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호

신화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입력2008-12-09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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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에 살고 있어요. 참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내가 만난 많은 학생이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신화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대학 강연에 가면 학생들로 미어져 터집니다. 작은 강의실밖에 배정해 주지 않아요. 당국자들이 학생들의 충만한 열기를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 -본문 중에서
    신화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b>신화의 힘</b><br>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근대 이후엔 ‘역사란 무엇인가’가 중심 화두였다면 탈(脫)근대를 말하는 오늘날엔 신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대형서점에는 신화 서적 코너까지 따로 마련될 정도다. 이는 지나치게 기술화, 합리화돼 메마른 심성에 신화가 따뜻한 생명력을 부여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신화란 무엇인가. 학자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내리고 있으나 대체로 ‘상고 인류의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담은 신성한 이야기’라고 한다. 신화는 당시 인류에게는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생활원리였다. 신화는 아득한 시절 인류 공통 경험의 표현이므로 집단 무의식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보편성 및 원형성을 지닌다 하겠다.

    신화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여우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새가 되는 그야말로 ‘신화의 세계’이지만 그렇다고 개인이 창조한 동화나 소설과도 같지 않은, 집단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과연 무질서한 인간 정신의 산물일까.

    과학적 명징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에게는 신화, 설화, 전설, 야담, 동화 따위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합리성을 유독 중시하는 과학자도 자신이 크리스천일 경우엔 노아의 방주, 모세의 기적 같은 종교적 사건은 팩트라 믿는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이성적인 체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신화의 영역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은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라 불린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인터뷰 전문 저널리스트인 빌 모이어스가 신화에 대해 나눈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캠벨은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아메리칸 인디언 신화, 인도 신화, 불교 사상, 중국의 노장사상은 물론 영화 ‘스타 워즈’까지 활용하면서 신화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는 큰 지혜를 들추어낸다. 그는 현대 인간사 모든 문제를 신화의 테두리에 빗대어 “신화란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걸어야 할 ‘내면의 길’에 대한 안내자”라 강조한다. 신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궁금증을 명쾌하게 정리한 이 책을 읽으면 독자의 두뇌 상상력 엔진은 활기차게 돌아갈 것이다.



    ▼ Abstract

    이 책은 8개 장으로 나뉘었다. 대화체이므로 희곡을 읽는 듯한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주로 빌 모이어스가 질문을 하고 조셉 캠벨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캠벨의 답변을 중심으로 핵심 내용을 정리해보자.

    1. 신화와 현대세계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이지요.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어떤 사람이 시험에 붙을지 떨어질지를 두고 고민한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고배를 마시는 꿈을 꿀 것입니다. 꿈은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하지요.”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우리는, 신화 하면 그리스 신화와 성서 신화를 떠올리지요. 이 두 문화권의 신화에는 신화의 인간화 경향이 있어요. 사원(寺院)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들어감으로써 영적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영적인 삶의 어머니 자궁입니다. 성당의 모든 이미저리(imagery)는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의 형태를 취합니다. 하느님, 예수, 성자들이 모두 인간 형상으로 그려졌지요.”

    4. 희생과 천복(天福)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이 신화의 기본 기능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친구가 누구인지, 조간 신문에 뭐가 실렸는지도 모르는 그런 여백 말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시인은 시 쓰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 자기 삶의 방법을 천복에 맞추어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천복과 무관한 다른 일에 관심을 쏟지요.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끼어들거나 전쟁터에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천복을 붙잡기 어렵습니다.”

    신화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소몰이 아가씨들과 춤추는 크리슈나’, 인도, 7세기. 가운데 원형 이미지는 마음(정신)을 상징한다.

    5. 영웅의 모험

    “많은 종교는 영웅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모하메드, 예수, 석가 같은 우주적인 영웅은 인류에게 유용한 메시지를 가져옵니다.

    프로이트는 우리 삶이 오점 투성이인 것은 부모 탓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상류 계급 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카르마(業)’라는 인도의 개념이 이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여신이라는 관념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해요. 서사시에서는 영웅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고인이 됐거나 먼 곳에 사는 경우가 많지요. 여신은 재생을 가능하게 하지요. 노트르담(성모) 성당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거듭나는 겁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에로스적 사랑은 일종의 사로잡히기예요. 인도의 ‘사랑의 신’은 근육질 청년인데 그가 든 화살은 ‘죽음의 고통이 따르는 고뇌’라 불리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내 몸처럼 대하듯 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아모르적 사랑은 개인적 차원입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기혼자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요.”

    8. 영원의 가면

    “흔히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많은 친구를 잃었지만 어느 날 문득, 그들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해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 About the author

    조셉 캠벨은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컬럼비아대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에서 중세 프랑스어를, 독일 뮌헨대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다.

    사라로렌스대학의 문학부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며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연구했다. 방대한 자료를 훑은 후 ‘신의 가면’이란 4권짜리 역저를 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같은 저서를 내는 등 왕성한 지적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타계했다.

    빌 모이어스는 미국 CBS, PBS(사회교육방송) 등에서 활동한 저널리스트다. 당대 석학들을 인터뷰해 대중에게 그들의 삶과 학문 성과를 쉽게 소개하는 데 독보적인 역량을 보였다. 이 책 ‘신화의 힘’은 1985년 이루어진 대담 녹화를 정리한 것이지만 단지 그 인터뷰 시간만 살필 게 아니다. 모이어스와 캠벨 교수가 8년이나 교유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Impact of the book

    번역자 이윤기씨는 캠벨 교수의 초기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1985년에 한국어로 번역했다. 원저가 나온 지 5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그만큼 신화학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싹텄다.

    그 후 ‘신화의 힘’이 1992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됐다. 한국에도 신화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 책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10년 후인 2002년에 이윤기씨는 ‘신화의 힘’을 다시 번역해 개정판을 내놓았다.

    ▼ Impression of the book

    비교신화학자 캠벨 교수의 원숙한 학문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명저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아쉬운 점은 각 지역의 신화를 아우르지만 저자가 한국의 신화에는 미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Tips for further study

    신화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신화학 1’과 ‘신화학 2’(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임봉길 옮김, 한길사)는 프랑스 석학인 저자가 브라질의 아마존 오지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신화를 분석한 것이다. 비합리적으로 보였던 신화를 잘 살펴보니 그 속에는 합리적인 논리 구조도 있었다. 인간은 야생적 사고와 합리적 사고를 동시에 하지 않나. 양쪽을 통합하면 인간 정신 심층에 내재하는 초합리성을 규명할 수 있다.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이야기 동양 신화’(정재서 지음, 황금부엉이·사진)는 동양 각국의 신화를 집대성한 책이다. 2004년 출판됐을 때 의외의 반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그 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서울대 규장각 고서해제원, 하버드-옌칭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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