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이동식씨 “군용 트럭에 실려온 문드러 진 토막 시신들, 한나절 파묻고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었지…”

  •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5-03-22 18: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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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인천 어딘가에서 훈련받던 군인들이 서울로 쳐들어오다가 폭탄을 터뜨렸다고 그랬어. ‘아주 나쁜 놈들’이라고 하대. 시신 상태가 엉망이었지. 살은 다 문드러지고 피는 줄줄 흐르고…. 그걸 다 파묻고 나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었다니까.”

    1971년 ‘실미도 사건’으로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한 훈련병들의 시신을 자신이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대북침투 목적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인 실미도 부대. 실미도 부대는 그후 3년간 대북침투용 ‘살인병기’를 만들기 위한 혹독한 훈련에 반발한 부대원들의 집단 반란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실미도 사건 희생자들을 자기 손으로 암매장했다고 밝힌 사람은 올해 84세의 이동식(경기 고양시 벽제동)씨다. 이씨는 지난 3월6일과 12일 ‘신동아’와의 두 차례 인터뷰에서 “1971년 8월, 나를 포함해 15명 정도의 작업 인부가 동원돼 20여구의 무연고 시신을 고양시 벽제동 벽제시립묘지 1구역 주변에 암매장했다”고 밝혔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산하 실미도 진상조사단도 지난 2월 말 이씨를 면담하고 현장조사를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동식씨가 지목한 장소는 현재 묘역이지만 당시에는 정식 묘지가 거의 없는 야산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663번지. 고양시 고양동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315번 지방도로상의, 이른바 ‘됫박고개’ 조금 못미친 길가에 있는 한 묘역이다.

    이곳에서 100m쯤 떨어진 아래쪽에는 서울구치소에서 관리하는 무연고 사형수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사형수나 사망 재소자 중 시신을 인수할 유족이나 연고자가 전혀 없을 경우 가매장하는 곳으로 현재 19기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이 사형수 묘역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1970년 이전에 조성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군 당국이 자폭해 숨진 실미도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존 무연고 사형수 묘역에 인접한 이곳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씨는 1921년생이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당시 나이는 50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년간 벽제시립묘지 작업반에서 일했다. 이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더운 8월 어느 날이었지. 아침에 일하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까 길 옆 언덕에 관이 잔뜩 쌓여 있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아카시아를 베어낸 뒤 구덩이를 파고 젊은 사람들은 관을 져서 날랐지. 그런데 평소에 들어오던 시신들과는 뭔가 달랐어.”

    소나무 판자를 대강 못질해 만든 관 모양새며, 못질한 틈새로 핏자국이 낭자한 것을 보더라도 직감적으로 뭔가 사연이 있는 시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장 지휘는 당시 묘지관리소장인 한모씨(사망)가 했다.

    이씨는 “당시 현장에서 군용 트럭도 봤다”고 밝혔다. 작업 도중 현장 관계자의 입에서 “시신이 더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형 군용 트럭이 도착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트럭 짐칸에는 가마니에 덮인 관이 3~4개 있었고,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관들을 내려놓자마자 부리나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역겨운 냄새에 도망치기도

    이동식씨 증언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좀더 자세한 현장 설명을 부탁했다. 이씨는 묘역이 시작되는 입구에 서서 315번 지방도 옆의 빈 땅을 가리키며 “저기서부터 출발해 논두렁길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내려놓고 파묻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대로라면 지게를 지고 100m 정도 논을 가로질러와 야산 초입에 시신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씨가 지목한 지점 주변에는 1985년에 조성한 개인 묘지 5~6기가 들어서 있다(그림 참조).

    당시 이 지역 주변에는 아카시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뿌리의 번식력이 너무 강해 묘지 주변에는 심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아카시아 뿌리가 시신을 훼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씨는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남들이 다 꺼려하는 아카시아 숲 주변에 묻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시신이라면 몸을 깨끗이 씻어 주요 부위를 묶는 염습을 한 뒤 입관(入棺)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실미도 훈련병들의 시신은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길에서 군경과 대치하다 자폭한 뒤 극비리에 처리됐기 때문에 이러한 장례절차를 제대로 거쳤을 리 없다. 이씨는 당시 시신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고 증언한다.

    “지게에 관을 짊어지고 나르다가 바닥에 내려놓으니까 얇은 소나무 관이 ‘툭’소리를 내면서 터져버리는 거야. 아, 그러니까 관 속에서 여기저기 토막난 거무죽죽한 송장 조각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냐? ‘이거, 뭐 토막낸 동태들 같구만…’ 하면서 일을 계속했지만, 어찌나 냄새가 역하든지 다음날부터 집에서 밥도 못 먹고 며칠을 고생했어.”

    묘지 작업반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대개 시신 처리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날 들어온 시신들은 워낙 참혹하게 훼손돼 있어서 작업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피가 줄줄 흐르고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해? 삽 집어던지고 그냥 도망가버린 사람도 있어.”

    물론 이동식씨는 이날 매장한 시신이 실미도 희생자들인 줄은 몰랐다. 이씨는 “2~3년 지나서야 그때 묻은 시신들이 인천에서 난리를 일으킨 군인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이어 “인천에 있는 부대라고도 들은 것 같고 ‘난지도’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실미도’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이 사건이 전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시신 20구의 행방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1968년 4월 창설된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다. 운명의 날인 1971년 8월23일, 죽음의 섬 실미도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던 비운의 주인공들은 모두 24명. 31명의 부대원 중 7명은 훈련 도중 숨졌다.

    그날 아침. 3년 넘게 청춘을 바친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으로 무장한 이들 24명은 자신들을 훈련시킨 현역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실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기간병들이 전날 저녁 술자리를 갖고 곯아떨어진 새벽 6시경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24명의 정예 저격요원들은 인천 시내를 관통해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다. 사고 소식을 듣고 출동한 군경과 접전이 벌어지면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실미도 교전중 2명, 그리고 인천 조개고개에서 교전중 또다시 2명이 숨졌다. 이렇게 해서 서울 진입에 성공한 인원은 모두 20명이었다.

    이들을 태우고 서울로 돌진하던 ‘경기 영 5-1661’ 대형 버스가 멈춰선 곳은 대방동 유한양행 앞. 교전을 거듭하며 이곳까지 진입한 실미도 훈련병들은 다시 20여분의 교전 끝에 결국 스스로 폭탄을 터뜨려 한많은 청춘을 마감한다.

    20명이 탄 버스에서 터뜨린 폭탄으로 대부분 그 자리에서 숨졌고 이중 4명이 살아남아 이듬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결국 1971년 8월23일 자폭한 실미도 희생자는 16명이라는 말이다. ‘신동아’는 2004년 4월호에서 사건 당시의 군 내부 문서를 바탕으로 군 당국이 공식 집계한 당시 사망자 수와 사망 장소, 그리고 부대원 명단을 모두 공개한 바 있다.

    이동식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현장에 나갔을 때 쌓여 있던 시신들은 사고 당일인 8월23일 오후 2시40분경 유한양행 앞에서 폭사한 16명의 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씨가 “뒤이어 도착했다”고 증언한 3~4구의 시신은 사건 당일 실미도에서 숨진 2명과 인천 시내 교전 중 숨진 2명일 가능성이 높다. 사건 당일 서로 다른 곳에서 숨진 시신들을 한데 모아 옮겼는지, 아니면 각각 따로 옮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실미도에서 훈련병들을 교육한 기간병 중 한 명은 “인천에서 숨진 시신은 인천 지역에 있는 군 병원에 안치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씨는 당시 매장한 시신의 정확한 수를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20~30구라는 것이 이씨 기억의 전부다. 그러나 이씨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최소한 20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이씨는 문제의 현장에 시신을 암매장한 이후에도 이따금씩 들러 주변을 살펴봤다고 한다. 계속되는 이씨의 증언이다.

    수해에도 피해 없어

    “관을 묻을 때마다 시립묘지 관리소장이 나무판에 1번부터 숫자를 적어서 주욱 번호판을 꽂아놓았었다고. 그런데 가끔 보면 그 나무판이 뽑혀 있거나 누워 있는 거야. 그래서 그때마다 일으켜 세워도 주고 가끔씩 가서 주변도 돌아보고 그랬다고.”

    그렇다면 이동식씨가 지목한 현장에는 아직까지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그대로 보존돼 있을까. 이씨가 지적한 자리 위쪽으로는 현재 일반 묘역이 조성돼 6~7기의 묘지가 들어서 있다. 대부분 1985~1986년에 조성한 것들이다.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1971년 8월23일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길에서 군경과 대치중 자폭한 실미도 부대원들을 버스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이날 현장에서 16명이 숨졌고, 살아남은 4명은 사형선고를 받아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1989년, 경기 북부지역의 집중 호우로 인해 시립묘지 곳곳이 심각하게 훼손된 적이 있다. 주민들은 “쓸려내려온 유골이 집 앞마당까지 굴러들어올 정도로 폭우 피해가 심했다”고 말한다. 국방부는 당시 이 지역이 수해를 입은 사실을 들어 이씨의 증언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동식씨가 실미도 희생자들을 암매장했다고 지목한 현장만큼은 별다른 수해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묘지 소유자인 관련 유족들에게 확인한 결과 큰 폭우에도 이들 묘지 근처는 봉분도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유족은 “시립묘지 전체가 훼손됐는데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아 어른들이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지면 바로 밑에 ‘平葬’

    이동식씨는 “지금도 땅을 파면 당시 암매장한 유골들이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의 주장대로 1971년 매장한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물론 일반 매장 절차를 따라 1m 이상의 구덩이를 파고 깊이 매장했다면 유골의 보존 상태는 양호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시신들은 관이 겨우 묻힐 정도로 얕게 매장되어 공기와 습기가 제대로 차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시립묘지 관계자들도 “무연고자들을 매장할 때는 지면 바로 밑에 묻고 평토장(平土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전했다.

    따라서 햇볕과 공기에 쉽게 노출된 이 유골들은 매우 빨리 부식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유골이 가지런히 보존되기 위해서는 시신을 제대로 묶어 입관해야 하지만,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암매장된 유골이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래도 남는 의문이 있다. 만약 이씨가 지목한 자리에 실제로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일부라도 있었다면 이 자리에 일반 묘지를 쓰면서 이 유골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유족들에게 확인하면 간단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묘지 조성 작업에 나섰던 관계자들의 증언은 다르다.

    “구덩이를 파다가 온전한 사람 형태의 유골이 나오면 모를까, 뼛조각 몇 개 나온다고 해서 작업을 중단하지는 않아요. 그냥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거나 옆으로 치워놓죠. 유족들이 알 것 아니냐고요? 그건 일꾼들만 아는 비밀입니다. 예의상 유족들에게도, 관리사무소에도 얘기하지 않아요.”

    물론 이씨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장에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이미 부패한 시신을 가매장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유골의 상태가 양호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훼손된 유골 중 일부라도 발굴할 수 있다면 신원 확인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려대 황적준 교수(법의학)는 “유골 중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되는 팔·다리뼈 등의 피질이 남아 있다면 골세포를 추출해 DNA 검사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유골 상태에 따라서는 두개골 내에 치아 일부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기자는 여기까지 취재를 마친 뒤 이씨의 증언을 일단 덮어두고 며칠간 벽제 시립묘지 주변을 취재하면서 몇 가지 다른 가능성을 추가로 점검해 보았다.

    첫째, 지면에 가깝게 암매장한 유골들이 1989년 수해 당시 휩쓸려나갔을 가능성이다. 잔디를 입힌 묘지는 훼손되지 않았지만 주변 토사는 쓸려나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벽제시립묘지를 관리하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1989년 수해 당시 겨우 수습한 유골들을 한데 모아 화장해버렸다. 현재 벽제시립묘지 입구에는 이들의 유분(遺粉)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이곳에 세워놓은 합동위령비에는 14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훼손된 묘지의 주인들인 셈이다.

    그러나 주인을 끝까지 찾지 못한 유골도 많다. 이 위령비에 ‘성명 미상 41명’이라고 적힌 이들이 이 유골의 주인인 셈이다. 그러나 ‘성명 미상’으로 분류된 유골들도 유실된 기존 묘지 수를 통해 집계한 것이므로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성명 미상’에 포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둘째, 이씨의 주장과 달리 실미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벽제시립묘지의 행려단지와 같은 다른 무연고자 묘역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에도 이들의 유골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행려 사망자와 같은 무연고자의 매장 시신은 10년 주기로 개장(開葬)해서 화장한 뒤 합동 분묘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장을 돌아본 결과 아직까지 매장됐있는 무연고자 시신 중 10여구는 사망장소나 일시와 같은 최소한의 표시마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들은 이 정체불명의 시신들이 1970년대 초에 매장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대부분 1990년 이후에 매장된 시신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할 때 이씨의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현재 이들의 유골을 찾아낼 수 있는 열쇠는 국방부 진상조사단이 쥐고 있다. 국방부 조사단은 지난 2월 두 차례 현장을 방문했고 제보자인 이동식씨와도 한 차례 면담했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단은 현재로서는 이씨의 증언에 무게를 두지 않은 상태. 조사단 관계자는 “당시 현장 주변에 민가가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과 관련 서류 없이 가매장이 불가능하다는 묘지관리소측의 설명 등을 감안할 때 이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광범위한 진상조사작업이 진행중이지만 과거사법에 따라 민간위원이 임명되고 민간위원장이 선출되기 전까지는 조사 결과 발표나 시신 발굴 등 어떠한 작업에도 착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미도 희생자 유족들의 입장은 강경하다. 국방부를 상대로 조속한 시신 발굴을 요구하고 있다. 실미도 희생자 유족 중 10여명은 지난 3월10일부터 국방부 정문 앞에서 시신 발굴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유족 임홍빈씨는 “국방부가 2월 중 현장을 함께 방문하자고 약속해놓고는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유족들을 빼돌리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국방부 조사단측은 ‘시신 발굴보다는 희생자들의 정확한 신원 파악이 먼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지만 지난해부터 1년여간 벽제 시립묘지 현장을 조사해온 유족들은 “이씨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며 국방부의 적극적인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지난 3월10일은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한 뒤 살아남은 4명의 실미도 대원이 사형된 날이다. 그러나 33년이 지난 지금도 정식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이 집행된 4명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실미도 훈련병 중에는 ‘하극상 범죄를 저질렀다’며 당시 현지에서 처형된 뒤 화장당해 서해 조류에 쓸려간 사람도 있다. 또 아직까지 실미도 현장에 묻혀 있는 훈련병도 있다. 이들이 ‘죽음의 섬’ 실미도에 들어간 과정이 기구했던 만큼이나 실미도와의 인연을 끊는 방법은 이렇게 기막힌 것들이었다.

    그러나 실미도에서 피비린내가 가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피분수가 솟구치고 총성이 귀를 찢던 그날의 현장을 지키던 사람들은 아직도 지하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실미도’는 더 이상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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