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인물탐구

만 39세 최연소 대통령의 인생역정

사랑과 야망을 한 손에 쥔 에마뉘엘 마크롱

  • 파리=이미아|한불문화교류협회(Échos de la Corée) 대표

    입력2017-05-18 17: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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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건 프랑스를 잘 모르는 이들의 말이다.”

    프랑스 제5공화국 8대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당선 직후, 루브르 박물관 경내에 마련된 특설무대에 올라 밝힌 당선 소감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중도 신당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이하 앙마르슈)를 지지해준 당원들과 유권자들에 대한 감사인사도 잊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5월 7일 치러진 프랑스 결선투표에서 66.06%를 득표, 32.12%를 득표한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를 가볍게 따돌리며 대권을 잡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하늘이 점지한다’는 말이 프랑스에도 적용되는 걸까.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였다. 우파 공화당 후보이던 그에 대한 지지율이 50%가 넘었다. 하지만 ‘페넬로페 게이트’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피용이 배우자인 페넬로페를 자신의 보좌관과 지인이 발행하는 문학잡지 고문으로 위장 취업시켜 부당이득을 취하고 세비(歲費)를 횡령했다는 의혹을 말한다. 그와 더불어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조종한다는 ‘운명의 방향타’는 급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물네 살 연상의 고교시절 선생님을 아내로 맞아들인 마크롱이 그 포르투나의 입술을 빼앗았다.





    외할머니 영향 받은 문학 소년

    마크롱은 1977년 12월 21일 프랑스 북부 피카디리 지역의 중심 도시인 아미앵에서 태어났다. 신경과 의사이자 아미앵의대 교수인 아버지(장 미셸)와 의사인 어머니(프랑수아즈)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1년 차의 누나가 있었으나 사산돼 맏이로 등록됐다.

    어려서부터 언어 표현 능력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그는 외할머니 아네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철학교사 출신으로 중학교 교장까지 지낸 아네트를 통해 몰리에르, 카뮈, 조르주 뒤아멜 등 폭넓은 프랑스 문학에 눈뜨게 된다. 어려서부터 사색을 즐기며 또래들보다 성숙한 사고로 조숙하다는 평을 받으며 대화하기를 즐기고 학급에서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미앵의 가톨릭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한 마크롱은 문학을 매개로 이후 그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이 그를 파리로 전학시켜 졸업은 명문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 대통령을 여럿 배출한 명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랑제콜로 불리는 파리정치외교학교(SciencesPO)를 거쳐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뒤 초고속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무엇보다 고교생 시절 눈뜬 금지된 첫사랑은 그를 동년배에 비해 훨씬 성숙한 지도자의 길로 이끌게 된다.



    나이와 사제관계 뛰어넘은 사랑

    “남자가 20세 이상 연하인 아내를 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여자가 20세 이상 연하의 남편을 두는 것이 논란이 되는 것은 엄연한 성차별이다.”

    대통령보다 나이 많은 영부인 트집잡기에 나선 언론에 대한 마크롱 대통령의 볼멘 목소리다. 하지만 그보다 정확히 만 24년 8개월 연상인 그의 아내 브리지트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지만 결혼 당시 브리지트가 데려온 세 자녀가 낳은 손자만 7명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3년. 당시 브리지트는 이 학교의 프랑스어 교사이자 연극반 지도교사였다. 은행가와 결혼해 자녀를 셋이나 둔 마흔 살의 유부녀이기도 했다. 심지어 맏딸은 마크롱과 같은 학년 학생이었다.

    사제 간이던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문학이었다. 브리지트는 연극반 학생이던 마크롱의 문학적 소질이 남다른 것을 발견하고 호감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문학작품을 놓고 다양한 토론을 나누는 사이 소년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고 말았다. 브리지트의 거부와 부모의 만류로 이 사랑은 중단되는 듯했다. 하지만 파리로 전학 가서도 마크롱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브리지트는 그가 장래에 꼭 연극인이나 문인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정작 마크롱은 자신의 사랑을 인정받기 위해 동급생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해 행정 관료가 되는 엘리트 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사랑이 야망의 동력이 되어준 셈이다.

    10여 년에 걸친 그의 꾸준한 구애에 브리지트도 두 손을 들었다. 2006년 이혼을 하고 2007년 옛 제자와 결혼했다. 당시 마크롱의 나이는 서른, 브리지트는 쉰넷이었다. 파리로 전학 가기 전 브리지트를 찾아와 “꼭 돌아와서 당신과 결혼할 것이다”라고 했던 약속을 14년 만에 이룬 것이다. 마크롱은 결혼 전 자신의 동창생인 맏딸을 포함해 브리지트 세 자녀의 사전 동의까지 받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불가능에 도전한 정치역정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한 뒤 재무부감사관을 거쳐 엘리제궁에서 다시 경제부 장관이 되기까지 그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4년부터 재무부 감사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마크롱이 내세운 경제 원리는 프랑스 최고 경제전문가 자크 아탈리는 물론 경제부처 관계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당시, 철학적 견해에서 사회 자유주의 경제 논리를 풀어가는 그의 입담과 논리에 많은 사람의 마음이 쏠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에서 휘청거리던 프랑스 경제에 등불을 밝힐 ‘신종 아이콘’ ‘정치계의 UFO’가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2006년 사회당 당원이 된 그는 2008년부터 5년간 유대계 투자전문은행인 로스차일드그룹의 임원으로 일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강남 좌파’였던 셈. 2011년 대선에서 경제자문위원으로 사회당 올랑드 후보의 선거 캠프에 참여해 경제정책 입안을 도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부터 2년간 엘리제궁 부사무총장(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넘버2)으로 있다가 2014년 마뉘엘 발스 총리의 두 번째 내각 때 경제장관에 임명됐다.

    경제장관 시절 2014년 ‘성장’ ‘경제 활동’ ‘기회의 균등’을 골자로 한 마크롱 법안을 제출하고 국회 동의 없이 정부 심의로 가결시킨다. 2016년 2월에 이루어진 내각의 부분 개각 시 그가 제출한 ‘제2의 마크롱 법안’ 내용이 노동부 장관이던 미리암 엘 콤리 법안에 부속돼 통과됐다. 이 바람에 발스 내각에서 그의 정치적 위상이 낮아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그러자 이 당돌한 정치 신인은 바로 대통령 출마 카드를 꺼내든다. 대선을 1년 1개월 앞둔 2016년 4월 6일 고향인 아미앵에서 앙마르슈를 창당하고 출마 준비에 나선 것. 당의 슬로건처럼, 좌도 우도 모두 함께하기로 공표한 뒤 여러 하원의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올랑드 대통령에 대한 신의를 배반했다는 비난을 사면서 재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장관과 마찰이 시작됐다. 결국 창당 6개월 무렵, 경제장관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정치적 대부였던 올랑드와의 관계도 완전히 금이 갔다.

    올랑드와 결별은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호재로 작용했다. 사르코지의 우파 대중운동연합에서 올랑드의 좌파 사회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음에도 부패와 무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성 정치권과 차별화된 지도자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던 올랑드 대통령이 재선 실패를 예감하고 ‘비밀병기’로 마크롱의 출마를 배후조종했다는 소문과 선출직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약점도 걸림돌이었다.



    나폴레옹인가 돈 주앙인가

    젊은 나이에 야심만만하면서도 실용적 파격의 대가인 데다 연상의 유부녀를 사랑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에 비견되는 그는 거침없는 행보와 대담한 언변술로 대중매체의 호응을 끌어냈다. 프랑스 인기연예잡지의 표지는 아내 브리지트와 함께한 그의 사진으로 도배됐다. 그가 실제론 연상의 아내를 놔두고 2중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악성 루머조차 그에 대한 관심의 불을 지피는 땔감이 됐다. 문학, 철학, 수학에 조예가 깊고, 미출간 소설을 3권이나 썼다는 점 때문에 ‘정치권의 돈 주앙’이라 불리는 점도  색다른 매력으로 작용했다.

    마크롱의 정치노선은 친(親)유럽연합(EU), 우파적 경제정책, 좌파적 사회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EU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프랑스의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은 물론 외교안보 강화에도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또 자유시장, 재정 건전성 확보를 강조하며, 법인세 인하와 노동 유연성 강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정년, 연금 정책을 건드리진 않겠지만, 기업의 재량권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교육의 획일성을 비판하며 지역 당국에 더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도록 하고,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고, 저소득층 지역 근무 교사 지원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기성 정당의 지원을 받지 않은 정치 신인이 이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겨우 1년여 만에 ‘엘리제궁 입성’에 성공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쾌재만 부를 처지는 아니다. 그를 따라다니는 부정적 딱지를 떼는 작업부터 선행돼야 한다. 우선 대통령은 됐지만 그를 뒷받침할 정당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6월 11일과 18일로 예정된 총선에서 앙마르슈가 집권당이 되지 못하면 마크롱은 최다 의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공화당과 5년간의 불편한 동거에 들어가야 한다.

    마크롱은 여기서도 기선 제압엔 성공했다. 앙마르슈가 5월 11일 발표한 6월 총선 공천은 기성 정치권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428명의 공천자 중 남녀의 숫자가 각각 214명으로 똑같았다. 또 마뉘엘 발스 전 총리를 배제하면서 수학자, 투우사, 패셔니스타 같은 이색적 인사를 대거 발탁했다. 이를 놓고도 나폴레옹식 실용주의냐 트럼프식 포퓰리즘이냐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마크롱이 선거 기간 가장 많이 언급한 인상적인 두 문장이 있다. “나를 반대할지라도 재능 있는 사람은 제거할 것이 아니라 타협해서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와 “여러분 사랑합니다”이다. 이 문장들이 6월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신화를 만들지는 섣불리 예측할 수가 없다. 나폴레옹의 실용적 카리스마와 돈 주앙의 파격적 매력을 함께 갖춘 그가 과연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프랑스와 EU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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