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찌, 샤넬, 디올처럼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게 로고와 마크를 드러내는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겉으로 정체를 나타내지 않는 ‘스텔스 럭셔리’ 브랜드도 있다. 스텔스 럭셔리는 조용한 사치란 의미다. 의류 안감을 살피거나 가방을 열기 전까지는 브랜드 이름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에르메스, 르메르와 함께 후자의 대표 격으로 주목받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가 셀린느다. 셀린느는 최근 할리우드 배우 귀네스 팰트로가 법정에 출두할 때 착용한 수수하고 클래식한 패션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한국에서도 2004년 말부터 노노스족이 늘어났고 그들을 위해 브랜드나 로고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로고리스 제품이 주목받았다. 그러다 2010년 후반 명품 브랜드들은 오지널리티와 헤리티지를 앞세워 로고와 마크를 다시 부각해 겉으로 드러나게 했다. 명품이라면 비싼 가격을 개의치 않고 구매하는 럭셔리제너레이션(명품족·브랜드족)의 영향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 않던가.
스텔스 패션의 특징은 컬러와 디자인 모두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무엇보다 튀지 않아야 한다. 노골적인 브랜드 노출이 아닌 미니멀한 디자인과 컬러, 고급 소재로 제품의 가치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미국 백화점 니만 마커스에서 명품사업부를 이끄는 조디 칸 부사장은 “로에베·생로랑·미우미우처럼 평소 화려함을 추구하던 브랜드들이 이번 시즌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을 내놓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스텔스 럭셔리가 뜨는 분위기를 굳히고 있다”고 말했다.
로고를 부각하지 않는 ‘스텔스 럭셔리’ 브랜드로는 이탈리아 남성 명품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 로로피아나, 발렉스트라, 보테가베네타,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이 있다. 세계 3대 명품 그룹인 리치몬트 그룹 산하에 있는 벨기에 명품 브랜드 델보, 독일 브랜드 질샌더 등도 이에 속한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가운데는 에르메스와 르메르가 대표적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일명 법정 ‘스텔스 럭셔리’ 브랜드로 주목받은 셀린느도 프랑스 태생이다.
어린이 신발 전문점으로 출발
1945년 셀린 비피아나와 그의 남편 리샤 비피아나가 프랑스 파리에 어린이 신발을 맞춤 제작하는 장신구 부티크를 열었다. 그렇게 출발한 셀린느는 1948년까지 매장을 3곳으로 늘렸다. 1963년에는 여성 신발을 론칭했다. 1964년엔 재스민, 갈바늄, 장미 향이 나는 브랜드의 첫 번째 향수 ‘Vent Fou(Wild Wind)’를 선보여 큰 호응을 얻는다. 1966년 셀린느는 가방, 벨트와 함께 장갑을 포함한 가죽 액세서리를 제품 라인에 추가했다. 셀린느 설립자인 셀린 비피아나는 남편인 리샤 비피아나를 추모하며 셀린느의 시그니처 문양인 설키(Sulky·마차)를 이때부터 가방과 신발, 벨트 등 액세서리 라인에 사용했다.1969년 셀린느는 여성이 실용적으로 착용할 수 있는 데일리 룩의 여성복 라인을 론칭한다. 1970년대에는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미국 베벌리힐스, 홍콩에 이르기까지 글로벌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1973년에는 로고를 재정비해 파리의 랜드마크인 개선문의 사슬 문양에서 영감을 얻은 마크 ‘트리옹페’를 선보였다. 1987년 LVMH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브랜드 셀린느의 잠재력을 보고 셀린느 매장 89개(지분의 1/3)를 사들였고, 1996년 LVMH 그룹이 셀린느를 인수했다. 1997년 셀린 비피아나는 8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셀린느의 디자이너로 일했다. 1999년 마이클 코어가 셀린느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다. 그는 셀린느 브랜드에 그의 시그니처인 스포츠웨어 감성의 고급스러움과 편안한 화려함을 선보였다. 2004년 마이클 코어는 그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론칭하며 셀린느를 떠났다. 이후 버버리의 디자이너이던 로베르토 메니체티와 프라다, 질샌더, 미우미우에서 활동한 이바나 오마직이 셀린느를 이끌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셀린느의 브랜드 가치가 급상승한 것은 2008년 끌로에를 2배 이상 성장시킨 것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가 합류하면서다. 피비 파일로는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출시한 러기지 백, 트라페제 백, 트리오 백, 카바스 백, 클랙식 백 등으로 폭발적 반응을 얻어냈다. 그는 10년간 셀린느의 매출을 2억 유로에서 7억 유로 이상으로 3배 넘게 성장시켰다. 그러다 SNS조차 이용하지 않는 피비 파일로와 온라인 진출에 적극적인 경영진의 마찰로 2018년 디올 옴므와 생 로랑 출신인 에디 슬리먼으로 디자이너가 교체된다.
올드 셀린느 vs 뉴 셀린느
셀린느가 프랑스 해안도시 생트로페에서 촬영한 2023 여름 여성복 컬렉션 영상 한 장면. [셀린느]
셀린느 모델 룰루 테니가 생트로페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셀린느]
에디 슬리먼이 셀린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는 발표가 났을 때 모두가 미니멀한 피비의 셀린느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피비 파일로가 셀린느를 떠난다는 소식에 ‘Céline’ 검색량이 42%나 증가하고, 인스타그램에는 ‘옛 셀린느’를 그리워하는 @oldceline 계정이 만들어졌을 정도. 이 계정은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가브리엘 부친하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피비 파일로가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활동한 시절의 셀린느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2018년 9월 에디 슬리먼의 데뷔 컬렉션은 올드 셀린느,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를 추억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많은 포토그래퍼가 그 모습을 SNS에 담았다. 럭셔리 브랜드에서 디자이너 교체는 주기적으로 있는 흔한 일이지만 SNS에 특별 계정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디자이너 데뷔 컬렉션에서 이전 디자이너 스타일의 옷을 입고 모여 시간을 갖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피비 파일로가 현대를 사는 여성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팝 가수 레이디 가가가 셀린느 가방을 들고 있다(왼쪽). 2020 F/W 시즌부터 셀린느 공식 글로벌 앰배서더가 된 블랙핑크 리사. [레이디가가 인스타그램, Gettyimage]
셀린느는 2012년부터 신세계인터내셔날을 통해 유통됐으나 국내 명품 시장 규모가 매년 커지자 한국에서 직접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1월 신세계인터내셔날과 유통 계약이 종료되자 2월 한국 법인 셀린느 코리아를 설립하고 국내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셀린느의 2015 S/S 컬렉션(왼쪽)과 2019 S/S 컬렉션. [Gettyimage, 뉴시스]
피비 파일로의 ‘스텔스 럭셔리’를 기다리며
갤러리스트(Gallerist)인 남편과 슬하에 딸 하나, 아들 둘을 둔 피비 파일로는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 케이트 부시에게 영감을 받아, 그녀의 노래 중 ‘Woman’s Work’를 주제로 2015년 S/S 컬렉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여성의 일’이란 엄마이자 여동생, 친구, 패션 디자이너이며 그 모든 역할이 똑같은 무게로 중요하고 똑같은 강도의 성취감을 준다고 말했다. 과거 클로에의 상황에서 교훈을 얻은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셀린느 디자인 스튜디오가 아닌 런던을 기반으로 일하며 남편과 아이와 함께 워킹 우먼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줬다. 현대를 살아가는 가정환경을 대면하는 그의 모든 행보가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고, 그가 제시하는 ‘젠틀 우먼’과 ‘엘리트 시크’ 스타일 또한 따르게 했다.2023년 5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2017년 말 아쉬움만을 남기고 패션계를 떠난 피비 파일로가 인스타그램에 ‘피비 파일로’라는 이름의 브랜드 계정을 개설하고, 2023년 9월 자신의 브랜드로 다시 컴백한다는 내용이다. 과거 SNS에 호의적이지 않던 그의 컬렉션이 런웨이가 아니라 브랜드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되며, 7월부터 ‘고객 등록’이 오픈되고 9월에는 웹에서 구매도 가능하다는 뉴스는 우리를 더욱 기대하게 한다. 피비 파일로가 디자인한 셀린느의 시그니처 백인 클래식 백은 심플한 스퀘어 버클이 달려 있고, 버클을 오픈해야 셀린느 제품임을 알 수 있도록 로고가 가방 안에 새겨져 있는 대표적 스텔스 럭셔리 아이템이다. 이번에 탄생하는 피비 파일로의 새로운 브랜드에 숨은 스텔스 럭셔리를 기대해 본다.
셀린느 전성기를 이끈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 [Getty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