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의 르네상스’ 알린 평창올림픽
“평창올림픽은 선진국 진입 알리는 상징적 행사”
“돕겠다”는 말에서 느껴진 이 회장의 진심
평양으로 오인되던 ‘평창’ 알리기부터 함께
두 번의 실패, 세 번째 도전을 위한 결단
‘나라의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 이건희 리더십
삼수 끝에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주역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 그는 은퇴후 평창올림픽의 도전부터 마무리까지 꼼꼼히 담은 ‘평창 실록’을 펴냈다. [박해윤 기자]
북한의 참석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데다가 동계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선수(2920명)가 참여했다. 619억 원의 흑자를 기록해 흥행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기록을 남겼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폐막식 연설에서 “스포츠가 어떻게 사람을 뭉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동계올림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말했다.
외신들도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다시 주목받은 코리아의 위상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018년 2월 8일자 미국 USA투데이는 ‘한국의 르네상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서울올림픽은 한국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가난한 국가가 세계 무대에 첫 데뷔를 하는 것이었다면, 평창올림픽은 한국인들이 거의 모든 선진국과 동등한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올림픽에 18차례나 참가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월레친스키는 평창올림픽에 최고 점수(two-thumbs-up rating)를 주기도 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한결같이 ‘한국의 성공’을 거론해 눈길을 끌고 있는데 그것을 세계에 보여준 계기 중 하나가 바로 평창올림픽이었다.
평창올림픽 유치의 일등 공신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건희 회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 도전 당시, 이 회장은 1년 반 동안 11차례 출장길에 올랐다. 170일간 해외에 체류하면서 지구를 5바퀴 도는 거리를 다니며 IOC 위원 중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치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평창”이 호명되는 자리에서 이 회장은 눈물을 보였다.
이건희 회장의 평창올림픽 유치에 들인 노력은 10여 년에 걸쳐 있다. 삼수 끝에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주역인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는 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김 전 지사는 12년간 도지사를 하며 강원도의 지도와 위상을 바꾸며 ‘행정의 달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도 전역 2시간대 생활권’ ‘3년 연속 수도권 기업 유치 1위’ ‘농가소득 전국 4위’ ‘최근 3년간 인구 1만 명 증가’ 등 그가 지사 시절 일궈낸 각종 지표가 그것을 반영한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해 오대산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다. 그가 서울에 온 김에 만나 이건희 회장과 평창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첫 만남에서 “적극 돕겠다” 약속
회장님을 처음 뵌 건 언제인가요.
“가까운 거리에서 제일 처음 뵌 건 도지사 때인 1999년 1월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였어요. 김대중 대통령도 오셨지요. 개막식 직전에 잠시 티타임을 갖는 자리에서 첫 대면을 하고 인사를 나눴습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눈 건 2001년 겨울 즈음이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첫 번째 도전을 막 시작한 때였는데 글로벌 기업인 삼성과 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죠. 마침 평창 휘닉스파크에 계신다고 해서 찾아뵀습니다.
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는지, 당초 구상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왜 강원도여야 하는지 등을 설명드렸죠. 그리고 회장님의 역할과 지원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과 장차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전환점에서 국가적으로도 상징적이고 실제 큰 이익이 될 것이라는 논리로 말씀드렸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이벤트가 될 것이라면서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셨어요. 삼성이 IOC의 톱파트너(후원 기업)이기도 하고, 이 회장께서 IOC 위원이니 그런 차원에서라도 삼성이 해야 할 책무도 있고요.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대한민국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 건 당연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냥 의례적으로 ‘돕겠다’는 게 아니라 진심이 전해졌어요.”
김 전 지사는 “당시 이건희 회장이 보여준 말과 행동에서 그런 강한 의지가 감지됐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면요.
“저는 회장님이 그 겨울에 며칠씩 휘닉스파크에 머무시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스키를 배우고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재미가 있다고도 하셨고요. 살짝 놀랐습니다.”
어떤 대목에서죠?
“연세를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 최고 재벌 총수라는 직분 자체가 갖는 특수성을 생각하더라도 스키를 배운다는 게 예사롭지 않잖아요. 위험하기도 하고 나이 들어 배우기가 쉽지 않은 운동인데 ‘역시 도전을 좋아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업 경영뿐 아니라 삶에서도 계속 도전 정신을 놓고 있지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스키를 배우고 있다’는 말씀만으로도 동계올림픽에 대한 저와 강원도의 도전에 지지하는 마음을 내주실 거라는 작은 믿음도 생겼어요.
두 번째 인상적이었던 건 저를 보자마자 ‘강원도를 내 집 정원 가꾸듯이 정성스럽게 가꿔놓으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 말이 제 마음을 참 따뜻하게 했어요. 그냥 하신 말이 아니라 세심하게 관찰하고 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제가 군수, 시장, 도지사 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크든 작든 조직을 맡아 책임지는 일을 하다 보면 그런 경험이 없었던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입니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게도 되고요.
‘강원도를 내 집 정원처럼 잘 가꿨다’는 그 한마디에서 ‘아, 이분은 역시 세심하게 관찰하고 살피고 계시구나, 내가 강원도에 쏟아붓고 있는 애정을 알고 계시구나’ 하는 마음에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저와의 만남을 미리 생각하며 상당히 신중하게 준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가장 다가올 말, 즉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전해지던 무게감이라고 할까, 흔히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잖아요. 말 이전에 행동이 앞서는 것, 침묵 속에서 실행력을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천만금의 무게를 가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회장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어요.”
삼성은 올림픽 유치 활동의 한 축
2011년 7월 6일(현지 시간) 남아공 더반에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발표되는 순간 이건희 당시 IOC 위원(가운데)이 기쁨의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조직이 가동되기 시작하니 정부 지원금과 강원도 출연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졌지요. 우선 삼성그룹 이학수 비서실장님부터 찾아갔습니다. 당시 삼성그룹은 빙상 경기단체를 후원하고 있었고, 박성인 삼성스포츠단 사장이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맡고 있었던 데다 올림픽 후원도 하고 있었어요.
이 실장님을 만나고 온 얼마 뒤 박 사장님으로부터 ‘얼마를 후원하면 좋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 스스로가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고, 선례나 관행도 정해져 있는 게 없어서 ‘마케팅 측면, 그리고 다른 경우 사례 등을 고려해 합리적 수준으로 판단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어요. 며칠 뒤 박 사장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나요.
“‘위에 보고를 드렸더니 유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 도와드리겠다’는 거였죠.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다시 연락이 와 ‘후원 문제를 재논의한 결과, 기왕에 스폰서 계약을 하기로 한 만큼 IOC 등 국제 무대에서 글로벌 기업으로서 삼성의 위치와 국가 대사인 올림픽 유치 활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조금 더 여유 있게 후원하기로 결정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단박에 ‘회장님 결정일 것’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지요.
어떻든 유치위원회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후 다른 그룹들의 스폰서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가 1차 도전이었을 때이다 보니 활동 기간도 짧고 해서 삼성 외에 다른 10대 그룹의 참여가 미흡했어요. 태영, 두산그룹, 동부그룹, 부영, 성우리조트, 강원랜드, 농협 등 강원도와 연고가 있는 기업과 단체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김 전 지사는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삼성은 평창올림픽을 지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올림픽 유치 활동의 중요한 축이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강원도, 유치위원회, 정부와 함께 하나의 축이었다는 거죠. 사실 IOC 위원이자 톱 후원사를 운영하는 오너가 자국의 올림픽 유치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무슨 비밀스러운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밖에서 보는 눈이 많다 보니 오해를 살 수 있어서였지요. 그래서 내놓고 삼성의 역할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초기에는 박성인 삼성스포츠단 사장님을 창구로, 국제관계 활동 문제는 국제통 임원들, 그리고 삼성 자체 시스템은 구조전략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전문 팀을 짜서 전사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나중에는 저와 삼성 간에 핫라인을 설치해서 역량을 집중했고요.
회장님과 삼성의 활동은 공개적으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첫 번째 도전부터 굉장히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은 이후 2차, 3차 도전의 여정에서도 변함없이 함께했습니다.”
평창이 처음 도전장을 내민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한 IOC 총회 장소가 체코 프라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평창이라는 도시 이름을 알리는 것 자체가 급선무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올림픽 관계자들은 물론 프라하 시민들도 평창과 한국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평창이란 발음도 어려우니까 ‘평양’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설사 한국을 안다 하더더라도 ‘코리아에도 눈이 오느냐, 동계 스포츠가 있느냐’ 묻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그때 삼성 브랜드 덕을 톡톡히 봤죠.
총회 기간 내내 코리아와 삼성 배너로 거리를 가득 채우고 대부분의 버스와 전차에 삼성 로고를 넣었습니다. ‘프라하라는 도시 전체가 삼성 도시냐’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삼성은 총회 장소인 힐튼호텔 로비에도 올림픽 공식 톱 후원사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올림픽 역사를 매일 방영해서 IOC위원들과 언론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삼성전자 주관으로 여러 문화행사도 열었습니다. 체코 올림픽위원회와 함께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 조수미가 함께 공연도 하고 ‘프라하 시민달리기 대회’도 열어서 자선단체에 기부도 했죠.”
1차 투표에서 일어난 기적 그리고 반전
드디어 결전의 날, 7월 2일이 다가왔다. 분위기는 예상외로 뜨거웠다고 한다.
“45분간의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은 프레젠테이션을 끝냈는데 미국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다가와서 ‘대단했다’고 칭찬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어느 이탈리아 기자는 ‘프레젠테이션만 보면 평창이 1등’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습니다. 형식적이었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입체적이면서 감동적이었다는 거죠.
오후 늦게 투표가 실시됐는데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어요. 1차 투표 총 111표 중에서 51표를 얻어 1위를 한 겁니다. 처음 우리가 유치 신청을 할 때만 해도 ‘평창’이란 이름조차 몰랐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온 거죠. 자크 로게 IOC 위원장조차 놀란 표정으로 잠시 멈칫한 뒤 발표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최종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우리가 얻은 표가 단 두 표가 모자라는 과반에 미치지 못해 2차 투표에 들어갔고, 여기서 캐나다 밴쿠버에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표 차이는 겨우 세 표, 밴쿠버 56표, 평창 53표였어요.”
아쉽게 1차 도전은 패했지만 평창과 코리아를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고 한다. 이를 자크 로게 위원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평창이 세계지도에 이름을 올렸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리고 바로 두 번째 도전을 시작했죠.
“프라하에서 평창이 얻은 말이 ‘눈물겨운 도전, 아름다운 실패’였는데 아무리 눈물겹고 아름다워도 실패는 실패죠. 다시 빨리 추스르고 재도전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2005년 3월 31일 동계올림픽 유치계획서를 정부에 다시 제출했고, 심사를 거쳐 평창 유치를 최종 승인받았습니다. 곧이어 위원회가 꾸려지고 사무처도 신설되면서 2차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 와중에 마침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각 종목마다 전 세계 동계스포츠단체 회장들이 참여하는 ‘스포츠 어코드’라는 행사가 열립니다. 참가단이 어마어마했죠. 이걸 놓칠 수가 없었어요. 한국올림픽조직위원회(KOC), 평창올림픽유치위원회가 나섰는데 개막 공연을 삼성에서 기획했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깜짝 출연시켜 놀라게 했죠. 마치 올림픽 유치전 같은 행사였다는 반응이었어요.”
2015년 새해가 되면서 2차 도전을 향한 본격적 유치전이 시작됐다.
“2차 도전 때에는 전북 무주와 벌인 내부 경쟁부터 어려웠습니다. 결국 무주군이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평창이 다시 후보 도시로 확정됩니다.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을 넘기고 다시 1년 반 만에 올림픽 도전을 하게 된 거죠. 2015년 새해가 되면서 본격적 준비에 나섰습니다. 윤세영 강원도민회장을 재추대해서 범도민 후원회도 다시 정비하고, 1차 때 미흡했던 걸 점검하고 보완해 가면서 기초적인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재외공관장들에게 각별한 노력을 당부했습니다. 정부의 지원도 적극적이어서 청와대 정책실장 주도로 부처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중대 사항들은 고위전략회의를 열어서 기민하게 움직였으니까요. 2차 도전 때 경쟁 도시는 한국의 평창,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다시 나오고 새로 도전에 나선 러시아 소치까지 총 3곳이었습니다.
2006년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이듬해 7월에 올림픽 개최 도시 선정을 했었어요. 저는 도지사 3선 출마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올림픽 재도전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이라 출마를 결심했고 당선됐습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은 평양을 직접 방문해 올림픽 합의서를 교환한 일이었습니다. 유일한 분단국에 유일한 분단도인 강원도가 화합과 평화의 땅이라는 걸 강조해 다른 도시와 차별화를 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의 지지와 협조를 요청했는데 2006년 11월 민족화해협의회 김영대 회장이 저를 공식 초청하기에 이르렀죠. 중국 선양을 경유해 평양에 들어가 김 회장과 문재덕 조선체육지도위원장과 만나 공동 훈련 진행, 남북 단일팀 구성, 개폐회식 공동 참여 등을 골자로 하는 합의서를 이끌어냅니다.”
푸틴 대통령에 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2월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김연아 선수가 마지막 성화를 점화하기 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AP]
“표가 있는 곳이면 지구 끝까지 가겠다는 심정으로 덤벼들었습니다. IOC 위원들 표심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식 프레젠테이션 외에는 개별적으로 만나기도 어려웠고 만난다 해도 길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어요. 짧은 시간에 평창의 이미지를 전하고 간절하게 부탁하면서 상대방 속내까지 읽어야 했으니까요.
중간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과 함께 만나는 방식이나 또는 적절한 명분을 만들어 어떻게든 직접 약속을 잡아 티타임이나 식사 자리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소한 30분 이상 대화를 나눠야 설득해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 나라 낯선 도시로 날아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케냐 IOC 위원을 만나기 위해 나이로비를 갔는데 쿠바에서 아프리카 말라위로 가는 길에 끼워 넣은 일정이었습니다. 비행기를 무려 스물네 시간이나 탔습니다. 결국 몸에 탈이 났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한번은 또 오세아니아 국가들 올림픽 연합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주 시드니, 멜버른을 거쳐 남태평양 작은 섬 사사모아 ‘파고파고’라는 곳을 갔는데 뜻밖에 원양어업과 관련해 많은 동포가 살고 있어서 이분들의 따뜻한 환대와 응원을 받고 감격한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발품을 들이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효과가 컸어요. 저뿐 아니라 정부 인사, 각 경기단체 체육인들,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들, 재외동포 모든 분이 함께 이렇게 뛰어다녔습니다.”
IOC위원 족보도 만드셨다고요.
“모든 위원을 만날 때마다 어떤 대화를 나눴고, 상대방의 반응은 어땠고, 당시 제 느낌과 판단은 뭐였고, 이런 것들을 꼼꼼하게 적었습니다. 대외적으로 공개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비밀 자료였기 때문에 저만 갖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게 큰 데이터가 돼 전략을 짜고 표 예측 판단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까지 열심히 뛰었죠.
“소치가 여름 휴양도시여서 전혀 적수가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열세를 뒤집은 게 푸틴 대통령입니다. 러시아 EU 간에 비자도 간소화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G8 정상회의도 하고, 자크 로게 위원장에 이어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모스크바로 초청해 지지를 요청했어요. 푸틴 대통령은 IOC 총회 직전까지 ‘푸틴 프로젝트’라고 할 만큼 정치·외교·경제적 위상을 바탕으로 파상 공세를 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총회를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현지 실사결과가 나왔는데 평창이 잘츠부르크와 함께 ‘엑설런트’ 평가를 받았고 소치는 ‘베리 굿’ 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된다는 분위기였겠네요.
“다들 자신감이 올라갔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어요. 6월 20일 마지막 청와대 보고를 하고 IOC 총회가 열리는 과테말라로 떠났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까지 날아오셔서 IOC위원들을 만나 지지를 부탁하셨어요.
좀처럼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지 않으시는 이건희 회장님도 스피치를 꼭 해야겠다고 하셔서 프레젠테이션 제일 마지막 순서에 제 기억으로는 2분이 채 안 되게 짤막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이었죠.
“그대로 옮기면 ‘제가 여러분 앞에 참 겸허한 마음으로 섰습니다. 이것이 제 생애에서 두 번째이고 가장 큰 도전입니다’ 이렇게 딱 두 마디였어요. 매우 짧은 연설이었지만 ‘생애 두 번째’라는 표현도 그렇고 목소리나 표정의 무게감이나 진정성도 그렇고, 저를 포함해 그 자리에 선 많은 분들에게 매우 묵직한 울림을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또 좌절의 고배를 마시게 되죠.
“투표가 무기명 전자투표였는데 투표 시작 2분 만에 자크 로게 위원장이 잘츠부르크 탈락을 선언했고, 과반수를 얻은 도시가 없어서 2차 투표를 한다고 했어요. 총 97표 중 평창이 36표, 소치가 34표를 얻어 평창이 두 표 앞서 있는 상황에서 2차 투표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결과가 뒤집혀 소치로 결정이 납니다. 불과 4표 차이였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종합상황실로 오셔서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분위기가 어찌나 처연했던지요. 호텔로 돌아와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너무 슬펐습니다.”
퇴로가 없었던 세 번째 도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2월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우리나라 원윤종 선수와 북한 황충금 선수가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AP]
“제일 컸던 고비, 위기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정치적 공격도 많이 받았고 일부에서는 ‘애초부터 안 되는 걸 도지사 개인의 집착과 정치적 욕심 때문에 시작한 거 아니냐, 이렇게까지 노력했어야 했느냐’는 의심이 터져 나왔어요. 무엇보다 도민들의 좌절과 낙담이 너무 컸어요.
그러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재도전 여론이 일기 시작했어요. 강원일보가 2007년 7월 여론조사를 했는데 도민의 71.3%가 재도전을 지지했고, SBS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7.7%, 도민의 77.3%가 지지하는 걸로 나왔습니다. 도내 각급 기관 단체와 동계스포츠 관련 단체들도 촉구 결의가 잇따르고 있었고요.
저는 사실 엄두가 안 났어요. 몸과 마음이 완전히 다 번아웃된 상태였거든요. 온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여러 날 불면의 밤을 보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초심과 원칙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도전에 나서게 됩니다.
세 번째 도전은 퇴로가 없는 거였어요. 떨어지면 더는 도전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마침내 2007년 9월 3일 2018년 삼수 도전을 선언합니다. 과테말라 패배 후 두 달 만이었습니다.”
당시 경쟁 상대는 IOC 차기 위원장으로 유력했던 토마스 바흐 IOC 위원이 있는 독일 뮌헨이었다. 당시에는 IOC 윤리 규정이 강화되면서 위원들을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김 전 지사 말이다.
“우리가 발품을 팔아 소개를 받는다고 해도 접촉이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유일하게 IOC 위원들 간에만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자국 내에 영향력 있는 IOC위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정말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갓 당선된 문대성 선수 위원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국내 사법처리가 확정돼서 IOC도 자격 정지가 된 상황이었죠.
“그렇습니다. 회장님의 존재감이 너무 컸고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은 회장님이 다시 위원으로 회복돼서 올림픽 유치 전선에 뛰어드는 길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회장님과 삼성그룹은 1차 도전 때부터 유치 활동의 한 축을 이루며 긴밀하게 소통해 왔기 때문에 회장님 없는 유치 활동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가 달린 국가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은 특별사면 복권뿐이었지만 헌법에 의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 아닙니까.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죠. 아무리 올림픽이 중요해도 ‘대기업 봐주기’라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문제였으니까요.
고민 끝에 박용성 KOC위원장과 함께 청와대 함영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만나러 갔습니다. 함 비서관 왈 ‘사면이 대통령 권한이긴 하지만 검토할 수밖에 없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 이 사안을 대통령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결국 ‘내가 나서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개최지, 또 유치를 희망하는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도지사로서 이른바 얘기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한 거죠. 그래서 바로 강원도청 기자실에서 ‘이건희 회장님의 특별사면이 필요하다’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법무부 장관에게 탄원서도 내고요.
그러고 났더니 강원도 시군 위원들, 체육계, KOC, 또 경제 단체 각 곳에서 탄원이 계속 이어지고 나중에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상당히 큰 이슈가 됐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노력이 한데 합쳐져서 그해 2009년 말에 국무회의를 거쳐서 의결하고 사면 복권이 됐습니다.
이어서 2010년 2월 8일 밴쿠버 올림픽 개막에 앞서 열린 IOC 집행위원회에서 이건희 회장에 대한 IOC 위원 자격복귀가 결정됩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위원 자격으로 활발한 유치 활동을 시작하게 되죠.”
그때 이후로 이건희 회장을 만나 말씀 나누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동안 평창을 홍보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것이 한국이 동계올림픽 약체국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 서러움에서 벗어난 게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이었어요. 우리는 8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2018년 평창올림픽을 향한 시험대나 마찬가지였죠.
저는 간절하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올림픽에 참여했는데 정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하듯 우리 선수들이 어마어마한 이변을 쏟아냅니다. 모태범 선수가 500m에서 금메달, 1000m에서 은메달을 따고 이상화가 여자 500m에서 금메달, 이승훈 선수가 1만m에서 아시아인으로 최초 금메달, 5000m 은메달 등 대단했죠.
단연 하이라이트는 김연아 선수가 피겨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피겨 여제로 등극한 거죠. 한국은 금메달·은메달 각각 6개, 동메달 2개로 그때 종합 5위를 합니다. 한국을 향해 동계올림픽 약체국이란 소리는 쏙 들어가는 상황이 된 거죠. 직접 회장님이 밴쿠버까지 오셔서 기뻐하시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3차 시도 때에는 전력이 상당히 집중된 기억이 있습니다.
“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조양호 유치위원장과 유치위원회, 박용성 KOC 위원장과 대한체육회 및 산하 각 종목단체, 강원도와 경기가 개최되는 시·군들, 여기에 삼성·현대·LG·SK·한화·두산·태영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축으로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 외교 라인 축이 있고요. 저는 도지사 임기를 끝내고 체육관련특명대사로 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님도 정말 열심히 하셨어요. 어떨 때는 혼자, 어떨 때는 부인, 가족과 동행해서 전 세계 곳곳을 다니셨어요.
제가 느끼기에는 당시로 보면 비즈니스를 위한 해외 출장보다 그 몇 배로 더 많은 활동을 올림픽 유치로 뛰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제가 언제 그걸 느꼈냐 하면 저도 이미 1, 2차 때 구축된 IOC 위원들과의 네트워크가 있잖아요. 그분들을 만나면 ‘바로 얼마 전에 이 위원이 찾아와 만났다’는 거예요. 듣기로는 1년 반 동안 170일을 해외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이 회장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열심히 해외 출장을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국내에 있을 때에는 정부 행사, 간담회 할 때 뵙고 각종 국제회의에서도 자주 뵀는데 아,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신다, 힘들어 보이신다 하는 느낌이 올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회장님은 ‘이번에는 끝장을 한번 봐야겠다’는 심정이란 게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 모두 절체절명 상황에서 전력투구했지만 회장님의 집중력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삼성 신경영을 일으켜서 이끌고 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었던 어떤 특별한 의지력과 집중력이 아마 저런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2월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참가자들이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뉴시스]
“물론이죠. 우리는 그걸 ‘더반 대첩’이라고 불렀는데 더반 총회가 다가오면서 겉으로는 연막을 좀 쳤지만(웃음) 사실은 조금 편안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전력투구해야 되니까 남은 힘을 다 쏟자는 분위기였죠. 결전 전날 늦은 밤, 박용성 회장과 단둘이 제 호텔 방에서 만나서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IOC위원별로 예측치를 다 까보자’ 했는데 나중에 보니 거의 일치했습니다.
투표가 끝나고 발표를 기다리면서 호텔 뜰로 나와 서성이고 있는데 오지철 문체부 차관이 오더니 눈물을 글썽이면서 저한테 ‘그동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얼싸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죠.
그렇게 둘이 발표식장으로 가는 길에 회장님을 만났어요. 회장님 역시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생 많으셨다’고 하셨어요. 저는 연신 ‘감사하다’고 하는데 이 양반이 덜커덕 제 손을 잡아 쥐시면서 왈칵 눈물을 보이시는 겁니다.
저는 정말 놀랍기도 하고 이분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큰 바위 같은 얼굴을 하신 분이 눈물을 흘리시다니. 저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였는데 그 긴 고생의 여정을 함께했다는 교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발표회장에서도 울먹이시는 표정이 전 세계에 보도됐죠.
“그때 언론들이 회장님께도 소감을 물었던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국민 여러분들이 만든 겁니다. 유치 팀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대통령도 열심히 하셨고 나는 그저 조그마한 힘을 보냈을 뿐입니다.’ 이러셨죠. 최고의 겸손이고 또 최대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또 뵌 적이 있나요.
“2012년 3월인가 구닐라 린드베리 위원장이 이끄는 IOC 조정위원, IOC 위원들이 평창에서 서울로 왔는데 회장님께서 모두 부부 동반으로 신라호텔 영빈관에 초대해 저녁 만찬을 아주 극진하게 베풀어주셨어요.
그렇게 쭉 올림픽 준비를 하다가 2014년 5월 초로 기억합니다만, 스폰서 협의차 삼성 실무진을 통해 회장님을 뵙는 일정을 잡았는데 만나기로 한 그 주에 갑자기 쓰려지신 겁니다. 결국 신라호텔 저녁 식사가 마지막이 된 거죠.”
집념, 돌파력, 추진력 집약한 리더십
평창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제가 오랜 기간 지켜보면서 느낀 건 ‘이분은 평창올림픽을 당신의 일로 생각하는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단지 당신의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일을 당신의 일로 생각하는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건 어느 분야든지 큰 위업을 남긴 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경향이고 특성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이다’ 하고 집중할 때 결과는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이런 리더십의 공통된 특징은 뭔고 하니 다들 아시겠지만 아주 놀라운 집념과 집중력, 엄청난 고뇌입니다. 그리고 끝장을 보겠다는 돌파력, 추진력에 아주 세밀한 것까지 챙기는 디테일이 있습니다. 회장님은 바로 그런 리더십을 가진 분이었어요. 그런 에너지가 삼성을 만든 힘이 아닌가, 또 평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는 중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동계올림픽 유치에 매달렸을까요.
“우선 회장님이 기본적으로 스포츠를 즐겼어요. 스포츠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죠. 두 번째는 삼성이 국가적으로 도움이 돼야 한다는 책무감이랄까, 기업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유달리 컸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직분이 IOC 위원인데 이 위원직을 명예롭게 보람되게 생각한 점들 때문에 전력투구하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결론적으로 회장님의 활동과 업적은 대한민국 100년 체육사에 큰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을 하늘에서 만나신다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요.
“올림픽을 못 보고 돌아가셨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정말 회한이 많습니다. 처음 회장님을 만났던 보광 휘닉스파크의 겨울 눈발이 날리던 그날 그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을 한번 쭉 거닐면서 옛날 얘기 같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