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명성황후 귀신’이 들린 여자 이영숙

자경당에서 들려온 애절한 목소리, “내가 죽은 곳은 여기가 아니야…”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5-03-24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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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후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독립신문’ 여기자. 여성경제인협회를 창설한 탄탄한 여성 기업인. 여성의 사회 활동이 드물던 시절, 눈부신 리더십을 발휘하던 한 여성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명성황후의 화신을 목격하면서부터다.
    • 그는 돈벌이도 마다하고 명성황후의 복권과 재조명에 제2의 인생을 걸었다.
    ‘명성황후 귀신’이 들린 여자 이영숙
    인간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리 정해진 운명이 과연 있는가. 사람이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얼마인가. 삶은 윤회하는가. 역사 속 인물의 화신을 현대에 보는 일이 가능한가. 명성황후의 복권과 재조명에 삶을 건 이영숙(李英淑·78) 회장을 만나면서 이런 의문에 빠졌다.

    이영숙 회장은 한 시절 잘나가는 여성 기업인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업에서 손을 떼고, 벌어놓은 돈을 ‘국태민안’을 위해 쓸 길을 찾기 시작했다.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꽤 쏠쏠한 재산이 남아 있었다. 그걸 자신이 호의호식하는 대신 신앙과 국태민안을 위해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국가와 민족!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 말에 삐딱한 시선을 던지게 됐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워낙 자주 국가와 민족을 팔아온 데다 국가가 개인의 상위개념이 될 수 없다는 시민의식의 변화 탓이다. 그런데 이영숙 회장의 입에서 나온 ‘국태민안’이란 말은 아주 신선했다. 그 말의 최초의 의미, 명성황후 시대에 통용됐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 이기심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국태민안’에 나는 선입견을 걷고 귀를 기울였다.

    덕성학교 운현궁의 기억

    이영숙 회장은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여러 번 했다. 영성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논리적 설명은 불가능하더라도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젊은 시절 호기롭게 돈을 벌었던 이 회장은 자신의 후반 삶을 영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그건 결국 소외되고 아픈 자들을 위한 길이고 그의 신앙이 제시해준 길이기도 했다.



    1927년생이니 여든을 코앞에 둔 나이인데, 이 회장은 노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다. 격식 갖춰 차려입은 한복 맵시에선 여느 사람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기품이 흐른다. 볼에 남은 분홍 홍조, 반듯하고 꼿꼿한 자세와 걸음걸이에 나는 새삼 놀랐다. 과연 명성황후의 현현인가 싶을 만한 우아가 몸에 배어 있다.

    명성황후와의 인연은 모교인 덕성학교에서 시작된다. 젊어 사업에 매진하다 마흔이 넘자 그는 모교인 덕성여중·고 동창회장 일을 맡는다. 재단이사장인 송금선 선생과는 특별한 교분이 있었다. 당시 운현궁을 교사(校舍)로 쓰고 있었는데, 송금선 선생을 만나려고 운현궁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 회장은 희한한 경험을 한다.

    “대문에 발을 들여놓는데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지고 스산한 기운이 온몸에 휘몰아치는 겁니다. 위를 쳐다보니 하늘에서 먹장구름이 쏟아져 주변 건물을 갑자기 뒤덮어요. 청명한 날인데 갑자기 그런 게 보여 동행한 기사에게 ‘왜 이렇지?’ 물었더니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일본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날조되고 왜곡돼온 대원군 명성황후에 대한 통한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해달라는 요청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지요.”

    그는 사비를 들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경제인연합회를 만든 주인공이다. ‘한국부인회’란 단체도 앞장서 만들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드물던 시절, 특유의 리더십으로 초창기 여성 조직을 창립하고 이끌면서 기업경영을 해나가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몸져눕는다.

    온몸이 굳고 입을 뗄 수도 없었다. 심장이 멈추는 듯했지만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 수 없다 했다. 거동은 물론 가족조차 알아볼 수 없는 위급상황이었다. 보다못해 친구 하나가 장안에서 내로라는 점술가 하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날 점술가는 이 회장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당신은 사업가의 운명이 아니다”고 했다.

    “내게 당장 마니산으로 가서 국운 융성을 빌어야 한다고 했어요. 개인의 삶을 버리고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아야만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나는 그때까지 신앙도 없었어요.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 줄도 몰랐어요. 우선 살아야겠다 싶어 마니산으로 갔어요. 움직일 수도 없었던 몸이 마니산으로 올라가는 순간 어찌나 가벼운지.

    거기 올라가서 기도를 시작했죠. 내가 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어요. 내가 글쎄 ‘5000년 우리 역사에 외국의 침략을 받은 게 도대체 몇 번입니까. 또다시 위기가 와서는 안 됩니다. 경제발전을 시켜주세요. 국운을 융성하게 해주세요’ 하고 있는 겁니다. 얼음물을 깨서 목욕을 하고 바위에 앉았지만 추운 줄도 몰랐어요.”

    마니산에서 내려왔더니 저절로 발길이 끌리는 데가 있어 곧장 그리로 갔다. 자신도 모르는 새 당도한 곳이 경복궁의 자경당이었다. 자경당 왼쪽 작은 문 앞에 멈춰 섰는데 난데없이 자경당 주변이 당향으로 가득 메워지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는 경험이지만 좀더 들어보자.

    “자꾸 눈물이 쏟아져 겨우겨우 자경당 벽을 짚고 만세문까지 당도했어요. 내가 왜 거기 갔는지는 설명할 수 없어요. 누가 부르듯 절로 발길이 그리로 이끌려 갔으니까. 눈앞에 바람개비 같은 것이 홱 돌더니 깊은 계곡에서 관복을 입은 십여 세의 사내아기와 남색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열심히 뭔가를 빌고 있는 광경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긴 깃털 달린 빨간 모자를 쓴 외국인 하나가 마당에 부복(俯伏)하고 있는 모습도 보이구요.

    나는 처음에 그게 어떤 장면인지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웨베르 보고서를 구해 번역해보니 거기 엎드린 사람이 바로 명성황후님 시해사건이 나던 그날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던 러시아 군관 사바틴이었나 봐요. 그런 광경이 지나간 후 ‘나를 따라오너라’ 하는 애절한 음성이 들려요. 음성을 따라 뒤뜰을 지나 연못을 거쳐 미술관 건물 바로 옆에 당도했어요.

    ‘너는 알겠지, 너만은 알아,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내가 죽은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나는 저 뒤쪽 언덕 위에서 죽었느니라’ 하는 음성이 계속 들려요. 이승만 대통령이 ‘명성황후 조난지지’라고 친필 휘호를 내려 조성해놓은 자리였는데 거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잘 알겠습니다. 제가 황후님의 제사를 모시겠습니다.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하고 자꾸 기도를 했어요. 하늘에서는 무슨 영사막 같은 게 펼쳐지면서 일본인의 이름이 무수히 나열돼서 아래로 내려와요. 그때 내가 정신을 차렸더라면 그 이름들을 받아적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해 내 나이가 명성황후가 시해될 당시와 똑같은 마흔넷이었어요.”

    이후로도 이 회장의 눈앞에 이런 환상이 자주 펼쳐졌다. 그리고 그 환상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예시는 전혀 없었다. 민족의 쌓인 한을 풀고 정기를 바로잡고 국가의 운세를 틔워주는 방법이 제시되곤 했다.

    그날 이후 이 회장의 인생은 달라졌다. 마음의 중심에 늘 명성황후가 있었고 국태민안을 염려하는 기도가 절로 흘러나왔다.

    명성황후를 모시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한국부인회 이사로 함께 일하던 가톨릭 신자 장요안나씨를 찾아갔다 그분의 아드님이 해방동 성당의 주임신부(이종한 신부)로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조선시대에 돌아가신 분을 제사지낼 수 있는지를 물었다.

    거기서 장요안나씨를 대모로 세례를 받고 명성황후를 위해 지극히 공들인 연미사를 올렸다. 이후 이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 안에서 자꾸 기도가 솟아올랐다. 개인을 위한 기도는 아니었다.

    행동거지도 달라졌다. 여성으로선 드물게 건설업에 종사했으니 반말이 입에 배고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발길질도 마다않는 ‘노가다 기질’이 다분했는데 몸가짐이 아연 조신하고 우아해졌다. 앉아라, 서라, 걸어라고 행동을 훈련시키는 말도 자꾸 들렸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맹세를 자꾸 하는 거예요. 다 버리고 성모님께 가겠습니다, 세상 인연은 다 끊고 성모님께 갑니다….”

    두렵지는 않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이즈음 이 회장은 가족과 일가 친척을 다 불러놓고 비장한 선언을 한다.

    “나는 이제 세상 인연을 다 끊을 겁니다. 어머니도 저를 딸로 여기지 마시고 당신도 나를 아내로 생각하지 마세요.”

    가족들은 그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신병이라고,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옆방에서 의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세상 기준이 아니라 성모님과 명성황후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결심한 것뿐입니다.”

    ‘웨베르 보고서’ 발굴

    그는 지금도 자신을 가톨릭으로 이끈 것은 명성황후라고 굳게 믿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이자 황후의 시어머니인 민마리아 부대부인이 바로 가톨릭 신자였다.

    “민마리아님은 자신의 6촌동생이 하도 탐이 나서 며느님으로 삼으셨거든요. 가톨릭 교회사 연구를 지원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겉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했지만 실제로는 왕실 안에서 미사가 이뤄지곤 했지요. 명성황후님도 가톨릭에 깊은 관심이 있으셨던 겁니다.”

    당장 ‘명성황후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매불망 명성황후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뭔가를 궁리하고 모색한다. 방법이 발견되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일본인들은 의도적으로 명성황후를 경솔하고 오만한 민비라고 폄하하고 훼손해왔다. 추모사업회장으로 그 왜곡된 이미지를 바꾸는데 그가 기울인 노력은 일일이 열거하기 버거울 정도다.

    ‘명성황후 귀신’이 들린 여자 이영숙

    한복을 즐겨 입는 이 회장은 명성황후의 현현인가 싶을 만큼 우아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우선 일인들이 은폐 말살해버린 명성황후 관련 자료를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를 뒤지면서 수집하기 시작했다. 시해 당시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 잠자고 있던 외교문서 ‘웨베르 보고서’를 찾아내 번역작업을 의뢰해 출판한다. 그 안에는 사바틴이라는 한 러시아 기술자가 상세히 써놓은 시해당일의 목격기도 있다.

    100년 만에 드러난 끔찍하고 생생한 증언들…. 웨베르는 보고서 말미에서 ‘저는 이번 사건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범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화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떼지어 왕의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한 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런 추악한 살인과 만행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경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라고 분개했다.

    “그뿐이 아니에요. 불태운 재까지 향원정의 물고기밥으로 뿌렸다니깐요.”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명성황후가 궐내에서 굿이나 일삼는 생각 없는 아낙이 아니라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만이 당시 상황을 타개할 길이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주창한 탁월한 정치가였음도 밝혀졌다. 일인들은 명성황후의 모습을 일부러 궁녀의 사진으로 바꿔치기해놓았다.

    “그날 내가 본 얼굴이 있잖아요. 그 기억과 당시 외교관들의 기록을 참고해서 진영(眞影)을 만들었어요.”

    진영은 문화관광부의 심의를 거쳐 궁중유물 전시관에 기증했다. 순국 100년 기념으로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를 복원 정리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이 모아뒀던 옛 가구들과 옷들을 배치했다. 아들 순종황제의 어진(御眞)도 제작해 봉안했다.

    “황후님 모시고 성모님 앞으로”

    1999년엔 주한 일본대사관의 일등 서기관을 비롯해 40명의 직원과 가족을 이끌고 여주 황후 생가에 가 참배하고 분향했다. 황후의 진영을 들고 러시아에도 갔다. 모스크바 천주교 성당에서 스탈린에 의해 살해된 러시아 황족의 80주기 장례미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 순종, 명성황후 세 분의 어진과 진영을 모시고 가 그들과 함께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왕후에게나 어울릴 법한 한복 몇 벌을 지어 그곳 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그 인연으로 한소민간교류협회가 만들어져 그 단체의 회장도 맡게 됐다.

    중국에도 가고 일본에도 갔다. 중국에서는 50년 발굴할 대리석 광산 발굴권을 따내고,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추모 미사를 올렸다. 일본에선 ‘민비’의 저자인 작가 후사코를 만나 명성황후의 이름자가 ‘민자영’이 아니라 ‘민정호’로 표기됐음을 밝혀 사과를 받아낸다. 서울대 최문형 교수에게 의뢰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란 논문집도 출간했다.

    세상은 차츰 명성황후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뮤지컬도 제작됐다.

    ‘명성황후는 지나치리만큼 총명하고 영리한 여걸이다. 황후가 된 후에 항상 춘추좌전을 공부하여 정치와 역사를 연구했다. 갑오경장을 전후해 그동안 폐쇄됐던 문호가 개방되자 중국·러시아·일본은 우리나라를 삼키려 각축전을 벌였고, 영특한 황후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이이제이 정책을 펴서 쉽게 이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앙앙불락(怏怏不樂)한 일본은 마침내 우리 국모를 간악하게 사살한다. 그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고 5년 후 경술합방을 선포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지 않았던들 나라의 형세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만난 지 5년 만에 세간에는 이런 평가가 일반화됐다. 이 모든 일을 이 회장은 개인 자격으로 혼자서 감당했다. 발로 뛰는 것은 물론 자신의 주머니를 풀어 경비를 댔다. 자금력이 든든치 않으면, 의지가 대단치 않으면, 용의주도한 기획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로 행복했다. 번번이 뿌듯한 감동을 느꼈다.

    “왜 하필 명성황후가 이 회장을 택해서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본다.

    “운명이겠지.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우리 선조가 세종의 첫째아드님이신 화애군이거든. 전주 이씨지. 내가 황후님을 모시고 성모님 앞으로 인도해줄 기질이 있다고 여기신 거겠지.”

    ‘명성황후 귀신’이 들린 여자 이영숙

    두 아들 영호, 준호와 함께한 30대의 이영숙 회장(좌).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이 회장(우).

    그의 집안은 토박이 서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회장이 출생할 당시엔 부모가 강원도 화천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화천면 서기로 취직이 되어 잠깐 내려가 있을 때 출생했다(이 회장의 장학재단이 강원도에 있는 것은 그런 연유다). 화천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부모는 어린 영숙을 조부모께 잠깐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버스를 타고 떠난 부모의 행방을 찾느라 일곱 살 난 유치원생은 매일 역으로 갔다. 귀찮도록 버스 운전사에게 아버지, 어머니 간 곳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동대문에서 내리는 것만 봤으니 알 턱이 없다는 운전사 아저씨에게 한사코 매달렸다. ‘날 동대문까지만 태워다 달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협상을 했다. 꼬마의 집념에 운전사 아저씨는 마침내 손을 들어 그를 정말로 동대문까지 태워줬다.

    동대문에서 내렸다. 처음 와본 서울이었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즐비했다. 골목을 돌아다니며 엄마를 불렀다. 사람을 만나면 “우리 엄마 못 보셨어요?” 당차게 물었다. 혼자 서울로 올라와 울지도 않고 골목을 누비며 엄마를 찾는 아이, 그 위에 지금 이영숙 회장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는 아이였다.

    마침내 어느 골목에서 대문이 후닥닥 열렸다. 엄마가 거짓말처럼 툭 튀어나왔다. 자리잡는 대로 데리러 가려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올라왔냐며 엄마는 마구 야단을 치며 우셨다.

    이듬해 이 회장은 동대문 소학교에 입학한다. 공부보다 운동을 잘했다. 덕성여자실업학교에 진학해서도 포환 던지기, 창 던지기 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덕성학교는 조선왕조의 혼인잔치를 담당하던 가례청과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왕비 간택 의식이 치러졌던 감고당을 교사로 쓰고 있었다. 왕조는 망했지만 곳곳에 향기가 남아 있다.

    “김 코치라고, 내게는 코치 선생이 달려 있었어. 조선 신궁대회에 나가 3등을 먹기도 했지.”

    송금선 교장의 부군인 박준섭 박사가 특히 이영숙 학생을 아꼈다. 운동장 한 켠으로 불러 자장면을 사주곤 했다. 그는 훗날 임종 직전에 이영숙을 불러놓고 “네가 회갑이 될 때까지만 어머니(송금선 교장)를 잘 지켜드려라”고 유언했다. 자식처럼 믿고 아낀다는 뜻이라 슬프고도 기뻤다.

    송금선 교장은 놀랍게도 그가 딱 회갑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자신의 수의로 지어놨던 옷을 교장께 입혀드리며 어머니를 보내듯 울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힘은 이 회장 주변에선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능력인가 보다.

    여학교 졸업 후 그는 총독부 기관지를 내던 ‘경성일보’에 취직한다. 기자 모집 광고에는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는 용감하게 신문사를 찾아갔다. “왜 여학교 졸업생이면 안 되냐, 일만 잘하면 될 것 아니냐” 큰소리를 치고 돌아왔더니 얼마 후 합격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됐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경성일보 강당에서 전직원과 함께 들었다.

    “라디오를 듣는데 소리가 작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았어. 듣다 보니 일본인들은 슬금슬금 다 달아나버려. 경성일보 위치가 지금 서울신문사 자리인데, 내다보니 거리에 태극기가 내다걸린 게 보여요. 나는 그날 태극기를 난생 처음 봤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지. 아니 어쩌면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조차 그날 처음 느꼈을지도 몰라.”

    그런 캄캄한 시대의 경험이 해방된 조국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경성일보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자들은 해방 후 함께 독립신문사로 옮겨간다. 지금의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최초의 한글신문이라는 독립신문. 이영숙은 그곳 사회부에 발령을 받는다. 경성일보 다닐 때는 모윤숙, 노천명 같은 이들이 바로 옆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최은희라는 조선일보 여기자의 이름도 들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한창 날리는 기자들이었고 나는 여학교를 갓 졸업한 병아리였어. 병아리도 못 되는 달걀이었지. 신문사에서 스타킹도 배급해주고 그랬어.”

    열아홉에 가장이 되다

    그 무렵 그는 졸지에 가장이 된다. 동생들은 아직 어린데 목재를 사러 평양에 간 아버지가 그곳에서 객사했다는 기별이 왔다.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기차를 타고 난생 처음 평양엘 갔다. 대동강물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열아홉 처녀가 홀로 수소문해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화장을 했다.

    “그때는 화장을 하려면 화장장에 땔감을 사다줘야 했어요. 장작을 사가지고 아버지를 화장해 재 봉지를 안고 서울로 돌아왔지. 한강에다 아버지를 뿌려드리면서 ‘동생들과 어머니는 내가 돌볼 테니 안심하시라’고 다짐했어요. 그때가 막내 동생이 딱 두 달 됐을 때예요.” 경성일보에서는 나이가 워낙 어려 심부름만 했으나 독립신문에서는 본격적인 기자 노릇을 한다.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당시 상공부 장관이던 임영신 박사를 인터뷰하러 갔다. 아직 어린 기자였다.

    ‘명성황후 귀신’이 들린 여자 이영숙

    승마를 유달리 즐겼던 이 회장은 경주마를 출주하는 화성사라는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갔더니 임영신 박사가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더 많이 하시는 거야. 어린 애가 오니까 귀여웠나봐. ‘너는 꿈이 뭐냐? 하고 싶은 게 뭐냐?’ 물으셔. ‘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했지. 그랬더니 지금 당장 전화 걸어줄 테니 학교엘 가라고 하는 거예요. 임 박사가 중앙여자대학교(지금의 중앙대학교)를 설립하셨을 때였거든.”

    1935년 3월 천도교 발행 잡지 ‘개벽’은 ‘최초 여기자’ 최은희를 “그의 재필(才筆)과 활완(活腕), 건각(健脚)은 여간한 남자기자로는 앙망(仰望)도 못할 것…’이라고 격찬한다. 최은희 못지않은 배포가 있었지만 이영숙은 기자생활을 접고 임영신 장관의 소개로 일단 대학으로 적을 옮긴다. 혼란의 시대였다. 공부만 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학생 때는 반탁운동에 앞장섰어요. 그 무렵 미소공동위원회가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는데 반탁데모 대열의 여학생 대표로 내가 뽑혔거든요. 남학생 대표는 이철승씨였어요. 북한에서 집을 버리고 내려오는 이재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위한 모금운동에도 앞장서서 뛰어다녔고….”

    사람의 일생은 돌아보면 온통 우연의 조합인 것 같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보다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훨씬 많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다. 이영숙 회장은 더욱 더 드라마틱한 삶의 전환을 겪는다. 중앙대를 졸업하지 못하고, 그는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을 찾는다. 경성일보는 한달 60원 정도의 월급을 주었지만 독립신문에서는 따로 월급받던 기억이 없다.

    마침 한국 최초의 항공사인 KNA가 여자 승무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조건이 좋길래 거기 응시했다. 키가 헌칠하고 인물이 훤했고 영어도 조금은 할 줄 아는 그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첫 비행으로 부산에 갔다. 한동안 교육을 받고 6개월 뒤에야 정식 비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걸 기다리기엔 마음이 급했다. 당장 월급을 받아야 했다. 비행기가 도착한 곳이 수영비행장이었는데 그곳 미군부대에 전화를 빌리러 들어갔다. 서울 본사에 전화해서 그만둔다는 뜻을 전할 작정이었다.

    “전화를 빌려 쓰고 나오는데 어떤 미군이 왜 여기 왔느냐고 물어요. 사정을 설명했지. 당장 돈 버는 것이 급하다고. 그랬더니 또 잘할 줄 아는 게 뭐냐고 물어. 부기(簿記)를 좀 한다고 하니 거기서 미군물자를 불하(拂下)하는 창고관리를 맡으라는 거예요. 군복 군화 담요 밀가루 통조림 비누… 뭐 없는 게 없었지. 그런 군수품의 입·출고 사무를 보는 건데 국제시장 상인들이 그걸 사러 몰려와요. 가만 보니 까짓 거 나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담당자에게 말했어요. 나도 장사를 하고 싶다, 그러나 돈이 없다, 일단 외상으로 물건을 주면 팔아서 원금을 돌려주겠다, 그렇게 협상을 했어요.”

    미군부대가 바꿔놓은 인생

    20대 중반의 어린 아가씨가 도전적으로 대든 그 일은 이문이 꽤 남는 장사였다. 며칠 만에 부산 광복동에서 2층 양옥집을 한 채 살 만큼의 돈을 벌었다. 항공사 직원으로 시험 비행차 내려간 부산에서 그는 2층 양옥집을 당장 한 채 사버렸다. 그는 타고난 사업수완이 있었던 모양이다. 비행장에 가득 널려 있는 폐기된 알루미늄 연료통이 보였다.

    “내가 그걸 그릇 공장에 팔아먹었어. 당시는 식기조차 변변한 게 없었어요. 그걸로 알루미늄 그릇을 만들었거든요. 버스 자동차 몸체도 다 그런 걸 두드려서 만들었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담요를 물들여 옷 해 입고 군화를 뜯어 구두 만들어 신고. 우리 민족이 다 그러면서 살던 시절이었어요.”

    그는 거기서 한밑천을 톡톡히 잡는다. 그리고 전화(戰火)가 훑고 간 서울로 돌아와 유일실업주식회사를 차린다. 미군부대에 물자를 대는 회사였다. 물과 석유와 휴지 등 소모품을 운송·보급하는 군납 업무를 맡았다. 우연히 전화를 하러 들어간 미군부대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이다.

    그는 몇 년 새 놀랄 만큼 많은 돈을 만지는, 지나가던 사람도 뒤돌아보는, 그 당시로서는 희귀인물인 여성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적극적이고 능란했지만 부드럽고 수줍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가족뿐 아니라 어느새 일가 친척 수십 명이 그의 식객이 돼 있었다.

    미 8군 사령관이 몰던 지프차 ‘프리머스’를 정식으로 불하받아 타고 다녔다. 공항에만 갔다 와도 큰 벼슬 한 듯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에 수시로 미국 본토를 들락거렸다. 군부대 안에 들어가면 젊은 여사장을 보려고 미군병사들이 창가에 모여들곤 했다. 돈이 생기면 누군가의 권유대로 땅에다 묻어두곤 했다. 돈은 트럭으로 넘치게 실을 만큼 벌어본 적도 있다. 술 먹을 일이 생기면 외사촌 동생들이 사장 대신 나가줬다. 나중에는 군납 업무말고도 미군부대 안의 건설사업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처녀 사장의 ‘精神一到何事不成’

    “전쟁 후 미군부대 건설이 막 시작될 때인데, 가만 보니 나도 못할 게 없겠더라고요. 기술자를 구하고 인부만 얻으면 충분히 승산 있다 싶어 뛰어들었어요.”

    미 8군 안의 숱한 막사와 장교 숙소를 지었다. 오산 공군기지 안의 활주로와 격납고 공사도 맡았다. 처녀 사장이라 더 유리했을까. 당시 사진에 담긴 유순한 모습은 맹렬하게 현장을 뛰는 여사장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집념이 강하고 능란했다.

    “냉정하고 사납게 굴지 않으면 그런 일 못해요! 내가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쌩 돈다고 했지요!”

    그래도 속은 부드럽고 수줍었다. 그는 덕성학교 창립자 차미리사 선생이 가르쳐준 불굴의 신념,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을 가슴 안에 언제나 꽉 움켜안고 살았다. 허물어질 위기가 오면 그 말에 의지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덕성학교에서 ‘여자라고 남자의 사업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여자 사업을 돕는 시대가 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컸어요. 실제로 송금선 선생님은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덕성재단을 빚이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튼튼한 학교재단으로 키웠거든요. 남편 박준섭 박사는 그걸 적극적으로 도왔고….

    당시 휴전선 일대에 철조망을 치고 레이더를 설치하는 작업을 우리 회사가 맡았어요. 내 뒤에 누군가 거물이 있다고 사람들이 수군댔지만 그런 거 없었어요. 정부 요인과 끈이 닿아 있지도 않았건만 이상하게 아무도 날 방해하거나 건드리지 않았어요. 미군 내 공개 경쟁 입찰은 짐작과는 달리 매우 합리적이고 공정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배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실은 한창 돈 벌던 그 시절을 그는 거의 잊었다.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보면 나중에 다른 큰 일을 시킬 목적으로 새파란 어린 처녀에게 그토록 많은 일들을 떠맡긴 것 같다고 이해하는 중이다.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눈앞에 할 일이 쌓여 있으니 다른 곳에 눈 돌릴 시간도 없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승마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을 타고 한바탕 달렸다. 말에 대한 애정으로 그는 나중 경주마를 출주하는 화성사란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서른이 훌쩍 넘어버렸다. 당시 서른이면 치명적인 노처녀였다. 결혼을 권하는 주변 사람들을 늘 실망시키다가 어느 날 우연히 한 청년을 만난다. 그 역시 미군부대에서 건설업을 하던 이로 눈썹이 짙고 잘생긴, 한 살 위의 경상도 상주 출신 사업가였다.

    그에게 정신이 훅 나가버렸다. 그가 탄 자동차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뒤늦게 찾아온 열정이었다. 결혼식도 생략한 채 둘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아이도 생겼다. 연년생으로 영호, 준호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송금선 교장이 결혼식은 꼭 해야 한다며 정릉 어느 음식점을 빌려 꽤 성대한 식을 치러주셨다. 두 아이를 낳을 무렵 그들 부부가 살던 회현동 집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 시공을 맡았다. 자재가 멋지고 정원이 아름다워 외국인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견학을 올 정도였다. 나중에 그는 이 아름다운 집을 한국부인회 박금순 회장에게 부인회 회관으로 쓰라고 조건 없이 기증했다.

    이 회장은 평생 황후가 부럽잖은 최고의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회현동 집을 한국부인회에 기증한 후 이사한 한남동 집은 건평이 450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집이 하도 커서 부엌에서 안방으로 들고 가는 동안 커피가 다 식을 정도였다. 거실 가운데 커다란 분수대를 두고 기도실, 침실, 드레스실 해서 혼자 사용하는 면적이 거의 150평은 되는 집에 아이 돌보는 사람 따로, 밥하는 사람 따로 두고 살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거침없고 유능해도 결혼은 여자에게 어쩔 수 없는 굴레였나 보다.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한다는 죄의식이 있었다.

    “결혼하면 남편 밥도 지어주고 기분도 맞춰주고 해야 하는데 내가 어디 그런 걸 할 줄 알아야지. 만날 밖으로만 돌아다니고 밥 한 번 안 해봤는 걸. 맞춰주기는커녕 나한테 맞추라고만 했으니 우리 영감도 나 때문에 무척 힘들었을 거야…. 부부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한 이후 30년 동안 손 한 번 안 잡아봤다니깐.”

    부부 금실에 대해 묻기 전에 얼른 자신의 ‘죄’를 자백해버린다.

    전두환 정권의 보복

    결혼 후 이 회장은 미군부대에 입찰이 있으면 부부가 나란히 응찰하는 게 멋쩍어 건설 파트는 남편에게 넘겨버렸다. 대신 미군 가족에게 집을 빌려주는 동남부동산이란 용역회사를 차렸다. 한남동 일대 5000평의 땅에 미군이 내준 설계도대로 아파트를 짓고 미군 가족에게 임대하는 사업이었다.

    그가 기초를 닦아 남편 정천석씨에게 넘긴 고려개발은 1970년대 해외사업 수주액이 가장 많은 건설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네팔,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숱한 비행장을 만들고 다리를 놓았다. 네팔 국왕의 대관식에 초대받기도 했다. 이방자 여사가 준 옷을 입고 거기 참석한 기분은 각별했다.

    “그래도 돈 버는 사람은 집안에 한 사람밖에 없나 봐요. 남편은 일로 늘 바쁜데 돈을 벌어오지는 않더라고….”

    그 무렵 전두환 장군이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 버마의 아웅산을 방문할 계획이 잡혔다. 당시 이 회장은 여성경제인협회 회장이었다.

    “청와대에서 아웅산에 같이 가자는 연락이 왔어요. 전화를 받는데 딱 가기가 싫더라고요. ‘난 안 가요’ 했지. 한 번 더 ‘갑시다’ 하데요. ‘싫어요’ 했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하면서 전화를 끊데요.”

    이후 고려개발은 국제그룹과 함께 공중분해된다. 한남동의 저택도 하루 아침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

    “괘씸죄군요?”

    “난 몰라요. 그게 괘씸죄인지 뭔지. 그렇지만 성모님이 날 지켜주신 거 아닙니까. 그때 아웅산 갔으면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겠어요?”

    다행히 젊어서 한창 돈을 잘 벌 때 사서 내버려둔 땅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잘 쓰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1960년대에 제주도에 사둔 땅이 좀 있었어요. 지도를 펴놓고 그걸 뜻있게 쓰고 싶다고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지도 위에 자꾸 4와 3이란 숫자가 나타나요. 내가 그게 뭔지 알아야 말이지. 알아봤더니 억울한 희생자가 그렇게 많이 생긴 사건이래요. 순교복자수녀회 총원장 수녀님께 부탁해서 교구장님께 기증했어요. ‘4·3사건 희생자를 위해 써주세요. 성당과 수도원과 교육관을 지어주세요’ 부탁했어요. 그게 다 성모님 심부름이지요. 그런 걸 하라고 내게 땅을 좀 남겨주셨나 봐요.”

    1980년 당시 세종문화회관의 한 첼로 연주자의 내한공연에 갔을 때 그는 또 신기한 경험을 했다. 무대가 갑자기 커다란 화면으로 바뀌면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짙은 푸른색 옷을 입은 사내아이가 엄마인 듯한 귀부인과 앉아 있는 저택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평화롭고 고요했다.

    “그게 뭔가 하면 아마 그 서양 연주자가 연주하면서 머릿속에 상상하는 장면이었을 거예요.”

    강렬한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음악이 세계 공통어라는 것도 알았다. 하느님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도 음악이라고 느꼈다. 가톨릭대학에 음악대학을 만들고 싶었다.

    “평소 명동성당의 백남용 신부님께 ‘우리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고 늘 부탁하지요. 그분께 가톨릭 음악대학 설립을 의논했어요. 마침 그분이 음악 전공이시거든요. 돈이 한푼도 없다가도 그런 일을 시작하면 난데없이 땅이 하나 턱 팔려요. 덕분에 그 찌꺼기를 나도 좀 얻어 쓰는 거지요. 머잖아 세계적인 수준의 가톨릭 음악대학이 만들어질 겁니다. 그게 내 생전에 꿈꾸는 일입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병원을 세우다

    요즘 이 회장은 새로운 일거리를 만났다. 서아프리카의 아이보리코스트란 작은 나라의 딱한 사정을 들은 것이다. 거기 가톨릭 병원과 가톨릭 의과대학을 짓는 일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일을 궁리하면 여든을 앞둔 나이가 무색해진다. 그 나라 대사 부부를 만나고 추기경을 초청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명성황후 드라마를 불역해서 아이보리코스트에 배포하는 작업도 준비중이다.

    “내전 중인 나라인데, 인구의 3분의 1이 에이즈에 걸려 있답니다. 가톨릭 의사가 한 사람도 없대요. 병원만 있으면 하루에 죽어가는 생명 500명을 살릴 수 있답니다. 지금 아이보리코스트의 대통령 부인이 우리 명성황후님처럼 암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요. 도와야지요. 고난에 처한 나라를 도와야 우리 국운이 융성해집니다. 우리도 힘든데 남을 도울 여력이 있냐고 하지만 그건 근시안적인 생각이에요. 남을 도와야 내 나라의 악운을 물리칠 수 있어요. 이건 성모님의 일인 동시에 명성황후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정치인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다. 수익을 올리는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되레 국가에 재산의 상당부분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국운을 염려하고 민족정기를 걱정한다. 개인 재산을 풀어 국가적 사업을 도모한다. 주기적으로 국태민안을 비는 기도를 올린다. 비가 오지 않으면 달려가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이다(그의 기우제는 소문난 기우제다. 간절하고 맹렬한 기도는 언제나 비를 몰고 왔다). 역사 속의 억울한 영령을 위해 미사를 올리는 사람이다. 한복을 사랑하고 즐겨 입는다. 타고난 맵시와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남의 나라에 가서도 환호를 받는다.



    명성황후 귀신이 씌었다고 그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그건 너무 옹졸하다. 모든 부자들이 이영숙 회장처럼 돈을 풀어놓을 줄 안다면? 명성황후 환영을 만난다면? 성모의 심부름꾼을 자처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세상은 얼마나 따스한 곳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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