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교사 → 사업가 → 면세점 대표 변신
- 대기업은 구매력 대포, 中企는 소총부대
- “판매직 1년 뒤 정규직 전환, 수익은 직원에 재투자”
- “껌이라도 팔아주고픈 국민 면세점 만들 것”
박해윤 기자
대기업이 주도하는 면세점 영역에 단기필마로 뛰어들어 인천국제공항 서편 탑승동을 ‘점령’한 중소기업 면세점이 있다. 시티플러스가 운영하는 시티면세점이다. 인천공항공사는 지난 3월 일반 기업과 중소·중견 기업으로 나눠 인천공항면세점 사업자 입찰을 했는데, 시티플러스는 제3기 면세점 사업자로 선정돼 10월 31일 문을 열었다.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그것도 다들 ‘손해 보며 판다’는 인천공항면세점 사업에 뛰어든 중소기업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안혜진(52) 시티플러스 공동대표는 “거대한 전차에 올라탄 골리앗들 사이를 자갈돌을 쥐고 가로지르는 다윗의 심정”이라고 했다. 수학교사 출신답게 그의 설명은 논리적이었지만, 다윗의 답답한 마음을 호소할 때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
대기업 할인 경쟁에 한숨
▼ 인천공항면세점 사업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는데.
“시티면세점은 인천국제공항 서편 DF10 구역(924㎡)에 자리 잡았다. 대기업(롯데·신라·신세계)이 8개 구역, 중소기업(시티플러스·SM·엔타스·삼익악기)이 4개 구역 운영자로 선정됐다. 시티면세점과 SM면세점은 대기업 면세점처럼 향수·화장품·주류·담배 등 전 품목을, 나머지 두 곳은 주류·담배 등 한정된 품목을 취급한다. SM이 하나투어 자회사인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 면세점과 전 품목을 놓고 경쟁하는 중소기업은 시티면세점이 유일한 셈이다.”
▼ 오랜 노하우와 자금력을 앞세운 대기업과 전 품목에서 경쟁하는 게 녹록지 않을 듯하다.
“솔직히 힘들다. 면세점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유명 브랜드는 중소기업 면세점 입점을 꺼린다. 대기업 면세점은 바잉 파워(buying power, 구매력)가 커 마진율이 50~65%에 달한다. 마켓 선점 비율을 중요시하는 대기업들은 수익구조가 나빠도 그것을 올바르게 개선하지 않고 멤버십 가입 회원에게 10% 할인해주고, 여행사나 관계 회사가 남발한 할인쿠폰을 들고 오는 고객들에게 5~10% 추가 할인을 해줘도 살아남는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마이너스다. 그렇다고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동일한 사업장에서 비슷한 양상이라도 대기업 프로모션 행사를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달리는 기분이다.”
▼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거시적으로 면세점 유통구조를 바라볼 시점인 것 같다. 과도한 프로모션 비용과 높은 임차료는 결국 입점업체와 소비자의 몫이다. 유통시장에서 상품가격의 왜곡을 불러오고, 유통 질서를 교란한다. 이 상황에서 내성(耐性)이 약한 중소기업은 분명한 한계를 보이게 될 거다. 우리는 출혈 경쟁으로 싸우지 않을 것이고, 가격경쟁과 상품 구성에서 차별화 요소를 강화하고, 시티면세점만의 색을 가지려고 노력할 거다. 생각해보라. 백화점의 빈번한 세일, 프로모션 행사에 더 이상 고객은 반응하지 않는다. 1년 중 5개월을 세일하고, 1년 내내 하는 사은 행사는 과잉경쟁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악순환 및 과잉 경쟁을 막기 위한 제도적 가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소비자에게 가장 좋은 프로모션은 정직한 가격이고, 바람직한 면세 유통구조다.”
지난 9월 인천공항공사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인천공항이 여객터미널에 입점한 상업시설로부터 받은 5년(2010~14)간 임대료는 3조6071억 원이다. 그러나 3기 면세점 사업자들이 올해부터 5년간 낼 임대료는 6조4600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공기업인 인천공항공사는 “국민 호주머니 털어 부동산 재벌이 됐다”는 비난을 샀다.
강릉 유과, 춘천 옥비누…
▼ 출국심사대를 지나면 공항 중앙의 대기업 면세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편 탑승동이라는 위치도 대기업 면세점보다 불리해 보인다.
“시티면세점이 있는 서편 엔틀러(30번 ~ 41번 게이트)에는 공항 전체 이용객의 약 10%가 오갈 뿐이다. 대개 고가 제품은 출국장 중앙의 대기업 면세점이 운영하는 부티크 매장에서 사고, 라면이나 팩 소주 같은 소소한 물품을 게이트 인근 주변 면세점에서 구매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불리한 건 사실이다. 화장품은 이미 대기업 면세점에서 구매해서 들어오니 수요가 없다. 그나마 힘들게 노력해서 로레알(랑콤,비오템) 엘카(에스티로더, 크리니크, 랩시리즈) 등의 유명 화장품 제품을 입점 시켰다. 국내 대기업 화장품 브랜드는 해외 톱 브랜드 제품이 입점하지 않으면 자사 브랜드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에 화장품을 넣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겐 대기업 면세점과 차별화한 전략이 절실히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안 대표는 시티면세점 운영 전략이 담긴 문건을 건넸다. ‘대기업과 차별화된 포지셔닝 구축-중소기업 상생안’이라고 쓰여 있다.
▼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전략? 공항면세점은 보통 명품으로 손님을 끄는데….
“전체 5개 매장 중 향수·화장품, 주류·담배 매장 외에 인천공항 내 타 면세점에 입점하지 않은 명품 브랜드인 베르사체와 신흥 명품 브랜드로 부상하는 레베카 밍코프, 모스키노 등 수입 브랜드 중심의 패션 부티크 매장을 마련했고, 국내 중소기업 제품 중심의 ‘아임쇼핑’ 매장에는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갖춘 국내 중소기업들을 발굴해 신상품을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명인·명품관과 토산품 중심의 지자체 홍보관으로 대기업 면세점과 차별화할 계획이다. 유명 브랜드 제품은 그대로 판매하되 가령 강릉 유과, 서산 한과, 춘천 옥비누 같은, 외국인도 관심을 보일 만한 우수 토산품을 찾아내려고 MD(상품기획)팀을 강화했다. 최근 전라북도 특산품 홍보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정관장’에 밀린 홍삼·흑삼 제조 기업들의 입점 문의도 잇따르고, 중소기업 유통센터가 운영하는 서울 목동 행복한백화점에는 성능 좋은 국내 중소기업 히트제품도 많다. 대기업과 외국 톱 브랜드에 끌려가는 면세점이 아니라 이런 ‘소총부대’들과 함께 ‘펀(fun)’하고 ‘유니크(unique)’한 면세점을 만들고, 고객이 찾아주는 면세점을 만드는 게 목표다.”
▼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紅軍)은 물고기요, 인민은 물’이라는 비유가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는 대장정(大長征)을 시작했고, 국민의 응원을 받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다. 고객들이 껌 한 통이라도 팔아주고 싶어 하는, 국민이 원하는 면세점을 만들겠다.”
인천 운서동 시티플러스 본사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안혜진 대표와 임직원. 박해윤 기자
▼ 직원들의 반응은 어떤가. 대기업 면세점을 상상하며 입사한 직원들이 ‘옥비누’ 찾으러 지방에 다녀오는데.
“‘진정성 있게 손님을 생각하는 직원’ 200여 명을 뽑았다. 면세점 안내데스크에도 ‘키 크고 예쁜 미인 직원’ 대신 진심어린 미소로 따뜻이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을 배치했다. 어렵지만 직원복리는 대기업 수준으로 맞출 거다. 수익이 얼마가 나오든 첫해 수익의 30%는 무조건 직원에게 투자하고, 단계적으로 직원들과 이익을 공유해나갈 계획이다. 또한 수익의 30%는 충성도 높은 고객을 위해, 나머지 30%는 회사 미래를 위해 재투자하겠다.”
▼ 신생기업이 수익금을 직원에게 재투자한다?
“잘 알다시피, 공항면세점 사업은 큰 수익이 나질 않는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도를 벗어나 치열하게 싸우기 보다는, 다소 이익이 적더라도 과욕을 버리고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회사를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이다.”
기업의 궁극 목표가 이윤 추구라는 점에서 안혜진 대표의 말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사실 그는 정통 기업인 출신이 아닌 수학교사 출신이다. 고교 수학교사와 유명 입시학원 강사, 원장을 하다가 2003년 친환경 벤처기업의 멤버로 합류하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후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중견 건설업체 임원, 중국계 해외투자법인 한국 대표 등을 지냈는데, 그 중국계 회사가 한국에서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 안 대표가 나서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때 인연을 맺은 사람이 (주)탑솔라의 오형석 공동대표다. 안혜진 대표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높이 평가한 오 대표의 제의로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안·오 대표가 재투자를 강조하는 것도 법인도 사람과 같아서, 올바른 자양분을 듬뿍 주면 잘 자란다는 믿음에서다.
“껌이라도…”
인천국제공항.
“아무리 중기 제품이 우수하다 해도 세계적 유명 브랜드와는 ‘게임’이 안 된다. 우리도 그걸 잘 알기에 함께 고쳐나가려 한다. 고객들은 ‘국내 중소기업 제품은 좋은데 디자인이 별로…’라고 말한다. 중소기업 제품을 전시하니 ‘시골 가게 같은 느낌’이라는 말도 들었다. 중소기업이 독자적으로 디자인 개발을 하기 어렵다면 중소기업청 같은 데서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 우수 중소기업 제품 디자인 개발을 도와주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20억 원을 들여 중소기업관을 리모델링했고, 산뜻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제품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중소기업 관계자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친분도 두터워졌다. 며칠 전 경기도 중소기업협회 임원들이 단체로 출국하는데, 탑승동이 반대편인데도 일부러 시티면세점을 찾아와 격려해줬다. ‘껌이라도 팔아주려고 왔다’며 제품을 사는데 눈물이 나더라. 투박하지만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면세점을 만들면 된다.”
▼ 두렵진 않나.
“전혀. 사무실에 있으면 ‘넘어야 할 산’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지만 면세점 현장으로 나가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힘이 난다. 처음엔 면세사업 관련된 유관부처나 대기업 면세점 관계자들이 ‘대기업 사이에서 중소면세점이 해낼수 있을까’하는 우려를 많이 했고 ‘안혜진도 며칠 해보다 손을 들 거다’라고 예상했지만, 지금은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자랑 같지만 요즘엔 공항 공사 관계자들이 꼿꼿하고 정직하게 한발 한발 가장 잘하고 있다는 칭찬도 자주 한다. 많은 사람이 격려하고 있어 자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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