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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박경리·윤이상의 고향 통영

  • 정윤수 |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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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두리 출신이어서 변방 의식을 획득하는 게 아니다.
  • 중심, 주류로부터 심미적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면서 사유의 힘을 유지해야 한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비가 내렸다. 주룩주룩, 내렸다.

창원에서 일을 보고, 통영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언제 또 내려오랴 싶어 급히 소형차를 빌려 진영을 향해 달리는데, 비가 내렸다. 많이 내렸다. 와이퍼의 왕복 속도를 최고치로 올리고서야 겨우 시야가 확보됐다.

운전 경력 20여 년으로 어지간한 차는 다 몰아봤건만, 지난해 출시됐다는 이 소형차의 시트 포스트는 지나치게 낮게 잡혀 있어 창원에서 진영으로 가는 국도를 달리는데, 몸이 시트에 적응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몸과 시트가 겉돌아 빗길 운전이 힘들었다.

엄격하게 절제된 묘역

예전에도 김해에서 한림을 거쳐 진영으로 들어가는 14번 국도를 달린 적 있다. 그때 참으로 기이한 풍경을 봤다. 한림에서 진영 사이에 ‘가구 거리’가 형성됐는데, 도로 양편으로 줄지어 선 가구 상가마다 ‘내레이터 모델’을 앞세워 호객하고 있었다. 한두 가게도 아니고 모든 가게가, 십수 개 넘는 모든 가게가 스피커를 왕왕왕 시끄럽게 틀어놓고 짧은 치마에 바짝 달라붙는 배꼽 티를 입은 아가씨들이 춤을 춰가면서 호객하는 장면이란, 참으로 기이하고도 슬펐다. 다시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주룩주룩 비가 내려 국도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아마도 이토록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런 호객 행위도 삼갔을 것이다.



비가 와서 차선은 죄다 지워져버렸고, 지방의 국도변이 어디나 그렇듯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도로 주변의 끝없이 무질서한 풍경은 안전운전을 교란했다. 그 바람에 오직 내비게이션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좌회전하세요, 우회전하세요, 전방에 미끄럼 주의 구간입니다 하는 경고음에 귀를 바짝 세우고, 달리고, 또 겨우 달려서 진영에 당도했다.

진영, 이라고만 써도 될까. 잠시 생각해본다. 봉하마을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금세 알아듣겠지만 이러한 호명은 순식간에 금속성의 날카로운 정치성을 발현한다. 그렇다고 진영읍 본산리 30번지라고 쓸 수도 없고 고(故) 노무현 대통령 묘역이라고 쓰기에도 불편하다. 이런 행정 지번은 곧잘 어떤 알리바이로 들리기 때문이다. 살았을 적에도 그러했고 서거 이후에도 오늘의 정치와 사회에 긴급한 문제로 늘 부각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해 지나가는 ‘행인 1’의 관점에서 몇 글자 쓰는 것조차 어찌 이토록 힘겨운지, 다시 실감한다.

어쨌든 다들 봉하마을이라고 하고, 또 뉴스에서도 지명의 뜻으로든 아니면 정치적 의미로든 어지간하면 다들 봉하마을이라고 하니, 달리 말을 찾아서 마음을 평정시키기보다는 슬쩍 그 말에 기대어 봉하마을로 들어섰다. 평일 낮 주룩주룩 비가 오는데도 참배객이 적지 않았다. 이 묘역의 특징답게 아이들을 데리고 참배하러 나선 젊은 부부들이 삼삼오오 걷거나 서서 비를 맞고 있는 묘역을 바라봤다. 묘역은 낮게 조성됐고, 그 너머 오른편으로 사자바위, 그리고 또 왼편으로 부엉이바위가 보였다. 비가 봉하마을 전체를 다 적시고 있었다. 엄격하게 절제된 묘역이었다.

분단의 치명적 상흔

대추나무 뒤편 하늘은 벌써 짙은 보라색이다. 나는 보라색을 싫어한다. 손톱에 들이는 봉숭아물도,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꽃도, 코스모스의 보라색 꽃도 다 싫다. 어머니의 젖꼭지 색깔까지도 싫다. 보라색은 어쩐지 아버지의 하는 일을 떠올리게 해주고 어머니의 피멍 든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보라색은 또 말라붙은 피와 같고 깜깜해질 징조를 보이는 색깔이다. 옅은 보라에서 짙은 보라로, 그래서 야금야금 어둠이 모든 것을 잡아먹다가 끝내 깜깜한 밤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경남 진영 출신 김원일이 쓴 단편소설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의 소년(아마도 어린 시절의 소설가 본인의 초상인 듯)은 보라색으로 물드는 저녁이 싫었다. 그것은 곧 밤의 징조였고, 밤은 삭막한 침묵과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는 긴장으로 덧칠된 암흑이었으며, 또한 그 어둠은 죽음을 향해 직진하는 일방통행로였다. 끝내, 소설의 밤에 순경이 들이닥치고 총성이 울려퍼지고 아버지는 쑥대밭이 된 곳을 뒤로하고 산으로 도망쳤으며 어머니는 지서로 끌려간다. 소년은 소리 죽여 운다. 그때, 달은 보라색 하늘에 걸려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소년은, 피 칠갑을 한 채 턱이 붓고 입은 커다랗게 벌어진 아버지의 시신을 본다. 어릴 적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던 넉넉한 가슴은 ‘그 두려운 보라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원일은 단편 ‘어둠의 혼’을 확장해 장편 ‘노을’을 썼고, 전쟁과 분단의 치명적 상흔들을 불러 모아 대하장편 ‘불의 제전’을 썼다. 김원일의 이 소설에 대해 세부적인 ‘지정학적’ 비평을 한 사람은 역시 진영 출신의 김윤식이다. 1936년 윤삼월에 진영읍 사산리에서 태어난 김윤식은 서울대 정년퇴임 고별 강연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에서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강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언어에 친숙했지요”라고 회상했다. 그는 사산리에서 십리 길을 걸어 대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몇 년 아래로 소설가 김원일이 다녔고 또 그 4년 후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학교를 나왔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김해시 진영읍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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