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래 별세, 계열분리… 본격 3세 경영 시작
재계 5위→15위→33위→‘40위 아래’ 임박
조홍제, 삼성 이병철과 동업 후 분리
나일론·타이어코드로 재계 ‘빅5’ 등극
조석래, 중공업·스판덱스로 그룹 중흥기 이끌어
‘애물단지’ 효성화학에 그룹 성장 정체
조바심 내려놓고 옳은 방향 찾을 때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그룹 본사 전경. [뉴스1]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효성그룹]
효성그룹은 효성첨단소재와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HIS), 효성토요타, 효성홀딩스USA, 비나물류법인(베트남), 광주일보 등 6개사에 대한 출자 부문을 인적 분할해 ㈜효성신설지주(가칭)를 설립하는 계획을 3월 23일 이사회에서 결의한 바 있다.
기존 지주사는 조현준 회장이 그대로 맡고, 신설 지주사인 HS효성은 조현상 부회장이 대표를 맡는다. 분할 비율은 순자산 장부가액 기준에 따라 ㈜효성 0.82 대 효성 신설지주 0.18이다. 존속회사인 ㈜효성은 연간 매출 규모가 약 19조 원으로 효성티앤씨와 효성중공업, 효성화학, 효성티엔에스 등 기존 사업군을 담당한다. 신설 지주사의 매출 규모는 조 부회장이 독립 경영하는 모빌리티 플랫폼 사업 등을 포함해 7조 원대다. 다만 자산 규모는 5조 원 이하로 대기업집단 지정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 재계 5위였으나…
과거 효성그룹은 1980년 창업주인 고(故) 조홍제 명예회장 시절 2세 승계 과정에서도 세 아들에게 효성·한국타이어·대전피혁을 분리 상속하며 일찍부터 계열분리를 단행했다. 기존 효성은 첫째 아들인 조석래 회장이 이어받았고, 한국타이어는 조양래 회장 몫으로 돌아갔다.
올해 7월 효성그룹의 지배구조 재편은 향후 불거질 수 있는 경영권 분쟁의 불씨를 없애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보인다. 효성그룹은 3세 승계 과정에서 2014년 이른바 ‘형제의 난’으로 이미 한차례 내홍을 겪은 만큼 조석래 회장 살아생전 그룹 분할 방식으로 후계 경영 구도를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석래 회장의 2남이자 조현준 회장의 동생인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일찌감치 승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회사 지분을 전량 매도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2014년부터 형인 조현준 회장을 상대로 횡령·배임 등 의혹을 제기, 고발을 이어가며 효성그룹은 수년 동안 법적 분쟁을 겪은 바 있다.
효성그룹이 독립 경영체제로 전환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책임경영’이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신성장동력을 육성해 주주가치를 제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효성그룹의 주장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효성그룹은 2018년에도 ㈜효성을 지주회사와 네 개의 사업회사로 인적 분할하는 방안을 결의하면서 “기업가치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1998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효성그룹은 효성티앤씨, 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네 주력 계열사를 합병했는데, 이로부터 20년 후인 2018년 다시 투자를 담당할 존속법인인 지주사 ㈜효성과 분할회사인 효성티앤씨, 효성중공업, 효성첨단소재, 효성화학 등 네 개의 사업회사로 지배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효성티앤씨는 섬유·무역 부문, 효성중공업은 중공업·건설 부문, 효성첨단소재는 산업자재 부문, 효성화학은 화학 부문을 맡았다. 국내외 계열사 주식은 신설회사 사업과 연관성이 높은 계열사의 그것은 해당 신설회사로 승계하고, 나머지는 ㈜효성에 존속했다.
당시 효성그룹은 기업가치와 핵심 사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가장 큰 이익을 본 당사자는 조석래 회장 일가였다. 오너 일가의 ㈜효성 지분은 37.77%였으나 분할 과정에서 현물출자와 유상증자 참여 등으로 지주회사 전환 후엔 지분율이 54.72%로 높아졌다.
지난해에도 효성그룹의 경영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여파로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 스판덱스 판매 가격도 하락했고, 타이어 교체 수요 둔화로 타이어코드 쓰임새도 줄었다. 그나마 올해는 미국 전력기기 교체 수요가 높아지며 효성중공업의 실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고, ‘아픈 손가락’이던 효성화학의 베트남 공장 사정도 점차 좋아져 재무구조가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아 보인다.
효성그룹은 1979년 재계 순위 5위(자산 기준)였다. 당시 현대, LG, 삼성, 대우와 함께 ‘5대 그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를 피해가지 못하면서 당시 20개 계열사 가운데 9곳을 매각·청산하며 재계 서열 40위권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창업주 조홍제 “빠른 게 늦고 우직한 것만 못하다”
이처럼 지속적 하락세를 겪고 있는 효성그룹을 보노라면 창업주 조홍제 회장의 ‘만우(晩愚·느리고 우직하다)’ 정신을 되새길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06년 5월 경남 함안의 대지주이던 조용돈의 슬하 2남 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용돈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였다. 조 회장 역시 부친을 따라 한학을 공부하다가 17세부턴 신식 학문을 배웠고, 중앙고등보통학교(당시 중·고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이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해서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엔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한 후 일본으로 간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 회장은 호세이대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한다. 남들보다 늦은 만큼 열심히 학문에 전념했고, 1935년 30세가 되던 해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평생 ‘빠른 게 늦고 어리석은 것만 못하다’는 철학으로 삶을 살면서 그의 자호를 ‘만우’라고 했는데, 그가 겪은 학업의 여정이 첫 번째 이유다.
조 회장은 유학 당시 일본 곳곳 회사들을 견학하며 사업의 꿈을 키웠다. 귀국 후 사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집안 살림을 살피기 위해 고향에 내려와 군북금융조합 조합장으로 추대돼 9년간 조합장을 하면서 경영에 대한 기본 노하우를 습득했다.
1945년 광복을 맞자 그는 사업을 하겠다는 마음을 되새기며 상경했다. 당시 집 근처로 고향 친구이던 이병각(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형)과 이병철 회장이 이사를 왔다. 1948년 11월 조 회장과 이 회장은 서울 종로2가의 한 사무실을 임차해 무역회사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동업을 시작했다. 조 회장이 800만 원, 이 회장이 200만 원을 보태 1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출발했다. 나이는 조 회장이 5살 위였지만 사업 경험이 풍부한 이 회장이 사장을 맡았고, 조 회장은 부사장을 맡았다.
삼성보다 더 밝아지리라… 효성의 시작
조 회장은 사업 초반 주로 홍콩을 상대로 무역업을 했다. 당시 달러가 부족하자 달러 대신 오징어 3만 근을 가지고 홍콩으로 가서 이를 담보로 면사 100근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국 최초의 수출입 외상거래(D/P거래·document against payment base)였다.
수입해 온 면사는 창고에 들어가기도 전 삽시간에 팔려나갔다. 이에 1950년 2월 삼성물산은 총자산이 1억3500만 원으로 성장하는 성공을 거뒀다. 조 회장은 타고난 무역상이었다. 수입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시작했다. 수출 아이템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다 전남 목포의 면실유 공장에 다량의 ‘면실박(목화씨에서 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 1만3000t이 방치된 것을 보고, 홍콩을 경유해 영국에 이를 파는 삼각무역을 성사시켜 약 3만 달러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삼성물산이 부산으로 이전했을 때엔 고철을 일본에 수출하고 홍콩에서 설탕, 비료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엔 전쟁 여파로 생산 공장 대부분이 파괴된 직후라서 생활 물자 결핍이 극에 달했고,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이에 삼성물산이 수입한 물자는 며칠 만에 가격이 몇 배로 치솟아 삼성물산이 폭리를 거둘 수 있게 했다.
삼성물산은 이렇게 벌어들인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제조업 진출을 결심했다.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 기업으로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검토한 끝에 설탕 제조업을 선택한 조 회장과 이 회장은 일본 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을 섭외해 4개월 만에 하루 생산 35t 규모의 설탕 공장을 가동했다. CJ제일제당의 모태인 제일제당의 시작이다. 제당 사업 성공은 국가적으로도 수입대체를 이룩해 외화 절약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9월 삼성물산은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명품 원단 ‘골덴텍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만인 1958년 흑자를 내며 명실상부한 한국 제1의 기업 자리를 굳혔다. 다만 같은 해 이 회장은 조 회장에게 동업을 청산하자고 요구했고, 지분 정리 문제로 둘은 갈등을 겪게 됐다. 그러다 결국 1962년 동업관계는 마무리됐다.
조 회장이 회사 이름을 ‘효성(曉星)’이라고 지은 이유는 별이 3개인 ‘삼성(三星)’보다 더 밝은 회사로 만들겠다는 각오와 동업자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담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1962년 9월 임직원 15명인 조촐한 규모의 무역회사 ‘효성물산’을 차린 뒤 곧바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조 회장의 나이 56세 때다. 이 역시 그의 호 ‘만우’처럼 느린 시작이었다.
창업 17년 만에 5대 재벌로
사실 동업 청산 땐 제일제당을 조 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이 회장이 갖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제일제당을 넘겨준다던 이 회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1965년 조 회장이 한국타이어 주식 50%, 안국화재와 천일증권 등의 주식을 받는 것으로 갈등을 매듭지었다.
한국타이어는 일본 브리지스톤타이어의 한국자회사로, ‘조선다이야공업’이라는 이름으로 1941년 설립됐다가 광복과 함께 한국 정부 재산으로 귀속됐다. 1958년 12월 삼성물산이 지분 49.5%를 인수했고, 동업 청산으로 조 회장이 관리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타이어는 9억 원의 부채를 안고 한일은행 관리하에 있던 부실기업이었다.
타이어 수요가 많지 않다는 비판·우려에도 조 회장은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이후의 산업을 전망해 보며 타이어 산업의 고도성장을 확신했다. 그의 예측은 곧바로 적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국산 승용차가 출시되고,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물동량이 늘어났다. 또 중동을 중심으로 수출 시장도 확대되는 등 타이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조 회장은 1967년 부채를 모두 상환하고 경영정상화를 이뤄내기에 이른다.
여기에 조 회장은 주력사업으로 ‘기간산업’이면서 ‘수입대체 효과가 큰’ 사업을 더 하고자 했고, 이 원칙 아래 나일론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나일론 사업은 엘리트 그룹으로 구성된 조 회장 직할 기획부가 주도했고, 1966년 11월 ‘동양나이론주식회사’(이하 동양나이론)를 설립했다. 조 회장의 나이 만 60세로 독자 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아들 조석래 회장이 경영에 참여해 도움을 주기 시작한 즈음이기도 하다.
동시에 조 회장은 후발업체로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국내 최초 타이어코드지(T/C지) 생산공장 준비를 병행해 1967년 11월 나일론 원사의 타이어코드지 개발에 성공했다. 1968년 4월 동양나이론은 시운전을 시작했고, 나일론 원사가 쏟아져 나왔다. 동양나이론의 나일론 원사의 상표는 ‘토프론’으로 정상을 의미하는 ‘톱(TOP)’과 나일론의 ‘론(LON)’을 합성해 만들었다.
이후 조 회장은 1970년 한일나일론 인수, 1973년 동양폴리에스터 설립,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을 설립하는 등 제2의 창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나갔다. 1975년 종합 무역상사로 지정받은 효성물산은 1975년 매출액 196억 원, 1976년 545억 원을 달성했다. 이후에도 사업 영역을 넓혀 1979년에는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효성그룹’을 형성하며 한국의 5대 재벌로 올라섰다.
2세 조석래, 효성그룹 중흥기 이끌다
2004년 중국 가흥 타이어 공장을 방문한 당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효성그룹]
이후 1984년 조 회장이 별세하자 조석래 회장이 효성그룹을 이어받게 된다. 조석래 회장은 1982년부터 2017년까지 35년간 효성그룹의 경영을 담당하면서 효성그룹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는 1935년 경남 함안 태생으로 경기고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공대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창업 세대 혹은 창업주 2세 가운데엔 드문 ‘엘리트’였다.
1966년 귀국해 아버지 조홍제 회장이 세운 동양나이론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입사와 동시에 관리부장으로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에 투입됐다. 효성그룹 내 첫 직책이었다. 4년 후인 1970년 동양나이론이 한일나이론을 인수하면서 조석래 회장은 대표이사에 올라 본격 경영에 나섰다.
그는 공학 전공자로서 기술 확보에 공을 들였다. 1971년엔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했고, 탄탄한 기술력을 기초로 한 신사업을 펼쳤다. 1973년 설립한 ‘동양폴리에스터’로 폴리에스터 사업까지 성공한 뒤, 1980년대 후반엔 합성섬유를 넘어 합성수지인 폴리프로필렌 사업에 도전했다.
기술에 대한 그의 집념 덕분에 효성그룹은 1978년 타이어에 들어가는 필수 섬유 소재인 타이어코드 국산화에 한발 더 진일보한 성과를 거뒀다. 타이어코드는 1960년대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해 온 물자였는데, 동양나이론이 1968년 국내 최초로 ‘나일론’ 타이어코드 생산에 성공한 지 10년 만에 국내 최초 독자 기술로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 생산까지 이룬 것이다. 효성그룹의 타이어코드는 세계 수위권 타이어 업체들과 장기 계약 및 대륙별 생산체제 구축을 이뤄내며 2000년 세계시장 1위에 오른 뒤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은 섬유산업을 넘어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군을 넓혔다. 1975년 그는 아버지 조홍제 회장에게 1969년 한국 최초로 154㎸ 초고압 변압기 개발에 성공한 한영공업 인수를 제안해서 1975년 성사시켰으며, 이를 효성중공업으로 탈바꿈시킨 후 1981년 765㎸ 초고압 변압기를 최초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인수해 키운 효성중공업은 현재 그룹의 중추적 ‘캐시카우’이자 효성그룹 미래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 실적 청신호가 켜진 가운데 신사업 효과까지 더해져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타 계열사들의 재무구조가 악화한 것과 달리 효성중공업 성장세는 가시화되고 있다. 조현준 회장이 독립 경영의 닻을 올린 가운데 효성중공업의 역할론이 대두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유수의 대기업집단이 나가떨어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도 효성그룹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스판덱스 사업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섬유 부문의 집적된 기술개발 노하우는 아라미드와 탄소섬유 등 고성능 특수섬유 개발로 이어졌고, 현재 바이오·스마트 섬유 등을 연구하는 기반이 됐다.
3세 조현준·현상의 ‘숙제’
2017년 1월 조현준 회장이 효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밝힌 포부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첫 번째 걸음으로 2018년 효성화학 베트남법인을 세우고 1조 원 규모 투자를 통해 LPG저장소, 프로판탈수소화(PDH), 폴리프로필렌(PP) 공장 등을 준공, 대규모 화학단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진 못했다. 2021년 말 완공된 PDH 설비가 정밀 점검, 보수 등의 이유로 수차례 생산 중단 사태를 맞은 데다 글로벌 수요 감소 및 원가 부담으로 영업에 차질이 생겼다.
이러한 이유로 효성화학은 그룹의 ‘애물단지’가 됐다. 영업손실이 누적되며 재무구조가 불안해졌다. 자칫 그룹 전반으로 위기가 확산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적잖다. 효성화학은 지난해 1월 1200억 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에 나섰지만 주문을 단 한 건도 받지 못했다.
지난해 3월 기준 효성화학의 부채 총계는 3조2764억 원, 부채비율은 무려 9940.57%였다. 2022년 말(2631.81%)과 비교했을 때 7308.76%포인트 급증한 수치로, 당시 코스피 상장사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효성화학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지난해 5월 토지 재평가를 시행, 1500억 원의 자본을 확충했지만 개선은 미미했다. 8~9월엔 KB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을 대상으로 1000억 원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고, 10월엔 효성을 대상으로 500억 원 규모의 3자 배정 유상증자도 진행했다.
당시 효성은 신주 인수 할인율을 ‘0%’로 정했다. 통상 3자 배정 유상증자는 시가 대비 10% 이상 할인율을 붙인다. 0%라는 수치는 효성화학을 살리려는 그룹의 절실한 의지가 반영됐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효성화학의 재무구조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효성화학은 특수가스사업부를 분할해 지분을 최대 49% 매각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특수가스사업부는 삼불화질소(NF3)를 생산하는 ‘알짜 사업부’다. NF3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제품 제조 공정에서 이물질을 세척하는 데 쓰인다.
지난해 효성그룹 전체를 놓고 봐도 상황은 썩 좋지 않다. ㈜효성은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944억 원으로 2022년 대비 45.4% 증가하긴 했지만 매출은 3조4367억 원으로 1년 새 7.6% 감소했다. 순손실도 4억4000만 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정리하면 효성티앤씨와 효성중공업이 ‘선방’하고 있고, 효성화학을 비롯한 다른 계열사 실적은 여전히 불안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2017년 1월 16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 본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효성그룹]
또 ‘그린경영비전 2030’을 기반으로 친환경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제품, 소재, 비즈니스 모델을 지속 확대하며 ‘수소에너지’ 분야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베트남 투자에만 집중하는 양상이다.
2018년 효성화학의 투자 실패에도 베트남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10월 14일에도 그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팜 민 찐(Pha.m Minh Chı′nh) 베트남 총리와 한 회동에서 향후 베트남에 4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2024년 11월 3일은 효성그룹 창립 58주년이었다. 효성그룹은 3세 경영을 시작하며 새 사업을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 때문인지 다급하게 조바심을 내며 달려가고 있다. 창업자 조홍제 회장의 만우, 즉 ‘빠른 게 늦되고 어리석은 것만 못하다’는 철학을 기초로, 새 도약을 위해선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으로의 사업 토대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홀로 방향타를 잡은 ‘새벽별’ 그룹 3세 경영자들이 어떤 방향으로 그룹을 이끌어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