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전세계적 경제위기와 북핵 문제에 직면해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오바마의 대선 승리가 갖는 ‘위대한 함의’를 평가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시각을 가질 필요는 있다. 누군가는 ‘다른 스토리’를 얘기해야 ‘다양성’이 확보된다. ‘합리적 비관론’은 ‘감상적 낙관론’보다 유익할 때도 있다.
11월4일 마침내 WASP(백인·앵글로 색슨계·프로테스탄트 교인)가 주류를 형성하는 미국에서 이 제3세계 출신 흑인은 눈부신 언변과 품격 높은 행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 유권자들이 이룬 ‘인종적 편견의 극복’은 인류사적 진일보였다. 오바마는 ‘변화’와 ‘통합’의 메시지를 제시했다. 그의 이런 처방은 ‘미국의 문제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미국의 TV들은 이번 대선도 이미지 선거로 만들었다. TV는 젊고 잘생긴데다 대중이 열광할 만한 감동적 스토리를 가진 오바마를 선거의 최고 수혜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누가 세계 최강국을 이끌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엔 엄청난 이권과 관련된 힘의 논리와 인과율이 작용한다. 오바마의 승리는 현실적 이해타산의 산물로도 설명되어야 한다. 소속 정당인 민주당에서 기반이 거의 없던 비주류 초선 흑인 상원의원을 대통령으로 밀어올린 현실적 파워 중 하나는 ‘미국의 유대계’라는 시각이 있다.
“이스라엘은 신성불가침”
사실 오바마에 대한 유대계의 첫 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중간 이름이 ‘후세인’이라는 점도 탐탁지 않아 했다. “오바마와 오사마(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의 차이점은 B와 S뿐”이라는 말도 나왔다. 대선 과정에서 오바마와 아랍계를 연관짓는 괴소문이 유포됐다. 오바마는 2007년 3월 아이오와주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큼 고통을 받아온 이들은 없다”고 말해 유대계를 자극했다. 오바마의 결혼 주례를 선 제레마이어 라이트 주니어 목사는 미국의 친(親)이스라엘 정책에 종종 부정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와 유대계 주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2004년 미국 대선 때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해 높은 대중적 지명도를 갖고 있던 유대계 존 케리 상원의원은 1월10일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오바마도 이에 화답했다. 그는 6월4일 미유대인공공정책위원회(AIPAC) 연설에서 유대계가 원하는 것을 약속했다. “이스라엘의 안보는 ‘신성불가침’이며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란보다 이스라엘이나 중동지역 안보에 더 큰 위협은 없습니다.”
미국 내 유대인 수는 700만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2.5%에 해당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이 갖는 위상은 높다. 유대계는 특히 미국 경제의 심장부인 뉴욕 금융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오늘과 내일이 유대인의 휴일입니다. 월가의 큰손들이 대부분 유대인이기 때문에 오늘 미국 증시 거래량은 상당히 적었습니다.”(10월10일 ‘SBS’ 보도)
유대인의 해외자산(3880억달러) 가운데 2700억달러는 미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2000년 미국의 400대 자산가 가운데 유대인은 64명이다. 샌포드 웨일 시티그룹 회장, 모린스 그린버그 AIG 회장, 로버트 벤모세 메트라이프 회장, 헨리 폴슨 골드만삭스 회장(현 재무장관), 리처드 폴스 리먼브러더스 공동회장,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 등 유대계는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미국 금융자본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 바꾼 후원세력
월가를 중심으로 한 유대계 자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신용위기의 쇼크로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대적인 구원과 재건, 회생이 필요했다. 유대계는 그 일을 해낼 적임자로 오바마를 택했다. 오바마가 민주당 경선과 대선 본선에서 각각 민주당의 주류인 힐러리 클린턴과 집권여당 후보인 존 매케인을 누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압도적인 선거자금 모금에 있었다. 정치 신인은 조직이나 자금에서 열세를 보이게 마련이지만 오바마의 경우엔 정반대였다. 한 미국 정가 소식통은 “오바마는 클린턴이나 매케인보다 훨씬 많은 선거자금을 모았다. 여기엔 유대계의 지원이 컸다. 유대계는 일찌감치 오바마를 밀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권에 가장 많은 자금을 대는 로비집단 중 하나인 미유대인공공정책위원회는 오바마를 전폭 지원했다. 이 단체는 대선 다음날인 11월5일 성명을 통해 “오바마 당선자에 대한 유대인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의 발표에 따르면 유대계 유권자 중 78%가 오바마에 지지했다.
오바마의 핵심 측근 람 이매뉴얼은 투자은행 출신 유대계 3선 하원의원으로, 선거자금 모금에 탁월한 재주를 발휘했다. 루빈 전 재무장관, 서머스 총장, 티모시 가이스너 뉴욕연방은행 총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로저 퍼거슨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부의장, 윌리엄 도널슨 전 증권거래위원회 의장 등 유대인이거나 친 유대계 성향인 월가의 주류는 오바마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오바마 진영은 경쟁후보와 비교했을 때 자신의 선거 캠프와 월가 등 미국 재계를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폭넓은 친유대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1월 오바마 진영은 3200만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힐러리 측 모금액 1350만달러를 크게 앞선 금액이었다. 미국 대선에선 모금을 많이 한 후보는 TV광고를 더 많이 내보낼 수 있어 선거에서 훨씬 유리하다. 대선 본선에서도 오바마의 선거자금 모금액은 6억3917만달러로, 집권여당 매케인 측 모금액 3억6016만달러의 두 배 가까이 됐다. 선거 막판 오바마는 미국 주요 TV 방송 황금시간대에 30분짜리 광고를 내보내는 등 물량 공세로 매케인의 추격을 차단했다. 오바마는 7%P 격차로 매케인을 이겼다(53% 대 46%). “한마디로 전파 전쟁에서 공화당은 완전히 패배했다.”(11월8일 ‘문화일보’ 보도)
오바마 살려낸 ‘월가의 이변’
2008년 9월4일부터 15일까지 11일 사이에 일어난 반전도 흥미로운 사건이다. 9월4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지명된 새라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하키 맘’ 신드롬을 일으켰다. 9월7일 갤럽 조사에서 마침내 매케인 후보는 48%의 지지율을 기록해 45%에 그친 오바마 후보를 역전했다. 반면 오바마가 지명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후보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바마는 9월6일 “이어마크(연방예산 특별지출 시스템)를 지지하다 반대로 둔갑했다”며 페일린을 비난했다. ‘변화와 통합’의 오바마는 ‘네거티브’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9월15일 이날 유대계 리처드 폴스 회장이 경영하던 세계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신청했다. 미국 정부는 리먼브러더스에 대한 구제금융을 거절했다. 뉴욕 주식은 2001년 이래 하루 최대 낙폭으로 폭락했다. 노후연금제도도 타격을 받았다. 이는 유권자의 표심에 영향을 줬다. 리먼 사태는 “페일린 효과를 끝내고”(워싱턴포스트) 미국 대선을 경제 논쟁으로 환원시켰다. 이는 집권여당 매케인에겐 직격탄이었다. 오바마는 매케인을 다시 추월, 10%P까지 격차를 벌렸고, 이 추세는 대선 투표일까지 이어졌다.
소식통은 “오바마가 매케인에게 역전당한 직후 월가에서 발생한 리먼 사태는 오바마에게 대선 승리를 안겨준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리먼 사태가 (하필이면) 왜 그 시점에 터졌는가’에 의문을 품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는 리먼브러더스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담보나 재무제표에 우려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리먼브러더스는 기업어음 시장의 최대 발행기관이므로 충격이 엄청나다는 것도 몰랐을 리 없었다고 한다.
“리먼의 청산 시기에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850~900 정도였다. 시장이 판단하는 리먼의 부도 위험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미국은 리먼을 분해시켰다. 4000을 넘어서는 곳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굳이 리먼을 선택한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광범위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만의 특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리먼은 정밀하게 유도된 폭탄이었다.”(10월13일 D증권 P팀장의 ‘증시 제대로 읽기’)
오바마는 초선 의원 임기도 못 채우고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세 제후(유대계, 민주당, 일부 보수층)의 연합’에 의해 옹립된 ‘분권형 군주’로 비유될 수도 있다. 영지(領地)의 주류인 보수성향 WASP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관망적 태도다. 경제를 잘 모르는 그의 앞에는 전대미문의 금융위기가 놓여있다.
‘MB 흑기사’ 부시의 빈자리
오바마는 ‘통합’을 위해선 권력을 배분해야 하고 ‘위기극복’과 ‘개혁’을 위해선 자신과 손발이 맞는 쪽에 실질적 권한을 실어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바마의 일등 공신 유대계의 파워가 부상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금융·경제 정책을 결정할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요직인 백악관 비서실장과 재무장관에 유대계인 이매뉴얼과 서머스, 루빈이 거론되고 있다. 이매뉴얼은 저서 ‘원대한 계획(The Plan)’에서 모든 국민의 군사훈련 및 사회봉사 의무화, 퇴직연금 의무화, 어린이 의료보험 의무화, 대학교육 확대, 중산층 이하 세제개편, 외교·국방의 다자주의, 에너지 절감형 자동차산업 구축을 제시했는데 대부분 오바마의 주요 정책공약으로 채택됐다.
유대계인 데이비드 액슬로드는 오바마의 수석전략가로, 미국 시사 격주간지 ‘뉴리퍼블릭’이 선정한 오바마의 30인 측근 중 1위에 선정됐다. 그는 향후 국정의 중추적 조정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유대계 내에서도 누가 기용되느냐에 따라 월가의 유대계 투자은행(IB)들의 운명은 갈리게 된다. 시카고 사단, 소수인종 출신 등의 다른 측근 그룹도 오바마의 우선 발탁 대상이다.
민주당 주류는 8년 만의 정권교체이므로 하마평이 무성하게 나올 만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은 분위기다. 대선 후 부시 정부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유임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공화당 인사인 콜린 파월, 척 헤이글의 기용 가능성도 거론됐다. 이 같은 보수층 발탁 움직임은 오바마에게 한 자락 의심을 두고 있는 미국의 보수 진영을 향해 “오바마는 엉뚱한 소수파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다.
한국은 민주당을 잘 모르고 유대계는 더욱 모른다. 오바마도 한국에 대한 언급은 ‘김치’와 ‘불고기’ 이외엔 한국 자동차에 대한 거부감 표명 정도였다. 청와대 측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쇠고기 추가협상, 독도 표기 수정, G20 가입, 통화 스와프 체결 등 ‘흑기사’가 되어줬다. CEO, 보수주의, 기독교라는 접점이 있어 부시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친밀감을 갖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정서적으로도 접근한 것은 사실이다.
오바마에게선 아직 이런 ‘훈풍’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바마는 한미동맹을 언급한 적이 없고 확정된 한미 FTA도 ‘모호한 상태’로 돌려놓았다. 금융·북핵 위기에다 국내 지지도 견고하지 못한 이명박 정부는 내년 한미공조가 위축될 경우 작은 충격에도 내상(內傷)을 입을 우려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오바마의 대선 드라마에 감동만 하고 있을 수 없다. 특히 재무, 국무, 국방 분야 진용 구성은 한국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사안이다.
‘충분히’ 지켜보고 ‘선제적’으로
오바마는 내년 1월 오벌오피스에서 서명할 최초의 행정명령을 무엇으로 할지를 결정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한국은 그 때까지 지켜보면서 오바마 대내외 정책의 특성과 방향을 충분히 이해해두는 것이 우선이다. 이어 ‘실용 최우선’ 오바마 정부에 맞는 한미공조 로드맵을 수립해 선제적으로 제안하고 조정해나갈 필요가 있다. 오바마를 둘러싼 새로운 권력지도, 이것의 바탕이 된 미국 사회에 대한 좀 더 세심한 연구와 접근도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대미외교의 지혜와 노련함이 필요하다.
뉴욕증권거래소(오른쪽 깃발이 있는 건물)가 자리하고 있는 월 스트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