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시 박경리기념관.
동피랑에서 내려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소설가 박경리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박경리 소설의 모태가 되는 초기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되는 강구안을 일단 벗어나라고 가리킨다. 1962년 작품임에도 소설의 첫 대목은 지금의 통영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의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이 있고 언덕빼기에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기세는 빈약하다.
소설이 묘사한 대로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통해 이 섬 아닌 섬에 들어선 나는 언덕배기에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집들과 골목을 배회하고 나서 항구를 잠시 빠져나갔다. 소설의 시작은 잔잔하지만 실은 이 작품은 문약하고 선비적인 김약국의 주인 김봉제 집안의 격정적인 풍비박산을 다루고 있다. 격동기의 삶들이 간악함과 치정과 욕망의 굴레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파국을 맞는 작품이다. 대하소설 ‘토지’와 더불어 박경리는 이렇게 한 집안의 몰락과 그로 인한 비극을 평생의 주제로 삼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창 밖으로 짭짤한 바람을 잠시 맡은 후, 곧 차를 몰아 박경리 묘소로 10여 분을 달려갔다. 십수 년 전 원주 자택에서 찾아뵈었을 때처럼 이곳 묘소도 검박하게 단장돼 있었다. 당대 최고의 작가임에도 과시적인 조형과 장식을 찾아볼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선생의 친필을 그대로 따온 ‘朴景利’ 세 글자는 소설 이외의 것에 엄격했던 작가정신의 단호한 표현처럼 보였다. 묘소 아래에, 산기슭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기념관 또한 박경리의 작가정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를 몰아 통영 시내로 돌아왔다. 해는 길어졌으나, 빗줄기에 의해 지독히도 흐린 날씨가 되었기에 항구도시는 벌써부터 하나둘씩 불빛을 밝혔다. 직선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동해안의 항구들과 달리 여수와 남해와 이곳 통영은 들고나는 지형지물의 형태를 따라 항만과 시장과 도로가 형성돼 있어서, 저녁 무렵 불이 밝혀지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일부러 인공 조명으로 도시를 치장할 필요가 없는, 그런 풍경이다.
상처 입은 용
통영 한복판에 조성된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갔다. 약간은 기구한 장소가 됐다. 통영시는 몇 해 전부터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그가 치른 정치적 사건과 행적의 일부분을 과장해 세차게 비난하는 경우들이 있어 윤이상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음악 문화를 창출했던 지자체가 이제는 그 이름을 조금씩 삭제하는 중이다. ‘윤이상국제음악제’가 ‘통영국제음악제’로 바뀌었고 ‘윤이상국제음악당’도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바뀌었다. 그의 생가터에 조성된 기념공원도 윤이상이라는 이름 대신 ‘도천테마파크’를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작곡가 윤이상의 생가터에 윤이상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하고 윤이상의 유품을 전시해놓고는 정작 윤이상이라는 이름 대신 ‘도천테마파크’라고 부르니, 낯설고 괴이쩍다.
소설가 루이제 린저와 대담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태생적으로 가혹한 운명의 상처를 가진 음악가다. 윤이상이 어머니로부터 일곱 살 즈음에 들었다는 태몽이 그것이다.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며 비상을 한다. 푸른 하늘보다 더 찬연한 비늘을 퍼득이며 용은 떠오른다. 옛적부터 영산으로 꼽히는 지리산 위를 비상하던 용은 이윽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온 힘을 쓴다. 그러나 용은 오래전부터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기는커녕 더 이상 비상할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윤이상을 ‘상처 입은 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윤이상은 1917년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은 한국 민족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윤이상과 김순남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현대음악을 익힌 윤이상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광복 이후 한국 음악계의 주도적 작곡가로 인정받는다. 1956년 그는 현악 사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바로 그해 윤이상은 유럽으로 떠난다. 잠시 파리를 경유해 물정을 확인한 후 베를린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그곳이 평생의 유랑지가 됐고, 그곳에서 남북 분단에 따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일로 끝내는 영구 귀국을 하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이 됐다.
음악가로서 윤이상은, 현대의 급진 아방가르드 경향을 주도함은 물론 동서양의 갈등과 교차와 긴장과 대화라는 물음을 오선지로 제출했다. 1959년 작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시작으로 ‘바라’(1960),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辭·1963), 오페라 ‘류퉁의 꿈’(1965),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1966),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68),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76), 오보에·하프·관현악을 위한 이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1976), 1980년대에 나온 5개의 교향곡이 그가 내놓은 답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