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에게 필요한 것
누구나 국어·수학·영어 점수로 당락을 결정하는 대학입시가 문제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맞다. 70%가 넘는 대학 진학률, 자녀의 학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된 한국의 부모를 보면 문제의 근원에 지나친 교육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는 전쟁의 폐허에서 자원도 없이 어찌 보면 인적 자원만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제 발전을 이뤄낸 역사를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지식권력’을 선점하는 사실, 즉 교육받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실을 목격한 학부모의 교육열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나무랄 수만도 없다. 문제는 ‘교육학벌’의 힘이 약해지고 있으며 미래에는 지식권력의 내용과 형태가 바뀐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대부분의 국민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고를 들어도 100% 이해하거나 과거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폐기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다. 따라서 교육의 변화는 평범한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육과정의 변화를 통해 국민의 인식을 바꾸고 미래 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배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교육의 사명이고 기능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앞서 설명한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에는 전문가 대부분이 동의한다. 국어·영어·수학 중심의 교육이 문제라는 것은 다 알고 수능의 난이도와 내신의 국영수 비중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그 대신 무엇을 가르칠지 현실적 대안은 나오지 않는다. 현재와 미래에도 국어·영어·수학 같은 전통적 측면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인재는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에 적합한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청소년의 70%는 절대 못되고 아마 5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지적 측면의 자질을 갖지 못한 50% 넘는 청소년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이들에게 국영수를 전혀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처럼 모두에게 거의 같은 교육을 제공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똑같은 것을 가르쳐 놓고 자질에 따라 점수 차이가 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기다. 또한 그런 차이가 있더라도 상처 받지 말라는 것은 변태에 가깝다.
국영수 같은 학업 분야에서 하위 50%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잘할 수 있는 ‘무엇’을 가르치거나 다른 기회를 주고 있는가. 모든 학생에게 국영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를 준다는 것이 과연 사회정의의 실현일까. 그렇게 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일뿐더러 궁극적으로 다수가 실패할 확률이 높다. 국영수가 아닌, 그들이 진짜 잘할 수 있는 영역이 교육에 포함돼야 한다. 그게 바로 교육의 다양성이다.
교육의 다양성 문제는 학업 상위권학생이 몰려 있는 3%의 자사고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상대적으로 학업에 자질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은 97%의 일반고 문제다. 사실 전통적 지적 영역에서 우수한 인재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생, 각종 고시 합격생의 삶이 예전처럼 확고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 그리고 창의성이나 인성, 다양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면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다. 국영수 공부를 쉽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교육체계 안에 국영수를 대신하는 뭔가를 넣어줘야 한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방법
캔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때 화제가 됐다. 칭찬보다는 처벌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 긍정적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신선한 내용으로 소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의 내용에 반대할 생각도 없고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도 크다고 믿지만, 이 책의 제목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한계를 보여준다.
이 책은 칭찬 때문에 춤추는 고래는 원래 춤추고 싶지 않았다는 것, 어떻게든 이 고래를 춤추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원래 춤추고 싶어하는 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 없다. 춤추고 싶지 않거나 춤출 이유가 없는 고래를 춤추게 할 때만 칭찬과 같은 외재적 동기(외부에서 주어진 보상이나 처벌)가 필요하다. 조련사가 원하는 시점, 원하는 장소에서 춤을 춰야 하는 동물원 돌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하지만 넓은 바다에서 혼자 헤엄치는 자유로운 고래가 춤추고 물위로 뛰어오르는 것은 누군가 옆에서 칭찬해서가 아니다. 바다의 고래는 춤추고 싶을 때 춤춘다. 바다의 고래에겐 칭찬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교육은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칭찬과 보상을 늘리려고 한다. 여전히 상점보다는 벌점이 흔하고, 많은 선생님이 공포, 불안, 처벌로 학생을 다루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한다. 문제는 여전히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 한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춤추고 싶은 고래와 춤추기 싫어하는 고래가 있는데, 모든 고래를 춤추게 하려고 칭찬하거나 채찍질한다. 학생들은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서 너무나 다양한데, 교육은 모두 비슷한 것을 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강한 칭찬과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 춤을 좋아하는 고래라도 아무 때나 춤추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체계엔 ‘음악’이 있을까. 국영수 같은 전통적 학업을 좋아하는 학생에겐 필요한 ‘음악’을 틀어준다. 하지만 다른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겐 과연 무엇을 주고 있을까.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춤추고 싶은 고래가 춤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음악’이지만, 춤추는 이유는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은 그저 환경적 요인이지 근본적 이유는 아니다. 춤추는 이유는 ‘재미’라는 내재적 동기다. 다른 이유는 없다. 교육체계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재미다. 학생 대부분에게 학교 자체는 재미있을 것이다. 교육이나 학업 때문이 아니라 친구 덕분이다. 친구와 수다 떨고, 함께 간식 먹고, 축구하고, 음악 듣고, 게임하는 건 너무나 재미있다. 하지만 공부를 재미있어하는 학생은 소수다. 독려해주면 그나마 공부에 재미를 붙여볼 학생도 절대 다수는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양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는 세계 최하라는 건 여러 조사에서 확인된 바다.
이들을 춤추게 하려면 학업과는 다른 ‘음악’을 틀어줘서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한국의 교육체계는 재미를 전염병이나 되는 듯 치부하는 것 같다. 똑같은 교육이라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지, 새로운 재미있는 교육을 추가할지를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매일 국영수를 얼마나 쉽게 할 것인지만 고민한다. 국영수만 쉬워지면 가만히 있어도 청소년들이 즐거워서 춤을 출까. 재미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춤추는 고래는 미친 고래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