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필담집을 통해 본 ‘완고한 조선’과 ‘유연한 일본’

  • 이경근│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국어국문학 openears@naver.com

    입력2012-02-22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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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9년 전 조선통신사절단의 서기 원중거와 일본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는 일본에서 만나 필담을 나눴다. 필담집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에는 중화(中華)의 관점에서 일본을 인정하지 않는 원중거의 완고함과, 일본과 조선은 문명국이며 중국만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가쿠다이의 유연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후 조선의 망국은 어쩌면 이때부터 예고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일본인이 그린 조선통신사 행차 모습.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면 대부분 감자와 고구마를 떠올린다. ‘흉년이 들었을 때 주식을 대신해 먹을 수 있는 농작물’치고는 사실 감자, 고구마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감자는 19세기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고구마는 18세기 일본에서 각각 수입해 들여왔는데, 조선으로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조엄(趙·#53371;·1719~1777)이다. 이 인물은 1763년 한양을 떠나 이듬해 귀국한 계미년 통신사절 책임자였다. 그가 쓴 ‘해사일기’에는 통신사행 도중 대마도에서 처음 고구마를 보고 종자를 조선에 들여와서 키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정조실록’에도 “고구마 종자를 막 들여왔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는데, 점차 관가의 수탈이 심해져 30년 지난 후에는 고구마를 재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관리의 모습이 읽힌다. 한 비변사는 “고구마는 구황(救荒·기근 때 빈민을 구함)을 하는 데 실로 중요한 종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구마 종자의 유입은 조선에서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조선에 들여온 조엄이 이끈 계미통신사절의 일본 사행도 흥미롭다.

    고구마 수입은 계미년 통신사행의 부산물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맞이한 에도(江戶) 시대(1603~1868)에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횟수는 총 12회였다. 이 중 1763년 떠난 계미통신사의 공식적인 임무는 일본의 제10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쇼군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을 축하한다’는 영조의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영조 국서 전달하러 떠난 계미통신사절

    통신사절의 책임자 격인 정사, 부사, 종사관을 삼사(三使)라고 한다. 이 사행의 정사가 바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이었다. 또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을 골라 제술관과 3명의 서기 자리를 맡겼다. 이때 제술관은 남옥, 정사 서기는 성대중, 부사 서기는 원중거, 종사관 서기는 김인겸이었다. 통신사절은 일본에서 여정을 거칠 때마다 현지의 문사들과 시와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이 역할을 맡은 이들이 주로 제술관과 3명의 서기였다. 이 자리는 서얼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문벌이 좋은 사대부 문인들은 일본 항해를 위험한 일로 여겨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도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이들은 여행 후 자신의 일본 사행 경험을 상당히 두툼한 저술에 담았는데, 남옥은 ‘일관기’, 성대중은 ‘일본록’, 원중거는 ‘승사록’과 ‘화국지’를 남겼다. 이 책은 모두 한문 저술이다. 김인겸은 국문으로 된 장편 가사 ‘일동장유가’를 지었는데, 한문과 한글의 차이는 있지만 계미통신사절 작품이라는 것은 공통점이다.

    앞서 소개한 정사 조엄의 ‘해사일기’가 계미통신사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라면, 이 저술들은 그보다는 사적이고 느슨한 성격의 기록물이다. 이들 서적 외에도 조선과 일본 문사가 시와 필담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필담자료집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필담은 당시 언어가 다른 문사가 통역 도움 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필담은 글이기는 하지만, ‘말’을 그대로 적었다는 점에서 ‘말’의 성격이 온전히 살아 있는 글이기도 하다. 필담자료집에 대화 참여자의 평소 식견이나 편견이 가감 없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담자료집의 대부분은 통신사절이 일본의 특정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 문사들이 통신사 숙소에 찾아가 필담한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즉 일본 문사들이 정리해서 일본에서 출간한 것이다. 대부분 사행 직후 출간되었고,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기도 했다. 기록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질이 발동한 것일 테지만, 어쨌든 조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필담뿐만 아니라 필담의 내용을 보충하려는 듯, 보다 심층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그에 대한 답장까지 받아 수록해놓은 경우도 있다.

    조선 문인과 일본 문인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필담 기록과 편지글을 통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우리가 주목할 책은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라는 목판본 필담집이다. 여기서 ‘장문’은 ‘나가토노쿠니(長門國)’라는 지명으로 시모노세키(下關)의 옛 이름이다. 초슈번(長州藩)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절이 늘 묵어가던 곳이다. 이 필담집의 제목은 ‘계미년(1763)과 갑신년(1764) 두 해에 걸쳐 나가토를 방문한 조선사절단’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는 시모노세키에서 통신사가 머물렀을 때 현지 문사들과 주고받은 필담과 시문, 편지가 다수 실려 있다.

    원중거와 다키 가쿠다이의 만남

    이 책은 1765년 9월 메이린칸(明倫館)에서 간행되었는데, 메이린칸은 초슈번의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었다. 문사들이 어울린 지 고작 1년이 지나서 필담집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한일 문사 교유에 대한 현지의 높은 관심을 의미한다.

    필담에 참여한 많은 인물 가운데 주목할 일본 측 인물은 다키 가쿠다이(瀧鶴臺·1709~1773)이다. 이 인물은 에도에서 핫도리 난가쿠(服部南郭·1638~1759)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했고, 후에는 초슈번의 번주 교육을 담당했다.

    조선 측 인물 중에서는 원중거(元重擧·1719~1790)가 주목된다. 제술관과 다른 두 서기보다 적극적으로 필담에 응했고,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32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하급 관리로 근무하다가 1763년에 계미사절단 서기로 뽑혀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몇몇 관직을 거쳐 규장각에서 같은 서얼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해동읍지’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고, 목천(지금의 천안)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당대 서얼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존경하는 어르신’이었다고 한다.

    이 필담 기록은 무엇보다 원중거와 가쿠다이의 ‘학문’이 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음은 1763년 12월 28일 두 문사가 주고받은 필담의 일부. 필담 당시 가쿠다이는 55세, 원중거는 45세였다.

    원중거: “이곳에도 마땅히 성리지학(性理之學)이 있겠지요? 과연 정주(程朱·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를 종주(宗主)로 삼는지요?”

    가쿠다이: “이곳에도 성리지학이 있습니다…그러나 근세에는 도쿄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喇徠·1666~1728) 선생이 복고지학(復古之學)을 크게 창도해 해내(海內)를 휩쓸었습니다.”

    원중거가 ‘마땅히 성리지학’이라고 자연스럽게 얘기하듯,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이 공인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탈(脫)성리학 움직임이 왕성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조선에는 ‘실학’으로 통칭되는 학문이 성행했고 양명학과 서학도 들어와 있었다. 물론 관리 발탁시험은 성리학 과목으로 치렀으므로 성리학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원중거는 흔들림 없이 성리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얼로서 어렵게 진출한 관직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고, 공식적인 사절로서 조선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에도 막부의 공식적인 학문, 즉 관학(官學)도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가쿠다이 자신은 성리학이 아니라 ‘소라이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힌다. 조선처럼 성리학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쿠다이는 핫도리 난가쿠의 제자이며 핫도리는 오규 소라이의 제자다. 즉 가쿠다이는 소라이학 학자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필담을 따라가보자.

    원중거: “이들은 모두 정주(程朱)를 종주로 삼는지요?”

    가쿠다이: “정주를 배척합니다. 선학(禪學)을 공부하는 것은 유자들이 취하지 않습니다. 소라이학은 고경(古經)을 종주로 삼지, 주해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고언(古言)을 가지고서 고경을 풀이하니 더 믿음직한 증거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원중거: “주해를 버리고서 경전을 읽는 것은 도와주는 이가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정주의 학문은 해가 중천(中天)에 뜬 것 같으니 정주를 독실하게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이단(異端)입니다.”

    원중거는 소라이의 고학이 이정자(二程子)와 주자(朱子)를 종주로 삼는지 확인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고 가쿠다이는 정주 성리학은 ‘선학’이라고 단정하며, 배척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송대(宋代)에 흥기한 성리학이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석에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혼입되어 있었다. 원래 공맹(孔孟·공자와 맹자)의 유학은 ‘물 뿌려 청소하고 손님접대 잘하고, 어른께 나아가고 그 앞에서 물러나는’ 법을 가르쳤다. 생활에 밀착한 현실적인 성격이 그 특징이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는 현세를 넘고 생사를 넘어 우주 전체, 존재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송대의 주희는 유학의 부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불교와 대결하기 위해 존재 전체와 개체를 연결하는 불교 논리를 유학 안에 받아들였다. 즉 성리학은 태생적으로 불교와 가까웠던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을 선학이라고 비난한 가쿠다이의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불교 가운데 선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마음의 작용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성리학이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 역시 ‘나의 본성이 우주의 원리와 같다’는 것이다.

    “정주 성리학 믿지 않으면 모두 이단”

    소라이학은 유가 경전을 선진(先秦) 시대의 의미에 따라 풀이해 예악형정(禮樂刑政) 등의 제도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래서 고학(古學), 혹은 복고학(復古學)으로 불린다. 특히 ‘순자 성악설’의 노선에서 유학을 해석함으로써, 유학에서 성리학적 심성론의 흔적을 거둬내고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했다. 소라이학이 유학 도덕주의를 넘어서 유학 전통을 정치철학으로 다시 읽으려고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원중거 역시 물러서지 않고 ‘성리학적 주석의 도움 없이 유학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은 도와주는 이 없는 소경의 처지와 같다’는 비유를 동원하면서, 정주학을 신봉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이단(異端)이라고 선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조선학계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쿠다이는 이어지는 대화에서 돈독한 성리학자였다가 고학으로 돌아선 한 일본 학자의 예를 들어 자신 역시 그런 경우라고 말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원중거의 반응이다.

    원중거: “정주의 가르침에 어찌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독서법 중 꼼꼼하고 자세하게 읽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힘써 실천할 것을 꼼꼼히 생각지도 못했으면서 의문부터 제기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병을 앓는 이가 바탕을 튼튼히 하지 않아서 감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명나라 유학자 가운데 육구연(陸九淵·1139~1192)을 따르는 이들이 바로 이와 같은 기습(氣習)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귀국을 보니 인재가 배출되어 큰 전환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바르지 못하면 실로 무수한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처럼 덕이 깊고 배움이 바른 분께서 근원을 살펴보시고 후학을 인도해 주시길 빕니다.”

    육구연을 따르는 명나라 유자

    가쿠다이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이 정도로 마무리된다. 정주의 가르침을 태양과 같이 받들고 있던 원중거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의심부터 품는 ‘나쁜 공부 습관’을 가진 사람에 비유한다. 그러고는 이런 태도는 육구연을 따르는 명나라 유자들의 습관과 마찬가지라고 공박했다. 여기서 원중거가 거론하고 있는 ‘육구연을 따르는 명나라 유자’들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1472~1528)과 그 문도들을 가리킨다.

    주희는 ‘나의 본성 안에 우주의 질서가 들어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 본성을 ‘기(氣)’라는 그릇 안에 가두었다. 우주의 질서인 ‘리(理)’는 내 본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도 깃들어 있는데, 주희는 사물에 있는 ‘리’를 탐구하는 것을 본성을 회복하는 주된 방식으로 제시했다. 즉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게 만든 형국이었다. 반면 왕수인은 본성이 아니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이 마음이 바로 그 진리라고 주장했다.

    성리학자들은 사물에 있는 ‘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어떻게? 대표적인 방법은 ‘독서’였다. 성리학자들은 내 밖에 있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이에 비해 양명학자에게는 ‘미인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듯’ 내 마음이 지각하는 것이 바로 ‘리’였다. 그러므로 ‘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잘 발휘하는 데 있었다. 독서는 오히려 이러한 마음의 힘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으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었다. 성리학자들이 양명학자들을 ‘불학(佛學) 또는 선학(禪學)의 기습(氣習)에 빠졌다’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진리 추구 방법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성리학자 원중거가 양명학을 비판하는 것은 특기할 일이 아니다. 다만 대화에서 양명을 끄집어낸 것은 특이하다. 즉 원중거는 ‘정주학적 독서’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소라이학을 양명학이라고 비판하고 싶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쿠다이가 성리학을 선학이라고 비난했는데, 성리학자 원중거는 또 소라이 학자인 가쿠다이를 양명학에 빗대어 비난한 대목이다. 양명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선학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가쿠다이의 비난은 일리 있지만, 원중거의 비난은 정곡을 한참 빗나간 것이었다. 소라이학은 성리학과 양명학 같은 ‘심성’을 중시하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학에 무게를 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담집에 실려 있는 2통의 편지 내용을 검토해보자. 가쿠다이가 묻고 원중거가 답한 글인데, 두 문사가 당시 천하와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가쿠다이가 원중거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앞서 미완으로 끝난 토론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가쿠다이가 원중거에게 보낸 편지는 성인의 도를 마음대로 전유(專有)하면서 ‘같음을 표방하면서 다름을 배척’하고 ‘중국을 귀하게 여기면서 이적을 천하게 여긴’ 후세 유자의 좁은 식견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선과 일본의 수준 높은 문화를 칭송했다.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다는 지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임금의 덕이 높고 백성들이 순박하며, 교육과 경로를 잘하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있음을 특화하면서, 이 두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대의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던 때’와 같다고 극찬하고 있다.

    고대의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는 문명국

    이는 가쿠다이가 화이(華夷)론을 벗어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화이론은 중화문명이 유일한 문명이고,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종족은 오랑캐라는 중국 중심주의다. 실제로 중국에서 한족 왕조인 명(明)이 망하고, 만주족 왕조 청(淸)이 들어선 이후, 전통적 화이론은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북벌론과,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北學)에 대한 열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던 일본은 명·청 교체기부터 화이론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고학은 그러한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다.

    여기서 가쿠다이는 일본이 ‘고대의 지극한 덕이 베풀어지는’ 문명국임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역시 그렇다고 치켜세우고 있다. 조선이 성리학 일존주의를 고수하던 나라임을 생각하면, 성리학을 비난하는 가쿠다이의 입장에서 이러한 칭찬은 외교적 언사에 불과하다. 아니면 예전처럼 중화문명을 정점으로 위계적으로 일본을 하대하지 말고, 이제 중화를 벗어나 서로 대등한 문명국으로 인정함이 어떠하냐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가쿠다이는 명·청 시대 법률에 나타난 흉악한 일들을 근거로 중국을 비판하고, 부부 간에 지조를 지키는 일이라든지 나라에 거지가 없는 것은 중국이 네덜란드를 따라올 수 없다고 했으며, 중국만을 귀하다고 여기고 이적(夷狄)의 가르침을 천시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라는 주장을 거듭한다.

    에도 막부는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 네덜란드에 제한적 교역을 허용했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 과학과 학술도 수입했다. 가쿠다이가 중국과 네덜란드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한 것은 중국적 권위의 상대화를 의미한다. 중국은 이제 천하가 아니라 네덜란드와 같은 ‘서양 오랑캐’와 병칭되는 하나의 나라 지위로 떨어진 것이다. 가쿠다이가 이어서 순임금의 법도와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이 중국이 아니라 조선, 일본, 류큐, 베트남에 펼쳐져 있다는 주장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명은 더 이상 중국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또 가쿠다이는 “옛날부터 일본의 나가사키에 배를 댄 서양 나라의 수가 백이삼십을 헤아리지만, 당시 중국에서 통용되던 지도나 지리지 등에는 그 이름조차 실려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 나라에는 각각 그 나라의 도가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중국 사람들이 파악한 것보다 훨씬 거대하며 그들에게는 그들 각자의 도가 있다는 이해다.

    마지막으로 가쿠다이는 세상이 넓은 걸 알지 못하고 시대와 상황을 따지지도 않은 채 ‘군자의 도’를 억지로 펼치고자 하는 원중거를 에두르지 않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원중거는 짤막하지만 단호한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원중거는 세상의 유자가 중국을 중시하고 이적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좁은 식견이며, 성인의 도와는 다르다고 한 가쿠다이의 의견을 ‘뜻은 크지만 흐리멍덩한 견해’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말은 ‘촌스러운 선비들이나 놀라게 할 수 있을 정도’라며 평가절하한다. 그러고는 ‘천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양은 음보다 앞서며, 성인이 지극히 공정하다고 해도 화는 안에 있고 이는 밖에 있다’라고 하여 기존 성리학적 세계관과 화이론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중국 사람이면서도 그 행동을 오랑캐와 같이 한다면 그를 오랑캐 취급할 것이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의 교화를 받게 되면 중국과 같이 대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웅(揚雄)이 ‘그런 사람이 중국 안에 있으면 쫓아낼 것이고, 오랑캐 땅에 있으면 끌어들일 것’이라고 한 말도 이런 뜻입니다. 그렇지만 중국 밖에서 태어난 사람은 진량(陳良)을 사모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촌스러운 선비들이나 놀라게 할 수준

    화이의 구별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행동에 놓여 있다고 한 인용문 전반부의 언급은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화이의 기준을 지역이나 종족이 아닌 문화에서 찾는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많이 인용된다. 뒤이어 제시한 한나라 철학자 양웅의 주장은 원래 한유(韓愈·768~824)의 글 속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그런 사람’이란 ‘명색은 유가이나 행실은 묵가인 사람, 또는 명색은 묵가이나 행실은 유가인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묵가’는 유가 이외의 사상을 대표한다. 즉 유가 이외의 사상을 신봉하는 오랑캐가 혹시 있다면 그를 교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량(陳良)은 ‘맹자’에 등장하는 초나라 학자로, 초나라는 남방 오랑캐 지역이었다.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흠모한 그는 북방으로 유학을 하게 되는데, ‘중국으로 유학한다’는 뜻의 ‘북학(北學)’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북학을 한 이 선비보다 뛰어난 중국 본토의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맹자는 진량을 ‘호걸과 같은 선비’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원중거의 이 대답은 종족이나 지리에 상관없이 ‘중화의 문화를 소유하면 중화’라는 해석을 부정한 것이다. 즉 그는 일본을 중화에서 독립한 문명국으로 인정해줄 생각이 없음을 단호하게 표현했다.

    계미년 통신사절이 귀국하고 1년이 지난 1765년, 11월에 한양을 떠난 홍대용은 12월 하순 꿈에 그리던 북경(北京)에 입성한다. 이듬해 봄에는 과거응시를 위해 북경에 머물던 강남 출신 한족 선비들을 만나 교유한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홍대용은 성리학을 옹호하고 양명학을 비판하는 보수적인 학문관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가쿠다이에게 보인 원중거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후 중국 선비들과의 수차 필담 교유와 서신 왕래를 통해 학문에 대해 훨씬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된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내외는 없으며 모두가 중심이라는 ‘의산문답’의 주장은 화이론을 해체할 수 있었고, 귀국 이후 수십 년간 박지원, 박제가에게 북학의 열풍을 전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연행의 경험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장문계갑문사’에 보이는 원중거는 왜 이렇게 일본 문사들에 대해 공격적이며 경직된 모습일까?

    추론의 실마리는 그가 남긴 ‘승사록’에 남아 있다. ‘승사록’에는 통신사절이 아직 일본을 향해 출항하기 전 부산에서 원중거가 다른 두 서기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원중거가 외면한 조선 변화의 힘

    “일본인은 정자와 주자를 모르기 때문에 성리학으로 이들을 이끌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을 들은 두 서기는 “일본인들에게 정주학을 강요하면 화합이 깨질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고 답한다. 이에 원중거는 “예의의 나라 조선이 공경함을 지니고 관복을 단정히 한 채 행동의 법칙을 잃지 않고, 정주의 성리학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으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중거는 일본으로 향하기 전 미리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확고히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신의 신념을 일본에서 충실히 실천하려고 했던 듯하다.

    ‘장문계갑문사’는 일본인 독자를 예상하고 일본 사람이 만든 저술이다. 물론 통신사절이 그 선배 통신사절과 일본 사람들이 주고받은 필담의 기록을 얻어서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필담집을 엮는 일본인 문사들이 언제 다시 올지 기약 없는 조선인 통신사절을 예상 독자로 삼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일본 측을 훨씬 멋있게 그렸을 것이고, 그것이 필담집을 읽는 일본인들의 재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조선에는 중국 연행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데 비해 일본 사행의 자세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일본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분위기 역시 원중거가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조선을 바꿔나갈 힘은 원중거가 외면하고 있는 ‘바깥’에서 용틀임하고 있었다. 홍대용은 화이론을 벗어나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했고, 정약용은 유학의 정치적 실천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달라진 세상에 대응하는 힘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중거 역시 적지 않은 조선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리라. 기존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홍대용이나 정약용 같은 이들이 조선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원중거 같은 사람과 충돌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힘들이 부딪쳐 결과적으로 변화의 폭이 결정되는 것 아닌가. 원중거와 가쿠다이의 만남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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