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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이동식씨 “군용 트럭에 실려온 문드러 진 토막 시신들, 한나절 파묻고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었지…”

  •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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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에 관을 짊어지고 나르다가 바닥에 내려놓으니까 얇은 소나무 관이 ‘툭’소리를 내면서 터져버리는 거야. 아, 그러니까 관 속에서 여기저기 토막난 거무죽죽한 송장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냐? ‘이거, 뭐 토막낸 동태들 같구만…’ 하면서 일을 계속했지만, 어찌나 냄새가 역하든지 다음날부터 집에서 밥도 못 먹고 며칠을 고생했어.”

묘지 작업반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대개 시신 처리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날 들어온 시신들은 워낙 참혹하게 훼손돼 있어서 작업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피가 줄줄 흐르고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해? 삽 집어던지고 그냥 도망가버린 사람도 있어.”

물론 이동식씨는 이날 매장한 시신이 실미도 희생자들인 줄은 몰랐다. 이씨는 “2~3년 지나서야 그때 묻은 시신들이 인천에서 난리를 일으킨 군인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이어 “인천에 있는 부대라고도 들은 것 같고 ‘난지도’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실미도’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이 사건이 전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시신 20구의 행방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1968년 4월 창설된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다. 운명의 날인 1971년 8월23일, 죽음의 섬 실미도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던 비운의 주인공들은 모두 24명. 31명의 부대원 중 7명은 훈련 도중 숨졌다.

그날 아침. 3년 넘게 청춘을 바친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으로 무장한 이들 24명은 자신들을 훈련시킨 현역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기간병들이 전날 저녁 술자리를 갖고 곯아떨어진 새벽 6시경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24명의 정예 저격요원들은 인천 시내를 관통해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다. 사고 소식을 듣고 출동한 군경과 접전이 벌어지면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실미도 교전중 2명, 그리고 인천 조개고개에서 교전중 또다시 2명이 숨졌다. 이렇게 해서 서울 진입에 성공한 인원은 모두 20명이었다.

이들을 태우고 서울로 돌진하던 ‘경기 영 5-1661’ 대형 버스가 멈춰선 곳은 대방동 유한양행 앞. 교전을 거듭하며 이곳까지 진입한 실미도 훈련병들은 다시 20여분의 교전 끝에 결국 스스로 폭탄을 터뜨려 한많은 청춘을 마감한다.

20명이 탄 버스에서 터뜨린 폭탄으로 대부분 그 자리에서 숨졌고 이중 4명이 살아남아 이듬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결국 1971년 8월23일 자폭한 실미도 희생자는 16명이라는 말이다. ‘신동아’는 2004년 4월호에서 사건 당시의 군 내부 문서를 바탕으로 군 당국이 공식 집계한 당시 사망자 수와 사망 장소, 그리고 부대원 명단을 모두 공개한 바 있다.

이동식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현장에 나갔을 때 쌓여 있던 시신들은 사고 당일인 8월23일 오후 2시40분경 유한양행 앞에서 폭사한 16명의 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씨가 “뒤이어 도착했다”고 증언한 3~4구의 시신은 사건 당일 실미도에서 숨진 2명과 인천 시내 교전 중 숨진 2명일 가능성이 높다. 사건 당일 서로 다른 곳에서 숨진 시신들을 한데 모아 옮겼는지, 아니면 각각 따로 옮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을 교육한 기간병 중 한 명은 “인천에서 숨진 시신은 인천 지역에 있는 군 병원에 안치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씨는 당시 매장한 시신의 정확한 수를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20~30구라는 것이 이씨 기억의 전부다. 그러나 이씨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최소한 20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이씨는 문제의 현장에 시신을 암매장한 이후에도 이따금씩 들러 주변을 살펴봤다고 한다. 계속되는 이씨의 증언이다.

수해에도 피해 없어

“관을 묻을 때마다 시립묘지 관리소장이 나무판에 1번부터 숫자를 적어서 주욱 번호판을 꽂아놓았었다고. 그런데 가끔 보면 그 나무판이 뽑혀 있거나 누워 있는 거야. 그래서 그때마다 일으켜 세워도 주고 가끔씩 가서 주변도 돌아보고 그랬다고.”

그렇다면 이동식씨가 지목한 현장에는 아직까지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그대로 보존돼 있을까. 이씨가 지적한 자리 위쪽으로는 현재 일반 묘역이 조성돼 6~7기의 묘지가 들어서 있다. 대부분 1985~1986년에 조성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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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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