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조작된 기억, 불편한 진실

  • 김석우 군산대 강사·사학 swooj3k@hanmail.net

    입력2008-01-07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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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이경순 엮음, 휴머니스트, 460쪽, 2만8000원

    만일 어느 한 사람에게 임진왜란(1592∼1598)이란 국제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단연 첫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실제로 동아시아 질서의 주도권을 움켜쥔 사람은 청조(淸朝)를 건설한 누르하치였다. 이 두 사람은 16세기말 동아시아 세계의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 한 야심 찬 도전자였다는 점에서 같지만, 이처럼 결과는 판이했다.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패하고 누르하치는 성공했을까. 계승범의 글은 그 차이를 대단히 흥미롭게 말해준다. 필자는 누르하치나 히데요시가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명(明)의 분신처럼 여겨졌던 조선을 마주해야 했는데, 그 대응 방식이 대조적이었음에 주목한다. 누르하치는 외교를 통해 조선과 명의 결속을 차단한 다음 중원을 겨냥하는 신중한 행보를 보인 반면,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오히려 조선과 명의 군사 동맹을 강화시켰고, 결국 그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히데요시의 오판이 개인적 문제에 기인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W J 보트도 이 책의 다른 논문에서 히데요시가 결코 전쟁광이 아니었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지적했다. 계승범은 히데요시의 선택이 동아시아세계에서 일본이 갖는 역사적 위치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히데요시의 일본은 명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세계 안에 들어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책봉-조공 제도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단지 자신의 특기인 전쟁의 방식에 기댔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스템의 내부에서 그 장단점을 정확히 이해했던 누르하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史에 대한 몰이해

    누르하치와 히데요시 비교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안에서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로 임진왜란을 이해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먼저 동아시아사(史)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아시아사 관점이란 조선과 일본, 중국과 랴오둥(遼東) 등을 포함하는 다자 관계 분석과 더불어 책봉-조공관계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임진왜란이 논의될 때, 우리는 히데요시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이 어떻게 기억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다카키 히로시의 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히데요시를 현창하고 기념하는 과정과 그 현실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일강제합방 이후 조선침략의 선구자로서, 나아가 대동아 건설의 웅지를 품었던 선각자로서 히데요시의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작된 기억이 통용될 수 있게 하는 기름진 토양은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망각과 몰이해일 것이다. 서구 역사학의 유입으로 역사의 이해가 국가 단위로 쪼개짐으로써 동아시아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사 연구를 제기하는 것은 현재의 국가 기억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지역에 화해와 공존의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표방하는 문제의식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두 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서강대 정두희 교수 주도 아래 2003년부터 기초연구와 자료 조사, 그리고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지역의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석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문을 작성했다. 급조된 연구 성과가 드물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 독자에게 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은 불편한 진실들에 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전쟁 기억의 조작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몇 편의 글은 그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

    정지영은 놀랍게도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었다는 얘기는 입증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논개가 역사 속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6·25전쟁 이후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논개의 충절이 활용된 결과다. 그 이야기 안에서 논개는 기생으로서 본래 타락한 존재이지만, 국가에 충성을 바치면 순결해질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논개를 민족의 이름으로 현창하지만 사실 여성과 소외 계층을 배제하는 위계 논리가 민족 담론 안에 작동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요네타니의 글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의 운명을 추적한 것이다. 그 수가 대략 수만에 달하고, 종전 이후 6000여 명이 귀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뜻밖에도 귀환 포로들이 대부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동안 일본의 대규모 인신 약탈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귀환 포로들을 조선에서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영휘의 글은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조작된 것임을 실증한다. 영조대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조헌과 칠백의총을 현창하자, 그에 대항하여 남인 집단이 ‘동고록’을 출간해 화왕산성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적 기억이 실제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편 존 B 던컨은 역사에서 기억이 국가나 특정한 집단에 의해 조작되는 것만은 아님을 폭넓은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유포된 ‘임진록’에 드러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적한 뒤, 개항 이전에 이미 조선의 비엘리트층 사이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 사회를 뛰어넘는 일체감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경험은 점진적으로 한국 사회에 ‘민족’이 형성되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계보를 추적한 정두희는 나아가 기억 연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순신에 대한 근대적 기억을 검토한 결과 신채호를 제외하면, 모두 이순신이 당면했던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감추었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은 무서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도피처(229쪽) 였던 셈이다. 정두희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랴오둥과 중국적 세계질서

    이 책의 총설에서 김자현은 임진왜란을 근대 일본이 취한 팽창주의의 역사적 전조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것은 근대 세계의 형성을 정적인 대륙세력과 역동적인 해양세력의 충돌로 이해하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이해라는 것이다(33쪽). 임진왜란은 종종 책봉-조공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린 획기적 전쟁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지적은 그 뒤 어떠한 질서가 이 지역에 들어섰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한 설명은 강대국 일본의 대두라는 근대적 상황을 연상시킬 뿐이다.

    전통적인 세계질서의 파괴라는 담론은 또 한편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명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케네스 스워프는 명의 황제인 만력제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명의 서북방 닝샤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만일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명의 주력군이 일본군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의 황제는 조공국에 대한 책봉국의 의무를 강조했고, 그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외교관계는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353쪽).

    김한규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를 돕는다. 그는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역사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당 시기에는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에 맞서 관중에 근거한 중원왕조가 동아시아 세계를 주도하였으나, 송-청 시기에는 랴오둥에서 건립된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가 잇달아 출현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원과 청 사이에 있었던 명은 고대시기처럼 재차 중원에서 건립된 한족 왕조였고, 그 결과 이 시기 랴오둥은 주변부로 전락했다. 힘의 공백지대가 된 랴오둥에 고려(말)와 조선(초)이 진출을 시도했고, 그 다음 일본이 나선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따라서 이후 랴오둥에 출현한 청의 누르하치가 동아시아 패권을 재차 장악한 것은 송-청 시기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정상적인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임진왜란이 주변 지역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기는 했으나, 주자학과 문관 관료제에 기초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는 당분간 견고하게 유지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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