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아시아 대중음악계를 휩쓴 ‘4대 천왕’의 류더화(왼쪽)와 리밍. 음반 발표와 TV쇼 출연, 영화 촬영까지 하나로 묶는 ‘타이 인(Tie-in)’ 시스템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아이돌이던 이들은 십수년간 중화권 대중음악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상하이에 재즈가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전성기에는 미국, 러시아, 필리핀 등 해외 각지에서 온 음악인들이 재즈를 연주했다. 그 가운데 미국에서 온 재즈 트럼펫 연주자 벅 클레이튼의 활동은 당시 상하이의 재즈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위에서 언급한 작곡가들과 가수들은 재즈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중국어로 창작된 노래들뿐 아니라 영어 등 서양의 언어로 된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상하이에 뿌리를 둔 오래된 노래들, 이른바 ‘라오거(老歌)’를 당시에는 ‘쉬다이취(時代曲)’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하면 ‘시대의 노래’라는 뜻일 텐데, 약간의 상상을 보태자면 현대적인 노래, 즉 현대를 맞이해 새롭게 생산되고 소비된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시대곡은 일본과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유행가’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행가라는 말이 비하의 뉘앙스를 떨치지 못한 반면, 시대곡은 지금도 고전적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그 ‘좋았던 시절’
저주룬파(周潤發)가 주연한 영화 ‘화평반점(和平飯店)’은 중국음식점이 아니라 호텔이다.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상하이의 대표적 관광지인 와이탄(外灘)에 연한 유서 깊은 호텔로, 이곳의 1층에는 지금도 당시의 상하이 재즈를 연주하는 바가 있다. 럭셔리한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에도 고급스러운 재즈바들이 줄지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연주하는 재즈는 아스라한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글로벌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이 도시 관광정책의 산물에 가깝다.
여기 모여 있던 그 옛날의 멋쟁이 예술가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1949년의 혁명 이후 대륙에 그대로 남은 음악인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음악인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특히 홍콩에 정착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대륙에 남은 사람들이 ‘박해받았다’고만 말한다면 이는 냉전시대의 사고일 것이다. 실제로 시대곡은 1949년 혁명 이전에도 ‘황색음악(黃色音樂)’이라든지 ‘미미지음(靡靡之音)’이라는 명목으로 좋지 못하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해석을 통해 부연한다면, 대중음악은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음악’이라는 이유로 공산당뿐만 아니라 국민당으로부터도 비판받았다. ‘항일(抗日)’이 중국인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된 시대에 대중음악은 이런저런 정치적 외풍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 시절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노래 한 곡의 사연을 소개한다. 본래 저우쉬안이 부른 ‘何日君再來(님은 언제 돌아올까)’는 1937년에 제작된 영화 ‘三星伴月(삼성반월)’의 삽입곡이었다. 이후 이 노래는 당시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리샹란 등 여러 가수가 다시 불렀다. 그러나 리샹란은 실제로는 야마구치 도시코라는 본명을 가진 일본인이었고, 그녀는 일본의 패전 뒤 처형 위기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 때문에 이 곡은 ‘한간(漢奸)’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덩리쥔이 다시 불러 히트시킨 1980년대 이후에도 중국 대륙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돼 있었다. ‘한간’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친일’이라는 용어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곡이 지닌 복잡한 곡절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상하이 시대곡’이 발견한 새로운 중심지는 1950년대의 홍콩이었다. 홍콩에는 그전까지 월극(·#54259;劇)이라 하는 중국식 오페라와 관련된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상하이에서 ‘피난’온 대중예술인들에 의해 만다린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대중문화가 급격하게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950~60년대 아시아 영화를 주름잡은 홍콩 영화사 ‘쇼브라더스(Shaw Brothers)’도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거점을 옮긴 유수의 연예기획사 가운데 하나였다.
홍콩은 1840년대 이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므로 그 뒤로 영어는 이곳에서 공용어가 되었다. 이곳의 중국인들도 중국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는 우리가 광동어(廣東語)라고 부르는 방언이다. 우리가 ‘홍콩 영화’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 대사는 이 광동어로 이뤄져 있고, 앞서 언급한 ‘화양연화’도 기본적으로는 광동어로 말하고 있다. 광동어의 위력은 비단 홍콩 및 광둥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남아 각지 화교들 가운데 광둥성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륙에서 홍콩으로 남하한 사람들도 순식간에 광동어에 적응하게 된다.
1950~60년대 홍콩의 음악문화는 언어적으로 만다린과 영어로 구분돼 있었다. 만다린은 상하이에 연원을 둔 시대곡이고, 다른 하나는 영미로부터 직수입된 팝 음악이었다. 이는 일종의 세대적 구분이기도 했다. 시대곡이 나이 든 세대가 즐겨 들은 음악이라면 영미 팝은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의 음악이었다. 1964년 비틀스가 직접 날아와 공연을 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홍콩의 젊은 세대들은 밴드를 결성하고 팝 음악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