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생필품 교환 위한 매개수단
왕과 전쟁이 화폐 타락의 주범
인플레이션, 우리 돈 훔쳐가는 좀도둑
디플레이션, 경제 기반 무너뜨리는 재앙
[Gettyimage]
경제학 책을 찾아보면, 화폐는 상품화폐에서 금속화폐로, 대표(代表)화폐를 거쳐 법화 순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화폐가 이런 식으로 진화했을까. 필자가 ‘진화’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마치 화폐가 유기적 생명체처럼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견제하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패권 다툼을 해 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화폐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지금부터 화폐의 진화, 다시 말해 화폐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화폐의 등장
처음 화폐는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됐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류가 모여 살면서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됐고, 그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다른 것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곡물, 옷감과 같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생필품이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등장했다. 역사상 최초의 화폐는 기원전 3000년 경 수메르의 보리 화폐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품화폐는 변질 등으로 영구적 가치를 갖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금속화폐에 그 지위를 넘겨주게 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은으로 된 세겔(은 8.33g)이라는 금속화폐가 출현한 것은 보리 화폐가 등장하고 몇백 년이 지난 후였다. 구약성서는 요셉이 은 20세겔에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갔다고 전한다. 하지만 시장의 금속화폐에도 불편한 점이 있었다. 거래 때마다 금은의 무게와 순도를 측정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그 당시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해 시금석(試金石)을 사용했다. 가치, 역량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척도를 뜻하는 시금석이란 말은 원래 금의 순도를 측정하는 돌을 말하는 것이다. 금 조각을 시금석의 표면에 문질러 나타난 흔적의 빛깔과 표본의 금 빛깔을 비교해 금의 순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7세기 리디아왕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리디아왕국 문양이 찍힌 호박금. [위키피디아]
처음에는 금과 은이 합쳐진 호박금(electrum)으로 주화를 만들었지만, 얼마 후 전성기인 크로이소스왕 시절에는 금과 은을 분리해 금화와 은화를 일정한 크기로 주조했고, 여기에 문양을 새겨 넣어 왕의 권위로 그 가치를 보증했다. 이제 거래할 때마다 금속의 순도와 무게를 측정하느라 법석을 떨 필요가 없었다. 화폐에 왕의 권위라는 공권력이 덧씌워졌다. 시장이 가지고 있던 화폐의 주도권은 군주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왜 하필 금·은(金銀)이었을까. 설명하면 이렇다. 인류가 금속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금속이 실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교환의 수단이 됐다. 게다가 금·은은 적당히 존재하면서 적당히 희소성도 있었다. 쉽게 산화되는 철과 달리 유통과정에서 변질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화폐로서 모든 요건을 갖춘 셈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명저 ‘사피엔스’에서 화폐의 역사에서 진정한 돌파구가 생긴 것은 저장과 운반이 쉬운 금속을 사람들이 신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라고 말한다. 즉 진정한 의미의 화폐는 주화와 함께 탄생했다. 주화의 등장으로 원거리 무역이 활성화됐다. 로마의 데나리우스(denarius)는 인도 시장에서도 사용됐고, 이슬람 칼리프들도 데나리우스를 모방한 디나르(dinar)를 발행했다.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도 돈에 대한 믿음은 같았다. 이렇듯 은은 세상을 하나로 연결했다. 은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않는 무수한 사람들이 무역과 산업에서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표현했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다.”
이제 금·은 등 주화가 화폐의 권좌를 차지했다. 강력한 국가가 주화를 만들고 세금도 이 주화로 걷으면서 화폐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커졌고 제국의 확장과 함께 경제는 날로 발전했다. 하지만 화폐 주도권을 군주가 가져간 것이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주가 왕실 경비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량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금과 은의 순도를 떨어뜨려 그 주조 차익을 군주가 차지했다. 세금을 더 걷는 것보다는 백성들의 반발이 훨씬 덜했다. 화폐의 타락, 즉 인플레이션은 백성 주머니의 돈을 부지불식간에 서서히 빼앗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화폐의 타락
권력자가 가지는 주조 차익을 시뇨리지(seigniorage)라고 한다. ‘군주의 권한’이라는 프랑스 말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에 돈을 찍어내는 것만큼 남는 장사는 없었다. 이것은 현재에도 통하는 방법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100달러 지폐 한 장을 찍어내는 데 드는 돈이 50센트 미만이라고 하니 200배 이상 이익이 남는 셈이다. 찍어내기만 하면 바로 팔려나가니 이만한 장사가 없다.
시뇨리지는 역사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다. 로마에서 화폐 변조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네로 황제로,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을 10%로 줄였다고 알려져 있다. 3세기 갈리에누스 황제가 은 함량을 4%까지 떨어뜨리자 아무도 화폐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인들까지 화폐로 월급 받기를 거부하더니 급기야 476년에는 로마로 쳐들어가 서로마를 멸망시켰다. 화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시장경제는 무너졌고,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의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고대의 찬란했던 문화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생겨난 장원 경제가 이러한 경제적 변화와 결합하면서 중세 봉건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가 부활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십자군전쟁으로 길이 다시 열리고,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이 상업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플로린, 베네치아의 두카트와 그로소가 널리 통용되면서 시장경제가 살아나고 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절대군주 헨리 8세 초상화. [Gettyimage]
이렇듯 금화와 은화는 군주로 인해 무수히 수난을 당했다. 군주에게 수난을 당한 것은 화폐뿐만이 아니다. 중세 금융업자들도 군주들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해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중세와 근세 금융가였던 메디치 가문과 푸거 가문도 그렇게 망했다. 권력이 화폐와 금융을 흔드는 그런 시대였다.
상업자본주의 태동
주화가 수난을 겪은 것은 군주의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금과 은은 화폐로서 태생적 약점이 있었다. 공급이 제약돼 있다는 점이었다. 경제가 안정적일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팽창하는 경제에는 화폐가 계속 공급돼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광산을 개발하고 금과 은을 분리해 내는 제련 기술이 발달해도 금과 은은 늘 부족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금·은을 획득하고, 안되면 동(銅)을 섞고, 시장에서는 금·은 대신에 종이를 유통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것이다.
근세 들어 유럽에 절대왕권 국가들이 들어서면서 중상주의(重商主義)가 팽배했다. 수입은 줄이고 수출을 늘려서 금과 은을 많이 유입하는 것이 국부를 늘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6세기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유럽의 화폐 부족이 일시적으로 해소됐다.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상업자본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유럽은 이후 점차 다른 세계를 추월하면서 세계사의 주역으로 올라선다.
만성적 화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에서 고안한 것이 대표화폐였다. 금과 은이 없으니 종이를 화폐로 쓰자는 것이었다. 어쩌면 주화주조권을 독점하는 군주에 대항하는 시장 세력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인이나 금융기관 등 시장 세력이 자신들만의 화폐 시스템, 즉 사적(私的) 유동성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1868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시대에 만들어진 5프랑 금화. [위키피디아]
바그다드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어음도 그중 하나다. 이들과 거래했던 피렌체나 베네치아 등에서도 상업어음이나 융통 어음이 유통됐고, 유대인들은 수표에 유대인들의 성(姓)이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기명 어음을 유통했다. 이렇게 시장이 창출해 낸 유동성은 국가권력이 찍어내는 주화의 빈자리를 보완하면서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17세기에 근대 은행이 건립되면서 금 보관증, 예금증서 등은 은행권(bank note)으로 발전한다. 대상과 기간에 제한이 없는 은행권으로 진화한 것이다. 암스테르담은행, 스톡홀름은행을 거쳐 1694년 설립된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국왕의 채무와 세금을 담보로 은행권(bank note)을 발행했다.
최초의 법정지폐
이 당시 영란은행은 민간 은행이었기 때문에 이때 발행된 은행권이 바로 법정지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시장의 화폐였지만, 법정지폐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영란은행 은행권이 국가로부터 독점권을 획득하고 법정지폐의 권위를 받은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도 20년이나 지난 1833년이었다. 이때부터 영란은행이 발행하는 파운드화는 기축통화로서 금본위제와 함께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를 열었다.
이렇듯 화폐발행권에 대한 국가와 시장 간의 힘겨루기는 국가가 발행한 금화를 담보로 민간 은행이 발행한 지폐(은행권)를, 국가가 법정지폐(法貨)로 인정해 주는 것으로 보기 좋게 마무리됐다. 서로에게 윈윈(win-win)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화폐가 종이 화폐 파운드화다.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태동한 종이 쪼가리가 이제 화폐의 중심에 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파운드화가 금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금 없이 종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이 화폐는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화폐로 자리 잡았다. 세겔 같은 금속이 국가의 공인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주화로 거듭났듯 종이 화폐가 국가의 공인으로 비로소 법정지폐가 된 것이다.
지폐는 17세기 중엽 스톡홀름은행을 필두로 화폐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18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지폐가 발행됐다. 태양왕 루이 14세 사후 재정 파탄이 일어나자 ‘존 로’라는 스코틀랜드 출신 은행가가 재무상에 기용됐다. 존 로는 미시시피회사와 함께 프랑스 은행을 세우고 지폐를 발행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70년이 지난 뒤 프랑스 대혁명 시절 혁명정부는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근거로 아시냐(assignat)를 발행했다. 하지만 이 지폐도 역시 실패한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식민지 정부가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콘티넨탈(continental note)이라는 종이 지폐를 발행했지만, 전쟁 후 이 지폐의 가치는 100분이 1 아래로 떨어지며 사라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미국은 건립 때 미 연방은행을 설립했지만, 법정지폐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미 연방은행이 문 닫은 1830년대 이후는 수많은 민간 은행 은행권을 찍어내는 자유 은행업 시대였다. 은행권이 너무 많아 은행권끼리의 교환 비율을 표시해 주는 책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1860년대 남북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린백(greenback)이라는 법정지폐를 발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다. 1914년 갓 설립된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 현재의 미 달러를 발행하면서 자유은행 시대는 막을 내리고 법정지폐 시대가 열렸다.
미국 전역을 석권한 달러는 당시 세계 기축통화이던 파운드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계기로 무섭게 성장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바로 직전 자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무기로 그동안 영국 파운드화가 누리던 모든 특권을 빼앗아 온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를 시작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달러 패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통화는 달러로 교환 비율이 정해지고, 달러만이 금과 교환되는 금환본위제가 시작되었다.
종이 화폐의 독립선언
하지만 달러 또한 파운드화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통해 금과의 태환을 전제로 한, 즉 금의 권위와 힘에 의존한 지폐였다. 역사가 말해 주듯 연합해 승리를 쟁취한 두 세력은 다시 싸우게 돼 있다.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러가 패권을 차지한 후 금과 지폐가 공조하는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를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1960년대 로버트 트리핀 예일대 교수는 세계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달러화에 대한 수요는 커지지만, 금의 생산량이 이에 따라가지 못해 결국 금 태환이 어려워지고, 결국 달러화의 안정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를 ‘트리핀의 딜레마(Triffin’s dilemma)’라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1971년 ‘닉슨 쇼크’라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베트남전쟁과 복지정책 추진으로 이미 너무 남발한 달러는 금과의 태환 비율을 맞출 수 없었고, 더는 견디지 못하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로써 달러는 금과의 연합을 해체했다. 종이 화폐의 독립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실물자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종이가 독자 생존을 선언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기습으로 금(金)의 지위는 화폐에서 일개 상품으로 전락했다. 믿었던 종이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이렇게 금도 은의 전철을 밟았다.
금과의 고리를 끊은 후 5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달러 패권은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달러 패권 유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약을 맺어 원유 거래를 달러로만 하게 한 ‘페트로 달러’의 위력 덕분이라고 한다. 물론 페트로가 달러 패권의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경제적·군사적 패권국이라는 점이다. 이 덕분에 달러가 기축통화가 될 수 있었고, 기축통화가 된 이후에는 기축통화의 관성과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노력 때문에 여전히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스마트폰 은행 앱에 찍혀 있는 숫자를 화폐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시대다. 은행 앱에 숫자만 찍혀 있으면 실제 그 돈이 은행에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사람들은 점점 현금을 쓰지 않는다. 휴대폰과 신용카드만 가지고 다닌다. 지폐에 대한 코인의 위협도 만만치 않다. 중앙은행들이 서둘러 디지털 화폐(CBDC) 도입을 검토하는 것도 화폐의 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의 형태도 바뀌었지만, 화폐의 역할도 바뀌었다. 거래를 뒷받침해 주기 위해 등장한 화폐가 언제부턴가 경제의 조력자가 아닌 경제의 주동자로 경제 전면에 나섰다. 근세 이전의 시기는 화폐의 수난기였지만, 근대에 들어 화폐가 자기 위상을 갖추고 금융을 통해 재생산되면서 화폐는 더는 국가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실물경제를 조용히 내조하던 현모양처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세상을 한바탕 뒤집어놓는 천방지축 난봉꾼이 돼 버렸다. 과거에 군주에게 핍박받던 화폐가 이제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를 일으키는 폭군이 된 것이다.
어빙 피셔는 화폐수량설(MV=PT)이란 이론을 내세워, 인플레이션이 과다한 통화 발행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M은 총화폐량, V는 화폐 유통 속도, P는 가격 수준, T는 총거래 횟수를 의미한다. 즉 명목화폐로 표시한 총통화량(flow)과 총거래량이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수량설은 뒤집어 보면(PT=MV),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경제 규모에 맞는 화폐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량이 시중에 부족할 때 경제에 문제가 생긴다. 즉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피가 돌지 않으면 사람이 죽듯 돈이 돌지 않거나 어딘가에 쌓여 있으면 경제가 죽는다. 인플레이션이 우리 돈을 훔쳐가는 좀도둑이라면 디플레이션은 경제 기반을 다 무너뜨리는 재앙과도 같다.
화폐의 역사는 한 시대의 통화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대체 수단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화폐 시스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겪으면서 끝도 모르게 발행된 달러화는 정말 안전한 것일까. 달러 패권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