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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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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는 생몰연대가 분명하고 사진까지 전하는 실존인물이다. 오른쪽은 이기의 문인으로 ‘태백일사’ 등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의 초상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 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1984년 이유립씨가 수상한 배달문화상 상패를 들고 촬영에 응한 이유립씨 부인 신매녀 할머니. 강화도 마니산의 단단학회 건물에 거주하고 있다.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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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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