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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살아서 100만 달러 받는 화가 다섯은 있어야 하는데…”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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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가자, 그리고 보자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소속 작가의 그림 앞에 선 이호재 회장. 이 회장은 “해외 거물 화상과 교류하면서 세계시장 진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쉰넷, 그가 가나화랑을 창업한 건 스물아홉 때였다. 우연이었다. 글쎄 그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인 듯 시작됐지만 실은 중학교 재학 때부터 그림이 좋았고 내심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기를 꿈꿨다. 제대할 무렵 군대 친구가 운영하는 화랑에 자주 들렀다. 마침 화랑이 제법 활황일 때였다. 동업자가 필요한 친구가 그에게 같이 일하자고 프러포즈해왔다. 학원강사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지만 화랑 일이 즐거웠고, 설명 못할 이끌림이 있었기에 청년 이호재는 직장을 옮긴다. 그리고 그 고려화랑에서 4년을 일한다.

고려화랑에서 그의 임무는 고객을 직접 방문해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말이 판로개척이지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으니 문전박대가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재계 인명록을 구해 그걸 동네별로 정리하는 일, 요즘말로 하자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다. 차츰 어느 동네 어느 모퉁이에 어느 회장 집이 있는지를 훤히 꿰게 됐다. 이른 새벽 그 집 앞에서 주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일주일쯤 기다리면 회장님과 대면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한두 점씩 그림을 팔았다.

그러면서 재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혔다. 신뢰도 생겼다. 오히려 고객을 통해 그림 보는 안목도 늘어갔다. 성실하고 유능하고 정직한 이호재를 찾는 고객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동업하던 친구 염기설(현 예원화랑 사장)과 걸핏하면 화랑의 미래를 설계하곤 했다. 요즘 표현으로 둘은 젊은 벤처기업인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건 국내시장에서의 성공이었다.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시장에서는 이미 궤도에 오른 화랑이 여럿이고 유명 화가는 전속화랑이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해외시장이 궁금했다. 바깥 구경이 하고 싶었다. “기왕에 힘들 거라면 큰물에서 힘들자” 싶었다.



마침 세계를 돌 수 있는 1999달러짜리 티켓이 있었다. 고려화랑을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북반구 일주 비행기 티켓 두 장을 샀다. 일단 두 번을 돌자. 그러면 뭔가 보이겠지! 파리, 런던, 뉴욕, 도쿄로 일정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첫 번째 도착지인 파리에서 그는 두 번 놀란다.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르누아르, 세잔 같은 거장의 작품들이 화랑에 버젓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거래도 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놀란 건 파리에 상상보다 많은 우리나라 작가가 작업하면서 살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100명 이상의 재불 작가가 작업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림만 그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겐 작품 판매는 고사하고 전시회 참여의 기회조차 없었다.

훗날 (1990년대 후반) 해외 아틀리에 를 뉴욕에 둘까 파리에 둘까 고민할 때 파리를 선택한 것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화가들이 최소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세계를 돌며 해외 미술시장의 가능성을 직감한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의 화랑을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그게 1983년이다. 가나화랑이라고 인사동 모퉁이에 자신만의 간판을 걸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한다는 의미로 가나라고 이름지었다.

해외 거물 畵商과의 우정

가나화랑은 지금 세계적 규모의 화랑으로 성장했다. 직원이 100명을 넘는 화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처음에 이호재 회장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한창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니 고객에게 피해를 줘서도 안 되고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화랑주의 삶의 핵심은 작가들과의 관계이니 작가에 관한 얘기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개인적 삶에 관한 부분은 한 10년 후에나 털어놓겠다고 했고 나는 동의했다. 권위적이지도 음흉하지도 않은 성격이라 인터뷰 도중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일단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그의 성공비밀은 막강한 해외 네트워크에 있는 것 같다. 세계 여행에서 돌아와 가나화랑을 설립해놓고도 그는 대부분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다니엘 말링규(Daniel Malingue),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부르노 비쇼버거(Bruno Bisoburger), 바이엘러(Beyeler) 등 거물 화상(畵商)들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눈빛을 가진, 수줍지만 열정적인 이 동양 청년에게 호감을 가졌다. 무엇이든 도와주지 못해 애를 썼다.

그중 다니엘 말링규는 인상파 작품을 거래하는 화상으로 이호재 회장이 만난 최초의 국제적 미술계 인사였다. 그는 부르델, 로댕, 샤갈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제 미술시장의 큰 고객이던 일본 컬렉터들에 대한 비즈니스를 이 회장이 맡아주기를 기대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사업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록 한국에서는 국제 미술시장 정보가 없어 말링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판로를 구축할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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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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