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님아, 민주당 ‘썩은 내 탈취제’ 촛불 들지 마오!

[한지원의 잠망경]

  • 한지원 정치경제평론가·‘대통령의 숙제’ 저자

    입력2023-06-2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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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으로 간 2000년 낙선운동 주역들

    • “미친 소 너나 처먹어” 촛불을 들다

    • 금배지 단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 촛불은 反보수 권력투쟁

    • 이득을 본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강은미 정의당 의원,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가 나란히 서서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피켓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온다. 5월 20일자 신문에 게재된 사진이다. 조만간 촛불집회도 조직할 기세다. 촛불이 잘 타면 내년 총선에서 ‘야권연대’도 시도할 것이다. 지난 20년 내내 저랬다. “님아, 그 집회 나가지 마오!”라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반(反)보수촛불·야권연대의 역사를 분석하며 그 이유를 말해보겠다.

    5월 2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저지 대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강은미 정의당 의원,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가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5월 2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저지 대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강은미 정의당 의원,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가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反보수촛불·야권연대 역사

    과학자들의 중론에 따르면 후쿠시마 해양 방류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철저한 검증과 감시를 조건으로 방류에 찬성했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국제적 시야에서 보면 윤석열 정부 대응이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전국에서 항의 시위를 조직하는 야당이 유별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해양 방류를 결정한 것은 2021년 4월, 문재인 정부 때다. 문 정부에서 1년 가까이 조사했다는 의미다. 민주당이 내용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내세우는 반대 근거는 대부분이 ‘카더라’ 수준이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방증이다. 국민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원전 오염수” 아닌가. 정치권이 과학적 증거로 국민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현실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오염수를 제대로 처리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야당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한다. 괴담을 선동하면서 정작 일본 정부는 압박하지도 못한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방류가 진짜 쟁점이 아니어서 그렇다. 대장동, 돈 봉투, 코인 등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민주당에 촛불집회만큼 좋은 탈취제가 없다. 두 진보정당엔 촛불집회가 민주당과 선거까지 함께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진보당이 내년 울산·경남 노동벨트에서 당선자를 내려면 민주당이 지역구를 내줘야 한다. 광주에서 출마할 예정인 정의당 강은미 비례대표 의원은 민주당과의 연대에 내년 운명이 달렸다. 평소 보수와 다를 바 없는 민주당은 촛불집회를 통해 ‘진보’ 인증 마크를 단다. 진보정당, 시민단체 등은 야권연대를 통해 국회로 좀 더 수월하게 진입한다. 이데올로기적 명분과 정치적 실리의 교환이다. 이 교환은 역사가 꽤 길다. 그만큼 뿌리도 깊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이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000년 16대 총선 때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이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민주당에 진보 인증서를 부여한 전문가들은 사회운동 또는 촛불집회의 지도자들이다. 2000년 낙선운동이 그 시작이었다. 400여 개 시민단체가 부정부패 정치인을 물갈이하자며 86명의 낙선 대상자를 선정했다. 70%가 실제로 낙선했다. 낙선운동은 기준부터가 당파적이었다. 중립으로 위장한 민주당 살리기였다. 낙선운동 지도자들의 이후 행보가 단적인 증거다. 참여연대 박원순은 민주당으로 가 서울시장이 됐고, 역시 참여연대 출신 김기식은 민주당 당원으로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여성단체연합 지은희는 낙선운동 3년 만에 노무현 정부의 장관직에 올랐다.



    정치적 도구가 된 ‘괴담’

    시민단체들은 4년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무효 촛불에서 중립성이란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아예 벗어던졌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직후 5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범국민행동’을 결성했고, 수만 명이 운집하는 촛불 집회를 열었다. 탄핵당한 대통령이 속한 열린우리당은 촛불집회와 총선을 엮었다. 촛불집회는 공공연한 열린우리당 지지 행사였다. 86세대 운동권 동지들이 한쪽에선 촛불집회를, 한쪽에선 선거운동을 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인 이인영·우상호·김태년 등이 촛불집회를 뒷배로 삼아 국회에 진출했다.

    총선 주기와 같은 4년을 주기로 촛불집회가 또 열렸다. 이번엔 ‘괴담’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됐다. 2008년 4월 말 MBC ‘PD수첩’이 광우병에 관한 충격적 방송을 내보내자, 5월 초 네티즌 중심으로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는 이름의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주관은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라는 곳이었다. 2007년 대선 직후 만들어진 대선 불복 캠페인 인터넷 카페였다. 저 단체 대표가 ‘응징 취재’라는 막장 언론을 표방하는 ‘서울의 소리’ 백은종 씨다. 촛불집회 기획팀으로 수배받아 유명해진 안진걸 씨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지킴이, 이재명 지킴이 같은 민주당 강성 지지자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다. 괴담 정치로 재미를 본 진보 일각에서는 몇 년 뒤 아예 괴담 전문 유사 언론까지 만들었다. 바로 2011년에 첫 방송을 시작한 ‘나는 꼼수다(나꼼수)’였다.

    이런 괴담 정치는 비극적이게도 2014년 세월호 촛불에서 정점을 찍었다. 세월호 침몰은 위기관리에 실패한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부실한 안전 규제가 원인이다. 애도와 함께 사고 책임, 후속 대책을 두고 사회적 숙고가 필요했다. 촛불집회는 시작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문재인은 세월호가 ‘제2의 광주’라며 당시 창궐하던 음모론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진상 규명은 과학적 원인이 아니라 정부가 고의로 선박을 침몰시켰다는 괴담의 증거를 찾는 데 집중됐다. 이런 의혹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 났다. 촛불은 사태 해결의 길에서 이탈했다. 다만 민주당으로 가는 꽃길 하나는 제대로 열었다. 대표적 예로 박주민은 ‘세월호 변호사’란 타이틀을 달고 국회에 입성했다. 세월호 촛불은 민주당 정치인들에 의해 정치적 자산으로 소비됐다.

    세월호 촛불은 2년 뒤 박근혜 탄핵 촛불로 이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폭로되자, 박근혜-최순실을 둘러싼 각종 괴담과 함께 세월호 7시간 음모론이 다시 소환됐다. 수백 개 시민단체가 곧바로 ‘퇴진행동’을 조직해 탄핵과 조기 대선을 요구했다. 2000년부터 이어진 촛불집회가 정점에 이르렀다. 당연히 촛불의 일등 공신들은 정부와 민주당으로 초청받았다. 이번엔 몇몇 대표자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공동정부가 꾸려졌다. 청와대 비서관급 20% 가까이가 참여연대와 민변 출신이었다. 촛불 청구서란 말도 나돌았다. 민주노총 요구가 거시경제적 타당성이 있는지 검증되지 않은 채로 정부 정책으로 시행됐다.

    정리해 보자. 낙선운동부터 탄핵 촛불까지 세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첫째, 이슈가 무엇이건 간에 최종 도착지는 보수 타격이었다. 중립을 표방하고, 건강권을 내세우며, 참사를 애도하고, 구조적 권력남용을 비판하더라도 결국 촛불은 반(反)보수 정치였다. 둘째, 사태의 구조적 원인을 전혀 해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낙선운동이 바꾼 선거제도는 미미하다. 촛불로 날개를 단 열린우리당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광우병은 처음부터 끝까지 괴담이었다. 참사에도 불구하고 안전 불감증은 여전하다. 국정농단을 야기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은 도리어 더 커졌다. 셋째, 민주당으로 가는 길을 놓는 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촛불집회 지도자들은 촛불이 꺼지자마자 민주당 정부의 고위 관료나 민주당 국회의원 자리로 이동했다.

    요컨대 촛불은 반(反)보수를 목표로, 실제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로, 진보의 권력투쟁 수단으로 이용됐다. 결국 촛불로 나아진 것은 한국 사회가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누가 촛불 덕에 금배지 달았나

    2017년 3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 [동아DB]

    2017년 3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 [동아DB]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은 한국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 제3지대들은 진보·보수 구도에서 보수 쪽에 중심을 두었다. 민주노동당이 차지한 제3지대는 철저하게 진보 쪽이었다. 보수 우위의 정치 구도에서 진보 내부에서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진보 단일화를 두고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첫 갈등은 노무현 탄핵소추 국면에서 시작됐다. 민주노동당 내부가 둘로 갈라졌다. 노회찬이 대표하던 민중민주파(PD)는 탄핵 사태와 거리를 두려고 안간힘을 썼다. 탄핵은 기성 정치 내부의 갈등일 뿐이기 때문에 새로운 진보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민족해방파(NL) 쪽의 판단은 반대였다. 탄핵은 반(反)보수 결집을 이룰 기회였다. 열린우리당의 386운동권 후보들은 범NL그룹의 동지였다. 심리적 거리는 노회찬·심상정보다 전대협 출신 이인영·우상호와 더 가까웠다. 2004년 총선에서는 PD그룹이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어 밀접한 야권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총선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2003년부터 민주노동당으로 밀고 들어온 NL그룹이 지도부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새 지도부는 보수세력에 맞서 열린우리당과 함께 노무현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NL그룹은 한국 현대사를 식민지 연장선에서 파악한다. 친일파가 독재자와 보수로 이어지며 한국 사회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 배후는 미국이다. 반면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자주적 정부를 세웠다. 따라서 통일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결집해 북한 정부와 함께 친미적 보수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친북 정책을 펴는 노무현 정부는 보수에 맞선 대결에서 우리 편에 있는 세력이었다. 참고로 현재는 진보당이 이런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송영길로부터 시작하는 민주당 내 86운동권 정치인들도 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 차원에서 의견이 다르진 않다.

    진보 진영의 본격적 선거 공조는 2009년 경기교육감 선거에서 이뤄졌다. 김상곤이 경선 끝에 범민주 단일후보로 선정돼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후에 민주당 혁신위원장을 맡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교육부총리가 됐다. 선거 공조의 맛을 본 시민단체들은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야권연대 브로커를 자처했다. 박원순·남인순(여성단체연합) 등의 시민단체 대표들은 ‘희망과 대안’이란 조직을 꾸렸고, 도종환(한국작가회의)·최민희(민주언론시민연합) 등은 ‘2010연대’를 만들었다. 친노 그룹 원외 인사들은 ‘시민주권’을, 김근태계 인사들은 ‘민주통합시민행동’을 조직했다. 이들이 다섯 개 야당을 상대로 단일화 테이블을 만들었다. 전국적 공조는 실패했지만 일부 지역에선 성과가 있었다. 배진교 현 정의당 원내대표가 저 당시 야권 단일후보로 인천 남동구청장에 당선된 게 사례다. 도종환·남인순·최민희 등 시민단체 소속으로 야권연대를 조율한 인사들은 2012년,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지방선거 이후 야권연대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백낙청 명예교수가 중재자를 자처해 모든 지역구에 단일후보를 만들어냈다. 이때 국회에 입성한 사람 중 한 명이 의사당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민주노동당 김선동이다. 야권연대 최고 수혜자는 의외로 문재인이었다. 주로 친노 그룹에 둘러싸여 있던 그가 ‘야권 대통합 추진’을 명분으로, 함세웅 신부부터 조국 교수까지, 진보 진영 인플루언서들을 주위로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신이 통합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 자연스레 대선 단일후보로 올라섰다.

    야권연대 흐름이 강해지자, 진보정당들은 빠르게 결집에 나섰다. 2011년 말 노회찬·심상정 중심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일부, 유시민·천호선 중심의 국민참여당이 합당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통진당은 백년대계를 꿈꾸는 정당은 아니었다. 민주당으로부터 좀 더 많은 지역구를 양보받기 위한 일종의 협상 거점이었다. 정당의 목적이 노골적으로 정치공학적이다 보니 탈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민주당과 협상이 끝나자마자 통진당 내에서 비례대표 순위를 두고 과잉 경쟁이 벌어졌다. 특히 이석기로 대표되는 NL그룹이 매우 거칠게 경쟁을 벌여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과 통진당이 합의한 정책이 바로 독일식 비례제와 공위공직자수사처(공수처)였다. 2019년 민주당이 정의당 도움을 받아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동시에 통과시킨 패스트트랙 파동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2013년 이후 야권연대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이 연달아 패배하고, 통진당에서는 이석기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새정치연합)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등장한 안철수는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와는 거리를 뒀다. 2016년 총선에서는 김종인이 민주당의 당권과 공천권을 틀어쥐었다. 그는 안철수와 마찬가지로 시민단체나 진보정당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권연대의 클라이맥스는 2017년 문재인 정부였다. 대통령 문재인은 촛불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촛불 공신들과 공동정부를 꾸렸다. 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주축이 돼 참여연대, 민변 등에서 ‘동지’들을 모았다. 정의당과의 전략적 연대는 없었는데, 시민단체 핵심부가 정부 내부로 들어온 상황에서 굳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정의당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PD그룹이 주도하는 정의당은 범NL그룹의 동지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석기 사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민중당(현 진보당)과는 거리를 뒀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2020년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당은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 필요하면 모두 민주당 안으로 들어오라는 식이었다.

    문재인 공동정부는 결국 철저하게 실패했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정책, 남북관계, 대외관계, 검찰·사법 개혁 등등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 국민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문재인의 칼이었던 윤석열을 문재인 정부 청산을 위한 칼로 사용했을 정도다. 반(反)보수촛불·야권연대는 한국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진보라는 이미지를 소모해 권력이란 결과물을 얻었을 뿐이다.

    그들만을 위한 야권연대

    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시민단체들은 내년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반(反)보수촛불·야권연대 전략을 꺼내들려 하는 것 같다. 후쿠시마 방류 이슈를 촉매로 삼아 2008~2017년을 5배속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타락이자, 국민의 불행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오스는 로마공화정의 흥망성쇠를 분석해 민주정(democracy)이 타락하면 폭민정(mobcracy)이 도래한다고 결론 내렸다. 민주정은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데, 만약 여론을 주도하는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제압하거나 사익을 공익으로 위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타락한 군중이 민주정을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이 폭민정이다. 나는 ‘반(反)보수촛불·야권연대’가 현대적 의미의 폭민정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고 판단한다. 지난 20년 역사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촛불도 야권연대도 실체가 있는 진보가 아니다. 세상을 낫게 만들지도 않는다. 세상을 속여 권력을 얻는 지대 추구만 벌어질 뿐이다. 내년 총선에서는 촛불이나 야권연대와는 거리를 두는 새로운 진보가 출현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브레이크를 걸어줄 때가 됐다.

    신동아 7월호 표지.

    신동아 7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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