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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 멸종위기종 ‘우리가 지켜줄게’

사람이 만들고 자연이 완성한 비밀정원

경기 포천 평강식물원

  • 김현미 기자 | hmzip@donga.com

사람이 만들고 자연이 완성한 비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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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말 화려했던 벚꽃도, 고고했던 목련도, 지천이던 개나리, 진달래도 이듬해를 기약하고 물러갈 즈음 아래쪽에서부터 철쭉 축제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게으른 벚꽃이 성급히 돋아난 초록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배시시 웃고 있는 곳이 있다. 한라산 중턱에서 보았던 키 작은 털진달래도 바위 틈에서 활짝 웃으며 관람객을 맞는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우물목길 203번지 평강식물원. 겨울이 긴 만큼 평강의 봄은 느지막이 찾아온다. 북위 38도, 위도상 국내 최북단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의 ‘지각 개화’가 반가운 이들도 있다. 이즈음 이래저래 일상에 쫓겨 꽃구경을 놓친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1999년 조성을 시작해 2006년 5월 문을 평강식물원은 59만5542㎡(18만여 평)의 부지 위에 암석원, 고층습지(멸종위기식물생태보존원), 고산습원, 습지원, 들꽃동산, 만병초원, 연못정원, 이끼원, 자생식물원, 고사리원, 화이트가든, 잔디광장, 자연식생보존지역, 약용식물원, 멸종위기식물 전시가든 등 12가지 생태정원과 3가지 스토리가든이 조성돼 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조성한 고산식물 전시장인 암석원과 습지 생태를 복원한 습지원은 국립기관들도 벤치마킹을 할 만큼 명소다. 또 보유한 8000여 종의 식물 가운데 멸종위기종인 노랑만병초, 조름나물, 개병풍, 단양쑥부쟁이, 가시오갈피나무, 독미나리의 서식지외보전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이런 이유로 평강식물원이 학계와 관련 업계로부터 ‘제대로 된 식물원’이라는 평가를 받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강식물원은 지난 5년 새 큰 위기를 맞았다. 봄만 되면 화려한 외국 원예종 꽃을 대량으로 식재해 관람객을 유혹하는 여느 ‘가든’들과 달리, 평강식물원은 주변 산림자원과 환경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자연친화적으로 조성된 만큼 언뜻 보면 동네 뒷산에 온 듯 소박하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놓인 돌멩이 하나에도 ‘이유’가 있다. 그만큼 사람 손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손은 많이 가는데 관람객은 늘지 않고, 경영난을 겪으면서 관리가 소홀해지자 관람객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을 거듭하다 결국 지난해 말 주인이 바뀌었다.





흙 속에 묻힌 진주

부산을 기반으로 부동산 투자와 개발을 해온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강식물원을 인수한 권현규(37) 대표가 경영을 맡고, 자칭 ‘철학을 전공한 농부’ 김기현(43) 원장이 식물원 정상화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권 대표는 ‘경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물원을 창업하신 분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유지해 경기북부 지역의 관광 중심이 되는 최고의 식물원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김 원장은 “평강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 같은 식물원”이라면서 “올해 첫 행사인 ‘고산식물 전시회’(4월 22일~5월 14일)를 홍보하러 인근 지역 식당 등을 찾아갔다가 절반가량이 평강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개원한 지 11년이 지났는데도 포천 안에서조차 식물원을 모른다는 것은 홍보가 전혀 안 됐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식물원이 8만 평이라면 주변 유휴지가 10만 평이다. 기존 식물원은 최대한 보존하고 나머지 공간을 활용해 식물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게 하는 힐링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 계획 안에는 생태체험학습장, 캠핑장 조성과 리조트 사업도 포함돼 있다.


고산식물 보금자리 암석원  

이처럼 식물원이 경영난으로 몸살을 앓는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가 되면 식물은 변함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이정화(39) 가든관리팀장은 자신이 돌보는 ‘애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저희 식물원에는 포장된 길이 없어요. 350~400m 고지에 있지만 평지에서부터 완만한 언덕, 숲길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자리 잡은 공간이죠. 암석원의 고산식물들이 개화해 5월 중순까지 피고나면, 5월 중순부터는 습지원 쪽에서 부채붓꽃이 군락으로 핍니다. 그 시즌이 끝날 무렵 멸종위기종인 노랑만병초를 비롯해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각종 만병초가 꽃을 피웁니다. 저희 식물원이 보유한 만병초만 70종이 넘는데 이를 위해 따로 만병초원을 조성해놓았습니다. 6월 중순 이후로는 다양한 야생화를 식재한 들꽃동산부터 각 정원마다 일제히 여름꽃이 피어납니다. 매일 와도 날다마 달라지는 풍경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 우리 식물원의 특징이죠.”

완만한 언덕길을 20m쯤 올랐을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키다리 노간주나무 두 그루가 호위무사처럼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암석원이 나온다. 암석원은 수목 한계선에 자생하는 고산식물과 저지대의 건조한 암석이나 모래땅에 서식하는 다육식물을 위한 공간이다. 백두산과 한라산, 로키산맥, 알프스산맥, 히말라야, 몽골 등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식물 1000여 종의 보금자리다.

아무리 국내 최북단에 있다 해도 해발 2000m 이상 고지대에서 사는 식물이 자라려면 그에 맞는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식물원 조성 당시 경북 밀양 얼음골과 돌산의 풍혈지대에 착안해 지하에 유공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 마사토, 용토를 차례로 덮어 아래로부터 시원한 공기가 순환되고 배수가 잘되게끔 했다. 큰 바위 밑과 돌멩이 사이사이로 백두산떡쑥, 구슬댕댕이, 월귤, 분꽃나무, 털진달래, 넌출월귤, 고상동자꽃을 찾아 하나씩 이름을 불러주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특히 식물들이 자라는 베드를 한반도 형태로 만들어 채집한 위치에 해당 식물을 식재해놓은 데서 식물원 측의 섬세한 배려도 읽을 수 있다. 또 식물마다 고유번호가 있다. 식물 족보다.

“고유번호는 예를 들어 2000년에 255번째로 평강식물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주죠. 2015년 2월 5일에 파종해서 3월 24일에 발아했고 5월 5일에 옮겨 심었다는 식으로 족보를 철저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력이 없는 것은 함부로 심지 않습니다.”(이정화)

암석원 곳곳을 자세히 보면 산성베드와 알칼리베드가 따로 있다. 고산식물 중에서도 구슬댕댕이, 분꽃나무처럼 알칼리성 토양에서 잘 자라는 식물과 진퍼리꽃나무, 월귤 같은 털진달래과처럼 산성 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을 구분해놓은 것. 이 팀장은 “식물원은 관람객이 보기 좋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에 맞춰 식재해야 한다”면서 “강원도 정선의 석회암을 가져다 놓으면 풍화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pH 농도가 높아진다”고 설명한다.

다음 코스는 고층습지. 강원도 인제 대암산 용늪(199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람사협약 습지로 지정)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백두산 장지 연못을 생태적으로 재현했다. 고층습지는 동식물의 사체가 분해되지 않고 오랜 세월 퇴적돼 만들어진 지형.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영양이 빈약하고 석회분은 적으며 토양이 산성화돼 서식하는 식물도 제한적이다. 고층습지의 산책용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개병풍, 노랑만병초, 조름나물, 단양쑥부쟁이, 독미나리, 가시오갈피나무, 섬시호, 솔붓꽃, 갯봄맞이꽃, 산작약, 백부자, 날개하늘나리, 세뿔투구꽃, 제비동자꽃, 섬개야광나무, 미선나무, 나도승마, 해오라비난초가 하나씩 얼굴을 내민다. 숲 그늘이 깊어지면서 줄기 끝이 돌돌 말린 막대사탕처럼 생긴 관중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팀장이 다가와 “관중이에요. 왕관처럼 예쁘죠?”라며 묻는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막대사탕 같던 관중이 어느새 신라 금관 같다.

관중 옆에 개병풍이 넓적한 잎을 드러내며 인사를 한다. 깊은 계곡 응달에서 자라는 개병풍은 6~7월에 깃 꽃대 위에 흰꽃을 피운다. 잎이 크게 자라 예전에는 우산 대신 썼다고 하는데 이제는 멸종위기종이 돼 귀한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할 것 같다. 흔히 나물로 먹는 곰취도 여기서 보니 예사롭지 않다.


멸종위기종 만병초, 나물용 곰취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계곡같이 시원하고 습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식물을 위해 만든 고산습원이다. 산 위에 땅을 파고 S자형 계류와 자연형 연못을 통해 물이 천천히 흐르도록 유도해 수변식물과 침수식물을 식재했다. 물론 폭포와 연못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데크를 걸으며 붓꽃류, 설앵초, 물매화, 분홍바늘꽃 등 자생식물을 감상할 수 있다.
 
평강식물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만병초원이다. 진달래와 비슷한 꽃이 피는 만병초는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고 잎은 ‘만 가지 병에 쓰인다’ 해서 만병(萬病)이란 이름이 붙었다. 건조하거나 기온이 떨어지면 잎 끝이 뒤로 말려 스스로를 지키는 특성이 있다. 평강은 멸종위기종인 노랑만병초를 비롯해 각종 만병초만 모아 따로 가든을 조성했다. 멸종위기종인 노랑만병초는 환경이 맞는 다른 가든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다.

원 내 가장 위쪽에 있는 자생식물원은 평강식물원이 생기기 전부터 이 땅의 원주인인 소나무와 참나무 숲에 자생수목과 야생화를 식재해 보호하는 공간이다. 현재 뻐꾹나리, 피나물, 은방울꽃, 산수국이 자란다.
다음은 전국의 양치식물을 모아놓은 고사리원. 꽃을 피우지 않고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은 무분별한 채취로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해 점차 희귀식물이 되고 있다. 평강식물원에서는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양치식물을 수집하고 있으며, 포자번식을 통한 증식은 이미 4년간의 실험을 거쳐 거의 모든 양치식물의 증식에 활용하고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마세요”

“요즘 산에 가면 흔하던 앵초조차 보기 어려워졌어요. 사람들이 다 캐간 거죠. 그렇게 캐서 잘 키우면 모를까 대부분 금방 죽여요. 멸종위기종인 해오라비난초를 키워봤다고 자랑하는 분도 계세요. 식물도 생명인데 제대로 돌보지 못할 거라면 키우지 말아야죠. 야생화 사진을 예쁘게 찍으려고 주위의 시든 꽃을 꺾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께 꽃이 시드는 것은 씨앗을 맺어 내년을 준비하는 것인데 사진 한 장 찍으려고 꺾어버리면 그 식물은 종자를 맺을 수 없게 된다고 말씀드려요.”

이정화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숲길을 빙 둘러 내려왔더니 어느새 평강식물원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연못정원이다. 1000평의 면적에 특수 용기를 매설해 50여 종의 수련류를 품종별로 식재한 곳이다. 습지용 아이리스와 부처꽃, 노루오줌, 비비추류 등이 아름답게 피지만 무엇보다 연못정원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개구리 울음소리다. 한때 수조의 개구리 알을 모두 건져내 버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개구리도 연못정원의 당당한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식물원을 만든 것은 사람이지만 완성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 식물들은 자세히 봐야 예뻐요.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질리지도 않습니다. 생김새로 식물을 판단하지 말고 종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하나하나 너무나 귀한 애들이죠. 식물 해설을 하면서 꼭 드리는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이 낸 입장료가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지만 멸종위기종과 자생식물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귀한 돈입니다.”

바람을 맞으며 새소리를 들으며 꽃과 대화하는 즐거움. 6000원의 가치가 이처럼 클 수 있을까.




신동아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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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기자 | 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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