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 칙서 실종 사건

사관의 논평에는 사심이 없었을까 | 나라가 약하면 굴욕을 당한다

  • 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입력2017-05-19 09: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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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한국고전번역원 刊 ‘사필(史筆)’  





    사관의 논평에는 사심이 없었을까 '평안 감사 현석규의 두 얼굴'

    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반원와철(攀轅臥轍)’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선정을 베푼 지방관이 임기가 다 차 떠나게 되자 그 고을 백성이 수레에 매달리고 바퀴 밑에 드러누워 못 가게 막았다는, 다소 코믹하면서도 훈훈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선정을 펼친 지방관을 백성이 유임하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미담이 더러 전해진다. ‘성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평양부(平壤府) 백성이 글을 올려서 평안 감사 현석규를 유임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주상이 내관 이효지를 보내어 어의(御衣)에 술까지 하사하였고, 또 손수 글을 써서 내려 칭찬했다.〈성종실록 10년 2월 12일〉

    백성이 선정을 베푼 수령의 유임을 청하자, 임금은 수령을 칭찬하고 의미 있는 상까지 내려줬다니, 이 역시 ‘반원와철’에 비길 만한 훈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에 실린 사관의 상반된 시선은 좀 뜻밖이다.


    반원와철(攀轅臥轍) vs 포퓰리즘
    현석규가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으려고 정원 외 아전의 수를 줄이고는 “쓸모없는 인원을 줄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백성이 수령의 불법행위를 고소할 수 있게 하고는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그가 선정을 베푼다고 생각하자 현석규는 백성을 사주하여 자기를 유임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글을 임금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었다. <성종실록 10년 2월 12일>

    사관은 평안 감사 현석규의 행위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한 일종의 포퓰리즘(populism)이었다고 봤다. 심지어 백성을 사주해 의도적으로 유임을 청하게 했다고 평했다. 쓸모없는 아전의 수를 줄이고 백성에게 고통을 호소할 길을 열어준 것은 겉으로는 선한 정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관의 비판 어린 시선은 그 이면에 숨은 의도까지 파고들고 있다. 백성과 임금에게는 선한 수령으로 칭송받았지만, 사관에게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로 비판을 받은 평안 감사 현석규는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아보자.

    현석규는 효령대군의 아들인 서원군의 사위다. 왕실 인척인 데다 업무 처리 능력 또한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사관도 그에 대해 “재기가 넘치며 총명하고 영민해 일을 능숙하게 처리한다”며 그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런데 그의 행적 등에 관한 사관의 비평을 살펴보면 ‘교활하다’ ‘아첨이 심하다’ 등 원색적인 비난이 줄을 잇는다. 심지어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여비로 쓰기 위해 가져간 흑마포(黑麻布)를 30필이나 남겨 근검하다는 칭송을 받은 일에 대해서도 사관은 “명예를 사서 임금의 총애를 받으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라며 삐딱한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과연 사관의 평대로 교활하고 아첨을 일삼은 간신일까. 만약 사관의 평만으로 그를 섣불리 재단한다면 평생 신뢰하고 무한한 총애를 아끼지 않았던 성종은 간신을 가까이한 용렬한 임금이 될 판이다. 따라서 사관의 평만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에는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성종의 승부수
    그를 둘러싼 조정의 사건들을 통해 사관이 그를 비평한 단서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가 도승지로 있을 때 동부승지 홍귀달과 크게 한판 다툰 적이 있었다. 홍귀달이 도승지인 자신과 일언반구 상의하지 않고 성종에게 무고죄로 의금부에 끌려간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린 일 때문이었다. 당시 현석규는 격노한 나머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홍귀달을 ‘너(爾)’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둘 사이의 다툼은 승정원의 나머지 승지 네 명이 모두 홍귀달의 편에 서면서 1대 5의 싸움으로 번졌다. 조직의 위계질서를 어긴 홍귀달이나 조신(朝臣)으로서의 체통을 잃어버린 현석규나 잘못으로 따지면 ‘오십보백보’인 듯한데, 주변 동료들의 대응은 지나칠 만큼 한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성종은 여섯 승지 모두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이후부터 생겼다. 승지 중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던 현석규만 오히려 자급이 올라 종2품 대사헌으로 승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간들의 비판이 잇따랐는데, 성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를 정2품의 형조판서로 승진시키며 자신이 어느 쪽 손을 들어주었는지를 신료들에게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러자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비난 여론은 더욱 거세졌고, 급기야 지평 김언신은 현석규를 ‘음험한 소인’이라며 맹렬히 배척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소인인 줄 아느냐”는 성종의 물음에 김언신은 ‘용모가 음험하다’는 다소 뚱딴지  같은 대답을 했다. 용모가 비호감이라서 소인이라니… 이쯤 되니 슬슬 현석규를 비난하는 쪽의 진의가 살짝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조사해보니, 김언신의 배후에는 현석규의 동료였던 우승지 임사홍이 있었다. 그리고 여론의 비판을 주도한 사간 박효원과 유자광 등도 모두 한통속임이 드러났다. 이 일로 관련자들은 귀양을 갔고, 주동자인 임사홍은 성종의 미움을 사서 오랫동안 관직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리고 현석규를 배척한 임사홍과 유자광은 훗날 연산군 대에 이르러 나라를 어지럽힌 희대의 간신배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용모가 음험하다’
    이쯤 되면 그가 과연 아첨을 일삼은 소인인지, 아니면 오히려 편파적인 집단 따돌림을 당한 억울한 피해자인지 판단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임금에게 그토록 잘 보이려고 했던 그는 왜 동료들의 인심을 얻지 못한 것일까. 사관은 그를 두고 “남의 숨은 잘못을 들추어내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자기를 뽐내고 남을 깔보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평했다. 이 말을 곰곰이 따져 보면 결국 동료들 간에 덮어줄 수도 있는 사소한 흠까지 드러내기를 좋아해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현석규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았지만 성종에겐 오히려 훈구 신료들을 견제해줄 든든한 심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서 다시 평안 감사 시절의 뒷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성종의 명으로 현석규에게 상을 전하러 간 이효지는 임금에게 총애를 받던 환관으로 제법 권세가 있었기에 그가 평안도 본가를 오갈 때마다 지방관들의 뇌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현석규 역시 이효지를 환영하는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수많은 예물을 안겨주었는데, 그 예우가 얼마나 극진했던지 사관은 이를 두고 “마치 자식이 아버지 섬기듯 하였다”라고 비꼬았다.

    그리고 이효지가 떠나던 날 현석규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눈물을 흘리며 주상을 그리워한다는 것도 함께 말씀해주시오”라고 신신당부했다. 환관이지만 임금이 보낸 사절이니 극진히 대접하고 싶었던 애틋한 진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아첨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가식적인 행동이었을까. 사관의 논평이라는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출 만큼 깨끗한 상태였을지, 그 거울에 비친 현석규의 모습은 과연 본래의 얼굴 모습 그대로였을지 궁금하다.



    나라가 약하면 굴욕을 당한다 '칙서 실종 사건'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예나 지금이나 외교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중국, 일본, 북방 유목민족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특히나 외교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조 12년(1736) 3월 15일, 영조는 원자(元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 책봉된 세자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다. 다음 해 7월 25일, 세자 책봉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서명균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청나라로 떠난다.

    “완전히 착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그리고 영조 14년(1738) 1월 17일, 청나라의 칙사가 세자의 책봉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가지고 조선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조정에서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부담스러운 것은 사신 접대를 위해 치러야 할 갖가지 비용 때문이었고, 기쁜 것은 주청사를 보낸 지 6개월 만에, 기대했던 것보다 책봉 승인을 빨리 받게 됐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비상 체제에 돌입해 칙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한편 하전(賀箋), 즉 세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라고 전국에 공문을 보내는 등 책봉 관련 의식 절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김빠지는 소식이 전해졌다.

    예조 판서 송진명: 이번 칙사의 행차는 세자를 책봉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고 팔도에 공문을 보내 하전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이미 온 것도 더러 있습니다.

    영조: 완전히 착각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송진명: 잘못 전달한 역관은 의금부로 잡아다 처벌해야 합니다. 또한 칙사가 무슨 목적으로 오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변경의 신하도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올라온 하전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돌려보내면 괜히 웃음거리만 될 것이니 일단 받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알고 보니 이때의 칙사는 세자 책봉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2년 전에 즉위한 청나라 건륭제가 자신의 생모를 황태후로 높이고, 부인을 황후로 책봉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보낸 칙사였다.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글을 올리라고 공문까지 돌린 조정으로서는 몹시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사실을 알게 돼 다행이었고, 칙사가 오는 것은 그것대로 사실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헛고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말을 잘못 전한 역관과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의주 부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이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됐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영의정 이광좌: 원접사(遠接使)가 이조판서 조현명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우의정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였는데, 매우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라 가지고 왔습니다.

    영조: 무슨 편지인가?

    우의정 송인명: 대개 칙사가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 쪽 사람이 으레 밤을 틈타 몰래 칙서를 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칙서가 없이 빈 상자만 있었다고 합니다.

    영조: (편지를 가져와 읽은 후) 이는 참으로 전에 없던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송인명: 혹시 저들 나라에서 앙심을 품은 자가 있어서 두 칙사에게 문제를 일으키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한 것이 아닐지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송진명: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이려고 일부러 다른 곳에 감추어두었다면 어차피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권력 다툼을 하느라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저들 또한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어 분명 우리나라 탓으로 돌릴 것이니, 장차 큰 사달이 날 것입니다.

    이광좌: 이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일이 아니니,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해야 합니다. 어찌 우리가 먼저 동요하겠습니까. 만일 저들이 칙서가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고 동요한다면, 우리도 함께 놀라고 동요하며 위로하면 그뿐입니다. 혹시 그들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찾아내라고 한다면, 우리는 ‘칙서를 받아서 넣고 잠그는 것을 모두 당신들이 주관했으니, 어찌 우리가 잃어버릴 리 있겠는가’라고 해야 합니다.

    영조: 내 생각도 영의정의 말과 똑같다.

    송인명: 칙사가 우리나라 경내로 들어온 직후에 칙서를 가진 사람을 일부러 물에 빠뜨려 물에 약간 젖게 하고, 이를 핑계로 상자를 열어보자고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영조: 이는 임금 앞에서 할 말이 아니구나.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사라진 칙서,‘냉가슴’ 조정
    칙서가 사라졌다. 칙사가 의주에 도착하면 대개 밤에 몰래 칙서를 훔쳐봤던 모양이다. 칙서 내용을 미리 조정에 보고해 대비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평소대로 했는데, 문제는 상자 안에 칙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의주로 마중 나간 원접사가 놀라서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매우 당황하면서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논의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청나라가 아무리 기강이 없다고 해도, 어찌 칙서를 잃어버릴 리 있겠으며, 또 어찌 일부러 감추어두고 우리에게 뇌물을 요구할 리가 있겠는가. 설령 도중에 잃어버렸다 해도 그 책임은 저들에게 있고, 몰래 숨겨놓고 뇌물을 요구한다 해도 우리나라는 할 말이 있다. 그런데 칙서가 없어졌다는 보고가 있자 온 조정이 불안해하고, 심지어 물에 젖게 한 뒤 열어보도록 청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묘당(廟堂)에서 내놓은 대책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14년 2월 7일 〉

    원래 칙서는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조선의 임금에게 전달하기 전까지는 청나라 측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없어졌다 해도 조선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칙사들의 횡포를 오랫동안 겪어온 터라 조정은 동요하고 있었다. 상자를 일부러 물에 빠뜨려 확인해보자는 구차한 방법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임금과 중신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칙사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칙서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한동안 조정을 바짝 긴장하게 한 이 사건의 결말은 결국 어떠했을까.

    칙사가 들어왔다. 주상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사를 영접했다. 돌아와서 인정전에 나아가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영접하여 다례(茶禮)를 행하고, 그들의 하인들을 불러 인정전 밖에서 술을 하사했다. 지난번에 칙서를 분실했다고 한 것은, 칙사가 가죽으로 만든 상자 속에 보관해두고 있다가 파주에 도착한 뒤에야 내놓았기 때문에 역관들이 잃어버렸다고 오인한 데서 생긴 일이었다.
    〈영조실록 14년 2월 19일〉

    칙서는 칙사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지만, 노심초사했을 임금과 중신들은 허탈함에 다리에 힘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몰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고민할 일도 없었겠지만,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하는 조선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칙사는 왜 평소와 달리 칙서를 상자에서 꺼내 본인이 직접 가지고 있었을까. 어쩌면 조선에서 미리 칙서를 훔쳐보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닐까. 이유야 어쨌든, 저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한 나라의 조정을 들쑤셔놓았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며 시작된 이 사건은 약소국의 설움과 외교의 어려움을 잘 보여 주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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