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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

  • 권춘오 네오넷코리아 편집장

“결단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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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을 놓고,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그렇지만 어느 쪽으로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는 이유와 경과가 어떻든 최후에는 정말 주사위라도 던져 방향을 정해야만 한다.…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결단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결단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

<b>도요타 에이지의 결단 </b<br>도요타 에이지 지음 박정태 옮김 굿모닝북스

지방의 작은 방직기 공장에서 출발해 세계 최고의 자동차 제조회사로 성장한 도요타. 사실 그 초창기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일례로 1950년 도요타 에이지가 미국의 포드자동차를 방문했을 당시 포드의 하루 자동차 생산대수가 8000대였던 반면 도요타는 40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53년이 지난 2003년 도요타는 전세계적으로 678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672만대에 그친 포드를 제치고 세계 자동차업계 2위로 올라선 것이다.

‘도요타 에이지의 결단’은 현재 도요타 가문의 최고 원로인 도요타 에이지의 자서전이다. 아울러 도요타가 최고의 자동차 제작회사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도요타사(史)다. 도요타 에이지는 도요타 최초의 고유 승용차 모델인 크라운에서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은 렉서스 모델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동안 도요타와 함께한 인물이다. 도요타 자동차의 모든 곳에 그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어떤 도요타 관련 책보다도 생생하게 도요타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 Abstract

도요타는 처음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을까. 도요타는 자동차 제조회사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도요타라고 하면 누구나 도요타 사키치를 떠올린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괴짜’ 취급을 당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끝에 직기(직물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냈다. 도요타 에이지의 아버지인 헤이키치는 오래 전부터 큰아버지인 사키치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1897년 사키치는 도요타식 목제 동력직기를 완성했고, 오츠카와 면포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이 공장이 제 궤도에 오른 1913년 9월12일 이 책의 주인공 도요타 에이지가 태어났다.

도요타 자동차가 자동차 제조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은 도요타 에이지가 대학교에 입학한 1933년 12월이었다. 기존 직기 공장에 자동차부가 신설돼 처음에는 자전거에나 붙이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엔진을 시험 제작하는 일부터 시작했으나 곧이어 미국에서 수입한 부품을 조립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었다. 전기장치 부품에서 카뷰레터와 스피드미터, 플러그 등에 이르는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했다.



도요타가 자동차 회사로 독립해 정식 출범한 것은 1937년 8월이다. 도요타가 항상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어려운 시기도 여러 번 겪었다.

오늘날 도요타 생산방식이라 부르는 개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고로모 공장에서였다. 에이지와 사촌 간인 기이치로는 당시 “매일매일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만큼만 만들라”는 유동작업 방식을 택했다. 정해진 수만큼 생산하면 퇴근 시간 이전에도 퇴근할 수 있었다. 대신 그렇지 못하면 잔업을 해야 했다. 이를 어떻게 사내에 정착시킬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를 위해 기이치로는 두께 10cm에 달하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이 책의 내용이 도요타 생산방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이란 말도 이때부터 쓰게 됐다.

한편 기이치로는 검사 과정에서 불량품이 발견되면 즉각 불량품이 나온 공정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2차대전 종전 후 도요타는 품질관리(QC) 기법을 연구해 매우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현대적인 품질 관리에서 말하는 “품질은 공정에서 만들라”는 것과 기이치로의 생각은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전쟁 특수를 거쳐 1951년에 접어들자 자금에 여유가 생겨 연구개발에 힘을 쓰게 됐다. 순이익 증가와 자본금 증자를 통해 양쪽에서 자금이 들어오니 회사의 재무구조는 빠르게 개선됐다. 그리고 1952년엔 부도위기와 감원 등으로 물러났던 기이치로가 도요타 사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해 3월27일 기이치로는 뇌일혈로 쓰러져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57세였다.

도요타에서 승용차라고 이름 붙이기에 어울리는 차를 생산한 것은 1955년 1월에 발표한 크라운(Crown)이 처음이었다. 크라운은 일본 내에서 무척 평판이 좋았다. 그러나 과감하게 도전한 미국시장에선 성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엔진 출력이 떨어져 미국 고속도로에서 제대로 주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이지는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무모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참담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뒤 정말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어떻게 하면 미국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승용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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