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첫 홈런, 첫 안타, 첫 타점 주인공
- 은퇴식조차 없이 자신 버린 삼성에 애증 교차
- 미국 팬 경악시킨 ‘코리안 홈런킹’ 타격 시범
- 선수 시절 우승 못한 아쉬움 채워준 월드시리즈 우승
- 한국에선 ‘헐크’, 미국에선 ‘빅 스마일’
- 학창시절 11년간 하루 4시간 잠자며 연습 몰두
유니폼이 달라지고, 임무도 선수에서 수석코치로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유쾌한 헐크’였다. 잠시도 얼굴에서 웃음꽃이 떠나질 않았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이지만 청바지에 가죽점퍼가 잘 어울리는 것도 웃음이 가져다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홈런 뒤엔 빈볼
이 코치가 나타난 뒤 SK 훈련장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는 그라운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선수단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선수들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쭈뼛거리는 선수들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한다. 처음엔 좀 어색해하던 선수들도 이젠 그와 눈이 마주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SK 김성근 감독이 그를 영입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코치 자신도 의욕이 넘치고 신이 난다. 몇 번이고 “한국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한다.
10년 만에 국내 그라운드에 돌아와서 그가 실감한 것은 선수들의 기량과 체격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현역 시절에는 자신도 ‘한 덩치’(175㎝, 84㎏) 했지만 지금 선수들과 비교하면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특히 새내기 왼손투수 김광현(19·안산공고 졸)의 기량에 놀랐다. “공도 빠르지만 무엇보다 공을 던질 때 손이 안 보인다. 마치 피칭머신에서 갑자기 공이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지난해 신인왕과 MVP(최우수선수)를 석권한 ‘슈퍼 루키’ 류현진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만한 기량”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이 코치가 온 뒤 SK와이번스 선수단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그는 현역 때 누구보다 즐겁게 야구를 했다. 홈런을 치면 만세를 부르고 펄쩍펄쩍 뛰면서 베이스를 돌았다. 또한 포수 마스크 뒤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옛날에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설레발 떤다(설친다)고 싫어했어요. ‘지가 스타면 스타지…’ 하는 비아냥도 들었죠.”
쾌활한 성격 탓에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홈런을 친 다음 타석에선 걸핏하면 몸에 공을 맞곤 했다. 약이 오른 상대투수가 작정하고 빈볼을 던졌기 때문이다. 1991년부터 2년간 삼성라이온스 사령탑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그를 걱정해서 “앞으론 홈런 친 뒤에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두 달 후 이만수는 “야구가 재미없어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처럼 야구를 즐겁게 하는 선수였다.
미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수들과 서투른 영어로 농담도 하고 하이파이브도 나눴다. 팬과도 유쾌하게 만나다보니, 경기 시작 전 선수단을 소개할 때면 감독 못지않게 큰 박수를 받았다. 어느 날인가는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를 하면서 카메라가 이 코치를 오랫동안 비췄다. 그리고 해설자가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괴롭고 울적하면 야구장에 오라. 불펜에 리 코치가 있다. 그의 얼굴만 보면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빅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는 자기 팀 ‘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해서 ‘앰버서더’로 불렸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 시카고 지역신문에 그의 귀국 소식이 보도된 것은 당연했다.
‘스포테인먼트’
2002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다시 만난 선동렬(왼쪽)과 이만수. 둘의 대결은 1980년대 후반 한국 프로야구의 빅카드였다.(왼쪽) 현역시절 이만수는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다.(오른쪽)
그런데 여행지에서 돌아와 보니 SK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다. 그때까지 SK가 자신을 영입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는 전혀 접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SK 구단의 야구 철학. 자신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SK야구단 신영철 사장이 ‘우리 선수들은 안타를 치고도 웃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팬들이 즐거워하겠느냐’고 하셨어요. 전적으로 공감했죠.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구단이라면 한국에서 야구를 다시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문제는 화이트삭스와의 계약을 해지하려면 거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구단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더니, 뜻밖에도 위약금 한푼 받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가 7년 동안 화이트삭스 구단에 기울인 정성과 신뢰의 결과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말 귀국하자마자 인천에 집을 마련했다. 부모, 형제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팀에 소속됐으면 인천 팬과 생활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팬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팬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이 코치는 팬이 많다. 현역 시절 올스타 최다 득표를 네 차례나 차지했다. 그가 귀국했을 때 10년 만의 귀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팬이 나와 그를 반겼다. SK야구단 박철호 홍보팀장은 “이 코치가 입단한 뒤 구단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급증했다”며 “SK로 응원팀을 바꿨다거나, 삼성 다음으로 SK를 응원하겠다는 글이 많다”고 귀띔했다.
팬과 얽힌 일화도 많다. ‘헐크’라는 별명도 팬이 지어줬다. 홈런을 친 뒤 포효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이 팬이 지어준 것. 그는 ‘헐크’라는 별명이 자신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좋아했다.
얼마 전에는 SK 구단 사무실로 팩스가 날아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사는 사이토 유키라는 30대 일본인 여성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원정경기를 올 때마다 야구장을 찾은 이 코치의 열성 팬이다. 그는 “이 코치가 항상 웃으며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줘서 남편과 21개월 된 아들이 매우 행복했다”며 “SK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가고 싶은데 전지훈련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온 것이다. SK 구단은 답장과 함께 SK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이 코치의 사진을 보내줬고, 사이토씨는 “2월 중순쯤 일본 전지훈련지로 이 코치를 만나러 가겠다”고 전해왔다.
이 코치는 “미국 야구장에서는 맥주 한 컵에 5달러나 하는데도 꼭 야구장 안에서 사 먹는 열성 팬이 많다. 자신이 돈을 써야 선수의 연봉도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프로는 팬과 공존해야 살아남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프로야구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982년에 생겼다. 그는 “프로야구가 생기지 않았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삼성라이온스에 입단한 그는 1982년 3월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청룡과의 개막전에서 첫 홈런, 첫 안타, 첫 타점을 올리며 한국프로야구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리고 1984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홈런, 타율, 타점왕을 석권하는 타격 3관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22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지난해 롯데 이대호가 사상 두 번째로 타격 3관왕을 차지했다.
삼성과의 애증
SK와이번스 수석코치를 맡아 10년여 만에 국내 프로야구 무대에 복귀한 이만수.
아울러 현역시절 상대 선수가 기록을 세우지 못하도록 정면승부를 피한 것도 반성했다.
“물론 고의사구 지시를 받고 한 일이지만 포수로서 제게 책임이 있죠. 미국에서 야구를 배우면서 이젠 그런 야구를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수 시절은 화려한 순간이 훨씬 많았다. 1983년부터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고, 1983년에는 MVP에 선정됐다. 타격왕과 타점왕 타이틀도 각각 세 차례씩 거머쥐었다. 골든글러브를 다섯 번이나 받았고, 올스타전에 12번이나 출전했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이자 최고의 포수였다.
1984년 타격 3관왕을 거머쥔 뒤 일본에 전지훈련 갔을 때는 긴테스 버팔로스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긴테스와의 연습경기에서 홈런을 2개나 치자 긴테스 타격코치가 전격 제안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 프로야구 선수가 일본에 진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도 된다”며 껄껄 웃었다.
그의 선수 시절, 삼성라이온스와 해태타이거즈의 경기는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대구와 광주를 연고지로 한 팀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경기장엔 늘 긴장이 흘렀다. 당시 해태에는 선동렬을 비롯해 김봉연, 김성한 등 대단한 선수가 많았다.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와 3번(1986, 87, 93년) 만나 3번 모두 쓴잔을 마셨다. 그는 “해태 선수들은 우승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반면 삼성 선수들은 심적 압박감이 커져갔다. 그래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프로야구 16년 동안 통산 타율 0.296, 252홈런, 861타점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1997년 은퇴했다. 정확히 말하면,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어한 그를 삼성이 방출했다. “만으로 마흔 살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죠. 그런데 1년을 마저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흔한 은퇴식조차 없이 자신을 버린 삼성에 애증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등번호 2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 것도 팬들의 요구로 한참 뒤에 이뤄진 일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6년 뒤에 일어났다.
2003년 10월, 삼성이 그를 코치로 영입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팀도 아니고 친정팀에서 불러주니 기분이 더 좋았다. 한국 야구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 뒤 삼성이 영입의사를 철회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철회 사유가 ‘이만수의 무리한 요구조건’이라는 보도였다. 아내는 충격을 받고 몸져누웠다. 이 코치는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기는커녕 정식으로 영입 제안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귀국하던 날, 인천공항 출입구에는 ‘희망의 도시 일류 대구’라는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그는 기자들이 삼성에 대해 묻자 “삼성라이온스의 우승을 축하한다. 과거는 과거고, 이제는 추억일 뿐”이라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이냐고 묻자 그는 “삼성은 16년 동안 몸담은 팀이고 저를 응원했던 많은 팬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애정이 있다”며 “삼성에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했다. “이제는 지도자로서, 어느 특정 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원하는 구단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으냐”고 했다.
갈라진 손, 뼈 보일 만큼 방망이질
이만수는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원대한 꿈을 가졌고, 그 꿈을 하나씩 실현해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대한민국 최고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재학 때부터는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대학 졸업하던 해에 프로야구가 생겨 그는 굳이 미국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현역 시절에는 마흔 살까지 선수 생활을 하겠다는 꿈을 가졌고, 은퇴 후에는 메이저리그 코치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대구중학교는 초등학교에서 선수를 스카우트하지 않고 재학생을 대상으로 뽑았다.
“하루는 ‘야구 하고 싶은 사람은 방과후 운동장으로 나와라’고 하더군요. 전교생이 거의 다 나왔어요.”
첫 테스트는 달리기였다. 1000m, 500m, 100m, 50m 달리기를 시켰다. 그는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 도루도 제대로 못한 선수가 무슨 발이 빨랐겠냐고 하겠지만, 그때는 제가 제일 빨랐어요. 그런데 그놈의 포수를 하는 바람에 히프가 커지고 무릎이 굳어서….”
다음은 캐치볼 테스트. 그때껏 그는 한번도 야구공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글러브도 난생 처음 껴봤죠. 그런데 야구선수가 되려고 했는지, 눈을 감고 공을 잡았는데 공이 글러브에 쏙 들어가버렸어요.”
합격이었다. 그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1학년은 12∼13명만 남았다. 그런데 야구를 늦게 시작한 탓에 잘 따라가질 못했다. 선배들 물 떠다주고 운동장 돌 줍는 게 일이었다. 유니폼도 없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더그아웃에 앉아 소리나 질렀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됐다. 어느 날 3학년 선배들이 버릇이 없다며 한 명씩 나오라고 한 뒤 ‘빠따’를 때렸다.
“사정없이 열 방을 때리더라고요. 궁둥이가 터져버렸어요. 열네 살 어린아이를…. 어둑어둑해져 집에 가는데, 반짝이는 별을 보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너무 억울했어요.”
그날 밤 독하게 결심을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앞으로 10년 동안 4시간만 자기로 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꿈을 가졌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너무 억울해서 그랬나 봅니다.”
다음날부터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대구 앞산까지 왕복 2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방망이를 잡고 치고 또 쳤다. 손바닥이 갈라졌다. 장갑도 없었다. 한겨울에는 갈라진 손이 아물지 않아 뼈가 보이기도 했다. 1년을 그렇게 했는데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을 유급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3년째 되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통하게 방망이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쳤다 하면 홈런이었다. 포지션도 우익수에서 포수로 바뀌었다.
“천하무적이었죠. 따라올 선수가 없었어요. 중학교를 4년 다니고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11년을 4시간씩 잠자면서 훈련했어요.”
도살장 끌려간 소
그의 두 번째 꿈은 미국 진출이었다. 국내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메이저리거의 꿈을 접은 그는 은퇴 후 미국에서 야구 공부를 할 참이었다. 처음엔 2년만 연수하고 오려고 했다. 그런데 2년으로 120년 메이저리그 역사를 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마이너리그 코치로 5년, 그리고 메이저리그로 승격해 거기서 5년을 더 하기로 마음먹었죠.”
마이너리그에서 2년, 메이저리그에서 7년을 생활했으니 꿈을 초과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그의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98년 3월, 그는 자비를 들여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났다.
“운동만 하다보니 공부를 못했어요. 영어는 ABCD밖에 몰랐죠. 참 힘들었습니다.”
미국 에이전트는 소개도 안 해주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이 훈련하던 플로리다 캠프에 그를 떨궈놓고 가버렸다. 캠프에는 트리플A, 더블A, 싱글A상, 싱글A하, 루키까지 모두 다섯 팀이 있었다. 야구장도 일곱 군데나 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말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리∼, 리” 하고 불렀다. 백인이었다. 그를 놓치면 ‘미아’ 신세가 될 것 같아 그의 백넘버를 적고 얼굴형태를 자세히 기억했다.
첫날을 그렇게 보낸 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야구장에 나가기가 싫었다. 한국으로 도망가려고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다 풀었다.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야구장에 나가 그 백인 코치만 빤히 쳐다봤다. 미팅이 끝난 뒤 그가 일어나자 잽싸게 쫓아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오냐, 오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어제는 오라고 해놓고 오늘은 왜 오지 말라고 하는지….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코치가 ‘리, 리’하면서 부르더군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마이너리그 다섯 팀을 돌아가면서 연수받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싱글A하팀 경기에서 3루 작전코치로 나가게 됐다. 그는 3루 코치박스에서 “렛츠고, 컴온…” 하면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경기는 지루했다. 5회까지 점수가 한 점도 나지 않았다. 200여 명의 관중도 지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주심이 그에게 오더니 느닷없이 “겟아웃(퇴장)!”이라고 외쳤다. 이 코치는 황당해서 한국말로 대들었다. 영어와 한국말이 뒤섞여 싸우는 모습에 관중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줘야 할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웃기만 했다. 발길을 돌려 퇴장하는 순간, 감독이 걸어왔다. 그리고 감독과 심판은 웃으며 “조크”라며 했다. 알고보니, 5회가 끝난 뒤 양 팀 감독과 심판이 짠 각본이었다. 지루해하는 관중을 위한 일종의 ‘팬 서비스’였다.
“제 얼굴이 벌개졌죠. ‘나를 가지고 놀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시방석이었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컸다. 마이너리그는 물론 메이저리그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는 갑자기 유명인사가 돼버렸다.
그가 유명해진 사건은 하나 더 있다. 클리블랜드 싱글A팀 애크론애로스 코치로 있을 때 동료 코치들은 그가 ‘한국의 홈런왕’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이너리그 총감독이 “타격시범을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은퇴하고 6개월 넘게 방망이조차 잡아보지 않은 그였다. 마이너리그 코치들과 150명의 선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타격 시범이 펼쳐졌다.
“3만 관중 앞에서도 떨지 않던 제가 처음 떨어봤어요. 외야 펜스가 아득해 보이더라고요. 센터는 한국과 비슷한데, 좌우 펜스는 4∼5m 멀죠. 게다가 마이너리그 구장은 외야에 관중석이 없이 탁 트여 있어서 더 멀게 느껴졌죠.”
초구를 쳤다. 그런데 좌익수쪽 펜스에 정통으로 맞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10개 공 중에 7개가 담장을 넘었다. 보는 이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마이너리그 총감독은 “바람 때문이다. 내일 다시 하자”고 했다. 다음날 메이저리그 선수도 몇 명 와 지켜봤다. 이날 10개의 공 중에서 8개가 담장을 넘어갔고,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사실이 지역신문에 실리면서 그는 또 한번 유명세를 치렀다.
‘브리토’의 아버지
이 코치는 이듬해 클리블랜드 싱글A 팀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팀으로 스카우트됐다. 보직은 불펜코치. 그런데 타격코치 게리 워드의 텃세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걸핏하면 “김치냄새 난다” “마늘냄새 난다” “영어 못한다”고 구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미니카 출신의 선수 틸슨 브리토가 그에게 타격 지도를 부탁했다. 워드는 타격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어릴 때부터 익힌 선수들의 습관을 존중해 여간해선 타격 폼을 수정해주지 않는다.
이 코치는 난감했다. 미국에선 자기 분야가 철저하기 때문에 그에게 타격지도를 했다가는 워드에게 면박을 당할 게 뻔했다. 하지만 브리토는 포기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않으면 도미니카에 있는 가족의 생계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조건을 달아 가르쳤다. 자신의 컴퓨터에 입력된 브리토의 장단점을 보여주며 타격 폼을 잡아줬다. 타율 1할에 불과하던 브리토의 타율이 그 후 쑥쑥 올라갔다. 그런데 신이 난 브리토가 동료들에게 ‘비밀’을 말했고, 워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워드가 저에게 다가오더니, ‘퍼큐’라고 욕을 하더군요. 정말 난감했어요.”
그런데 체드 머톨라라는 근육질의 백인 선수가 또 찾아왔다. 그는 “도미니카 선수는 가르쳐주면서 미국 선수는 안 가르쳐주냐”며 타격 지도를 부탁했다. 그에게도 타격 폼 수정이 가해졌다. 2할대를 치던 머톨라는 트리플A에서 내셔널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고, 브리토는 타격왕과 타점 2위, 홈런 3위에 올랐다. 꼴찌 그룹에서 허덕이던 팀은 둘의 활약으로 리그챔피언이 됐고, 마이너리그 월드시리즈까지 제패했다. 브리토는 당시의 인연으로 2000년부터 한국 프로야구 SK와 삼성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지금도 이 코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워드의 텃세를 견디다 못한 이 코치는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설움을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 그런데 1년 뒤 워드가 속내를 털어놓으며 사과했다.
“제가 자기 자리(타격코치)를 빼앗아갈까봐 두려웠다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워드는 메이저리그 화이트삭스팀에 전화를 걸어 이 코치를 불펜코치로 추천했다.
“저를 놓치면 후회할 거라며 강력히 추천하더군요. 미국에서는 추천이 최고거든요.”
이 코치는 미국 진출 3년 만에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됐다. 그리고 워드는 그보다 3년 늦게 메이저리그에 합류했다.
첫 우승 반지
이만수 코치의 왼손에는 굵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기념 반지다. 그는 야구인으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1984년 타격 3관왕에 올랐을 때와 화이트삭스가 88년 만에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을 때를 꼽았다. 그는 선수시절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 해본 게 아쉬움이자 상처였다. 그는 “그때는 왜 주눅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면서 “코치로서 가르친 선수들이 우승을 하니까 더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우승 기념 카퍼레이드도 그의 야구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버스 4대에 나눠 탔는데, 제가 가장 앞에 있었어요. 제 이름과 등번호(59번)도 앞에 있었죠. 카퍼레이드는 상상 이상으로 멋있고 웅장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지도자로서 성공의 길을 걸은 것은 작은 습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줄곧 훈련일지를 썼다. 훈련 일정과 상황, 상대 선수의 장단점 등을 꼼꼼히 적는다. 대구상고 2학년 때 정동진 감독에게 배운 습관이다. 그는 미국에서 소속팀 엔트리 25명의 장단점, 가능성 등을 노트북에 꾸준히 입력했다. 브리토와 머톨라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메이저리그 코치가 된 2000년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은 불펜코치인 그에게 타격지도를 맡기기도 했다.
SK에서 그의 등번호는 22번이다. 보통 코칭스태프는 70번 이상을 달지만, 팬클럽(FOREVER LMS)의 적극적인 권유와 투수 이한진의 양보로 이뤄졌다. 빨간 유니폼에 등번호 22번을 단 수석코치 이만수가 그라운드에 선 모습은 어떨까. 더그아웃에서는 쉴 새 없이 걸쭉한 대구 사투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경기를 전후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팬들과 어울리는 광경도 떠오른다. 그에게 이런 상상을 들려주자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대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