 저소득 빈곤층 자녀를 위한 ‘꿈나래 통장’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당대에는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자녀들에게는 교육 기회를 제공해서 빈곤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가난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정말 절실한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밥을 굶고, 냉골바닥에서 잠을 자도,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느껴지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쌀독은 자주 비었지만, 우리 가족의 희망만은 한 번도 바닥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